봄까지 계약 연애

3화: 엄마의 꽃집 주소
다음 날 촬영 장소는 예식장 안 작은 상담실이었다. 실제 상담 예약이 없는 시간에 진행했고, 촬영팀은 고객 정보가 남지 않도록 컴퓨터 화면을 꺼 뒀다. 해주는 꽃장식을 고르는 고객 역할을, 민혁은 플래너 역할을 했다. 대본에는 신부가 원하는 분위기를 설명하면 플래너가 선택지를 제안하는 장면이 들어 있었다.
“이런 촬영은 제가 꽃을 고르면 되는 거죠?” 해주가 물었다.
“네. 다만 실제 고객처럼 말할 필요는 없어요.” 민혁이 답했다.
“실제 손님은 보통 예산부터 말합니다. 원하는 사진은 저장해 왔지만, 사진 속 꽃 이름은 모르는 경우도 있고요.”
“그럼 예산과 계절을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그리고 꼭 넣어야 하는 꽃이 있는지요. 예산이 적으면 종류를 줄이고, 오래 가는 꽃을 섞어야 하니까요.”
민혁은 대본에 메모했다. 촬영이 시작되자 그는 카메라를 보지 않고 해주를 바라봤다. 질문은 정확했고, 그녀는 견적 범위를 설명했다. 촬영 기사가 화면을 끊고 두 사람에게 대본대로 진행해 달라고 요청할 때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진짜 상담처럼 보이네요.” 촬영 기사가 말했다.
“실제로 상담이니까요.” 해주가 대답했다.
소라는 편집 모니터를 살피다가 상담실에 들어왔다. 화면에서 두 사람은 꽃을 고르는 얘기만 했다. 그녀는 홍보 영상에 사랑 이야기의 맥락을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두 분이 서로에게 끌리는 이유를 한 문장씩 말하면 어때요? 예를 들면, 그녀는 현실적이고 그는 섬세해서 서로를 보완한다.”
“그 문장은 제 생각이 아닙니다.” 민혁이 말했다.
“아직 생각을 안 해 봤으니 그렇죠.”
해주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말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말할 수 있어야죠.”
“그러면 무엇을 말하고 싶습니까?” 소라가 물었다.
해주는 대답을 찾으려다 멈췄다. 민혁은 꽃이 떨어질 때 위험 구역을 먼저 막았고,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문구를 중단했다. 그가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해서 끌린다고 말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아직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엔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적었다.
“민혁 씨는 맡은 일을 책임지고, 내가 말할 때 대신 결론을 내리지 않아요. 그건 내가 좋게 보는 점입니다. 연애 감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민혁이 해주를 바라봤다. 그는 자기 차례가 되어도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해주 씨는 자신의 일을 지키려고 사실을 작게 만들지 않습니다. 저는 그 태도를 존중합니다. 그것도 아직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소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촬영팀은 카메라를 내렸다. 그녀는 이번 콘텐츠의 목적을 다시 생각하겠다고 했다. 홍보보다 예식장 이미지를 우선한 건 자신의 판단이었다는 점도 인정했다. 다만 이미 촬영비를 지출했으니, 업체 소개 콘텐츠라도 완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해주는 새 촬영 제안을 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촬영비와 편집비를 나눈 견적을 요구했다. 민혁은 예식장 측에 일정과 비용을 다시 제출하겠다고 했다. 소라는 그 조건을 검토하기로 하고 상담실을 나갔다.
촬영이 끝난 뒤 해주는 민혁에게 집주인의 답장을 보여 주었다. 가게를 옮길 경우 필요한 비용과 계약을 유지할 때의 손익을 계산한 표도 함께 보였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저라면 임대 조건부터 다시 협상하겠어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손님 관계와 어머니의 기억도 포함되어 있겠죠.”
“어머니는 가게를 지키라고 말한 적 없어요. 다만 제게 넘겨 주셨죠.”
“그 차이를 이제 알게 된 거예요?”
“네. 저는 가게를 계속하는 게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남긴 편지에는, 제가 힘들면 언제든 접어도 된다고 적혀 있었어요.”
해주는 편지를 보여 주지는 않았다. 그 문장만큼은 자신이 먼저 다시 읽어야 했다.
민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계약이 가게를 계속할 이유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계약은 가게를 지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요. 그걸 이유로 선택할 수는 있고요. 다만 이 계약이 끝나면 어떻게 할지도 제가 정해야겠죠.”
“그럼 계약 기간을 연장할 생각은 없겠네요.”
“연애 역할을 연장할지는 오늘 결정하지 않아요.”
민혁이 작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촬영 장소에서 나와 건물 뒤편 화단을 걸었다. 벚꽃나무는 아직 절반만 피어 있었다. 해주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민혁은 그녀의 옆을 걷되 팔을 잡지 않았다. 이전 촬영 때와 달리 카메라가 없었다. 둘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다는 사실이 해주를 조금 놀라게 했다.
꽃집으로 돌아온 해주는 어머니의 편지를 꺼냈다. 편지에는 오래된 임대차 계약을 넘기는 과정에서 집주인과 나눈 대화가 적혀 있었다. 어머니는 가게를 꼭 지키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네가 꽃을 좋아하는 동안은 여기서 일해. 꽃보다 이 건물이 더 소중해지면 다른 곳으로 가도 돼”라고 썼다.
해주는 가게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단골에게 알리고, 재고를 줄이며, 가까운 골목의 작은 공간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보증금이 적고 꽃 냉장고를 설치할 수 있는 점포는 드물었다. 그렇더라도 현재 조건에 억지로 묶여 있는 것보다 나았다. 그녀는 집주인에게 계약 연장은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민혁에게는 결정만 전했다. 그는 아쉽다고 말하지 않고, 행사장에 남는 창고 일부를 두 달간 꽃 작업실로 빌릴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해주는 그 제안을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계약 연애와 무관한 임대 조건으로 문서화해 달라고 덧붙였다.
한 달 뒤, 새 점포의 유리문에 ‘해주화원’이라는 간판이 달렸다. 첫 손님은 예식장 박람회에서 꽃을 본 신부였다. 두 번째는 골목에 오래 살던 노인이었다. 민혁은 축하 꽃다발을 들고 왔지만, 문 앞에서 먼저 연락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해주는 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불렀다.
“오늘은 촬영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연인 계약도 끝났고요.”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 왔어요?”
“당신과 다시 만나고 싶어서요. 이번에는 홍보 조건 없이, 서로 생각을 바꿀 권리를 두고요.”
해주는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한 번 만나 보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일과 연애를 섞지 않기로 한 약속은 계속 지켜요.”
“동의합니다.”
그녀는 꽃다발 포장을 풀어 꽃을 다시 세웠다. 민혁은 옆에서 종이를 접어 정리했다. 봄은 계약서에 적힌 날짜보다 느리게 왔고, 꽃은 각자의 속도로 피었다. 해주는 가게 문을 열어 둔 채 첫 번째 데이트 장소를 함께 골랐다.
새 점포 후보는 골목 끝의 오래된 세탁소 자리였다. 전용 냉장고를 들이면 작업 공간은 좁아졌지만, 월세가 현재 가게보다 낮았다. 해주는 관리인에게 전기 용량과 배수 시설을 물었고, 건물 도면을 확인했다. 냉장고와 작업대가 들어갈 자리를 줄자로 재고, 꽃을 싣고 내릴 수 있는 시간도 확인했다. 계약금을 내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곳을 새 꽃집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민혁은 예식장 창고 사용 제안서를 별도 계약으로 가져왔다. 행사장 사용이 없는 평일 낮에만 두 달간 작업대를 둘 수 있고, 보관 물품은 해주가 책임진다는 조건이었다. 그는 창고가 영구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미리 설명했다. 해주는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장기 임차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두 사람은 사용료와 관리 책임을 문서에 적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말을 계약서에 넣으면 피곤하지 않아요?” 민혁이 물었다.
“모호한 약속이 더 오래 피곤하게 만들어요.”
그는 웃으며 서명했다. “그럼 이 문서에 사적인 데이트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적을까요?”
“그건 문서에 넣지 말고, 오늘 물어보세요.”
민혁은 꽃집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다음 주에 저녁을 같이 먹고 싶어요. 촬영과 관계없는 약속으로요.”
해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해주는 새 점포의 계약 날짜와 행사장 창고 일정, 엄마의 편지에 적힌 주소를 떠올렸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해서 만남을 거절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그가 도와줬다고 해서 받아들일 의무도 없었다.
“수요일 저녁은 괜찮아요. 다만 예식장 근처 말고, 제가 고를게요.”
“좋습니다.”
“그리고 꽃집 얘기만 하다가 끝날 수도 있어요.”
“그럼 다음에 다른 이야기를 하면 되죠.”
해주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꽃을 정리했다. 민혁은 문을 닫기 전에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단정하지 않았다. 관심이 생기는 것과 이미 사랑하는 것은 달랐다. 천천히 알아갈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편이 자신에게 맞았다.
며칠 뒤, 촬영한 영상은 업체 소개 페이지에 공개됐다. 조회 수는 크지 않았지만 실제 문의 세 건이 들어왔다. 소라는 다음 박람회 꽃장식 견적을 요청하며 해주화원을 공식 협력업체 목록에 넣었다. 해주는 꽃 주문과 촬영 수당, 창고 사용료를 각기 다른 장부에 기록했다. 일이 늘어난 만큼 꽃을 보관할 냉장고의 크기를 다시 계산했다.
이사 날, 정 여사와 골목 상인들이 상자를 옮겼다. 민혁은 꽃냉장고의 전원 규격을 확인하고 설치 기사를 연결했지만, 직접 들어 옮기지는 않았다. 해주가 부탁한 범위를 지켰다. 새 간판은 어머니가 쓰던 글씨체를 참고해 만들었다. 이름은 그대로였지만, 안쪽 작업대와 진열 위치는 해주가 정했다.
첫날 영업이 끝나고 민혁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해주는 포장을 풀어 꽃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장미는 한 송이 끝이 눌려 있었고, 프리지어는 아직 단단했다. 그녀는 눌린 장미를 따로 빼 작은 병에 꽂았다.
“오늘 저녁 약속, 아직 괜찮아요?” 민혁이 물었다.
“네. 가게 문 닫고 갈게요.”
“데이트라고 불러도 됩니까?”
“그렇게 부르면 제가 불편할 것 같아요. 첫 저녁이라고 해요.”
“좋아요. 첫 저녁.”
두 사람은 골목을 걸어 작은 국수집으로 갔다. 계약서도 촬영팀도 없었다. 민혁은 자신이 결혼식 진행을 맡으며 실수했던 날의 이야기를 했고, 해주는 어머니가 꽃집을 넘긴 날을 말했다. 둘은 상대를 고치려 하지 않고 듣는 데 집중했다. 밖에는 늦은 봄비가 내렸다. 해주는 새 가게의 불을 끄고 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문을 다시 열어 확인하지 않았다. 오늘 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믿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