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까지 계약 연애

1화: 신부 없는 웨딩 박람회
윤해주는 꽃다발을 내려놓자마자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밟을 뻔했다. 예식장 로비의 커다란 화병이 넘어져 있었다. 백합 줄기와 물이 대리석 위로 퍼졌고, 꽃병 옆에는 전선이 그대로 드러난 이동식 조명이 나뒹굴었다.
“손대지 마세요.”
누군가 팔을 잡아당겼다. 해주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웨딩 플래너 차민혁이 장갑 낀 손으로 전선을 들어 올렸다.
“조명 고정 클립이 풀렸어요. 먼저 전원부터 빼야 합니다.”
“제가 꽃병을 다시 세우면 안 될까요?”
“깨진 유리 가까이에 물이 차 있습니다. 맨손으로 만지면 다쳐요.”
민혁은 단호했다. 해주는 꽃집에서 하루에도 여러 번 물을 쏟았지만, 예식장 전기 시설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장갑을 낀 손을 거둬들였다. 그 순간, 로비 입구로 하객들이 밀려들었다. 웨딩 박람회는 삼십 분 뒤 시작이었다.
“정리하고 새 꽃을 놓을 시간은 있어요?”
“전기 담당자 오는 데 십 분, 청소팀에 연락했고, 동선 바꾸면 가능합니다.”
“꽃은 제가 맡을게요.”
“넘어질 위험이 없는 곳만요.”
그는 구역을 나눠 테이프로 막았다. 해주는 창고에서 낮은 철제 화병 두 개와 튤립을 꺼냈다. 원래 로비 장식은 높고 화려한 백합이 중심이었다. 떨어진 꽃은 줄기가 꺾였고, 일부는 이미 갈변이 시작했다. 다시 세워도 손상된 흔적은 가릴 수 없었다. 그녀는 버리는 대신 짧게 잘라 작은 병에 나눠 꽂았다.
“예식장 분위기와 안 맞아요.” 민혁이 말했다.
“박람회 손님은 오늘 결혼식을 올리러 온 게 아니잖아요. 저 꽃이 왜 떨어졌는지 모두 봤고요.”
“그럼 사고를 감추지 않겠다는 거예요?”
“사고를 꾸며서 없던 일로 만들 순 없죠. 대신 안전을 확인하고, 남은 꽃을 쓸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는 거예요.”
민혁은 조명 기사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 구역은 로비 한쪽에 작은 형태로 남았다. 해주는 자른 백합을 세 개의 병에 나누고, 튤립을 바닥 가까운 곳에 배치했다. 꽃이 낮아지자 로비가 덜 위압적으로 보였다. 하객들은 막힌 구역을 피해 걸으며 꽃병을 바라봤다. 박람회 직원 한 명이 “이게 원래 설치였나요?” 하고 물었지만 해주는 아니라고 답했다.
“고장 난 장식을 살린 겁니다. 오늘만요.”
그 직원은 사진을 찍어 행사 계정에 올리겠다고 했다. 해주는 상호를 잘못 적지 않도록 자기 명함을 건넸다. 꽃집 이름은 ‘해주화원’. 엄마가 오래전에 붙인 이름이었다. 명함 뒷면에는 가게 주소와 임대 문의 번호가 인쇄되어 있었다. 가게 계약은 이번 달 말에 끝난다. 재계약을 하려면 보증금을 올려야 했다. 박람회 납품료가 들어오면 일부는 막을 수 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행사 준비가 끝나고 민혁이 남은 전선을 정리했다. 그는 해주가 물에 젖은 소매를 털고 있는 걸 보고 수건을 내밀었다.
“일처리는 빠르네요.”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런 뜻이었어요.”
“플래너는 보통 누구에게나 그렇게 딱딱해요?”
“안전 사고가 나면 제가 책임져야 하니까요.”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해주는 더 묻지 않았다.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오갔고, 행사장 직원들은 사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박람회 시작 후 민혁은 신부 대기실과 상담 부스를 오가며 정신없이 일했다. 해주는 꽃을 손질하고 주문 상담을 했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지만, 민혁은 필요한 말만 하고 지나갔다.
오후 세 시쯤, 단정한 정장을 입은 백소라 대표가 해주를 찾아왔다. 예식장 대표인 그녀는 꽃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장식 누가 바꿨죠?”
“제가요. 넘어져 깨진 꽃병이 있어서요.”
“손해를 숨기려고 꽃을 다시 꽂은 건가요?”
“아니요. 구역을 막고 시설팀 확인을 기다리는 동안, 손상된 꽃을 재사용했습니다.”
소라는 고개를 돌려 민혁을 찾았다. 그가 다가오자 손에 든 보고서를 건넸다.
“사고가 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손님들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원래 디자인처럼 오해하면 곤란해요.”
“저는 바뀐 장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해주가 말했다.
“그럼 더 분명히 해야겠네요. 우리는 장식 협력사를 다시 검토할 겁니다.”
해주는 명함을 돌려받지 않았다. “검토하셔도 됩니다. 다만 꽃병이 넘어졌다는 사실을 가리려는 목적으로 업체를 정리하신다면, 그건 계약 문제가 아니라 안전 문제예요.”
소라의 얼굴이 굳었다. 민혁이 해주 쪽을 보았다. 그가 대신 말을 꺼내려다 멈췄다. 해주는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제가 본 건 고정 클립이 풀려 있었다는 점뿐입니다. 원인을 확인할 때까지 사고를 작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소라는 보고서를 접어 들고 자리를 떴다. 해주는 남은 꽃을 정리하면서 손끝에 묻은 흙을 닦았다. 민혁이 가까이 와서 말했다.
“대표님이 장식 계약을 바꿀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죠.”
“겁나지 않아요?”
“겁나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민혁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오후가 저물 무렵, 행사장 앞에 작은 트럭이 도착했다. 꽃집 건물 관리인이 내린 상자를 해주에게 건넸다. 임대료 조정 통지서였다. 보증금은 두 배, 월세는 삼십 퍼센트 인상.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음 달 말에 가게를 비워야 했다.
해주는 종이를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손이 떨렸지만, 여기서 울고 싶지는 않았다. 민혁은 통지서 제목만 보았고 자세한 내용은 묻지 않았다.
“꽃집이 문을 닫게 됩니까?”
“결정된 건 아니에요. 제가 버틸 방법을 찾을 거예요.”
“그 방법에, 연인이 필요한가요?”
해주는 고개를 돌렸다. 민혁은 조금 전부터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었다. 행사장 계약서에 적힌 참가자용 홍보 계획과 세 사람의 사진. 박람회는 지역 결혼 업체를 소개하는 짧은 영상도 촬영할 예정이었다. 둘이 연인처럼 서 있으면 신혼 고객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지금 저한테 연애를 제안하는 거예요?”
“한 달 동안 연인인 척해 달라는 계약입니다. 사적인 시간은 제한하고, 행사 홍보에만 등장하면 됩니다. 대가는 꽃집 월세 한 달분과 다음 시즌 장식 계약 협의권.”
“왜 제가요?”
“오늘 이 공간에서 제일 자연스럽게 보였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대표님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그는 계약서 초안을 내밀었다. 해주는 받아 들지 않았다.
“연애를 연출하면 꽃집이 살아날 수 있다는 건가요?”
“확정은 아니에요. 다만 한 달 동안 우리 팀이 지역 업체 홍보를 진행하고, 당신은 그 과정에서 정당한 일당을 받습니다.”
“연인인 척하는 대가로요?”
“그 표현이 싫다면 계약하지 않아도 돼요.”
민혁은 계약서를 거두려 했다. 해주는 그제야 종이를 받아 들었다. 표지에 적힌 금액이 가게의 월세와 비슷했다. 숫자를 보자 가게 안에 쌓인 꽃 상자와 엄마가 쓰던 낡은 전정가위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 제안은 자신이 만든 꽃으로 돈을 받는 일이 아니었다.
“오늘은 결정하지 않을게요.”
“알겠습니다.”
“계약서에 홍보 활동 시간, 사생활 공개 범위, 중도 종료 조건을 넣어요. 그리고 꽃집 일은 별도 계약으로 분리해 주세요.”
민혁은 예상하지 못한 듯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럼 내일 수정해서 보내겠습니다.”
“좋아요. 서로를 좋아하는 척할 수는 있어도, 서로의 사업을 볼모로 잡지는 말아요.”
해주는 꽃통을 들고 로비를 나왔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집주인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이전 의사를 오늘 안에 알려 주세요. 다음 임차인과 협의 중입니다.
민혁이 뒤따라 나와 꽃통을 대신 들어 주려 했다. 해주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짐은 제가 들게요.”
“내일 계약서를 보낼게요.”
“보내세요. 읽고 나서 말할게요.”
그녀는 통지서를 꺼내 다시 읽었다. 종이 가장자리의 접힌 선이 손가락에 닿았다. 꽃집을 지킬 방법은 아직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자신의 손으로 고칠 수 있는 것과 선택해야 하는 것을 구분했다. 그때 민혁의 휴대전화에 소라 대표의 메시지가 떴다.
두 분 사진, 공식 홍보물에 써도 되겠죠? 연인 콘셉트로 잡으면 반응이 좋겠어요.
민혁은 화면을 껐다. 해주는 내용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턱이 굳는 걸 보았다.
저녁이 되자 해주는 꽃집으로 돌아왔다. 오전에 준비한 튤립 열두 송이 중 여섯 송이만 팔렸다. 남은 꽃은 꽃병에 나눠 꽂아 창가에 두었지만, 다음 날까지 모두 팔리지 않으면 줄기가 상할 것이다. 그녀는 매입가와 폐기량을 장부에 적었다. 꽃을 적게 사면 진열이 비고, 많이 사면 버리는 양이 늘었다. 다음 달 임대료는 매출이 조금 오른다고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단골인 정 여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손녀 졸업식에 들고 갈 꽃을 골라 달라고 했다. 해주는 예산을 먼저 물은 뒤 작은 프리지어와 계절 잎을 섞었다. 정 여사는 꽃다발을 받아 들고 “가게 문 닫는다는 말이 있던데” 하고 물었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요.”
“네 어머니도 늘 그랬지. 가게 때문에 네가 힘들어 보이면 하루 쉬게 했어.”
“엄마는 제가 꽃을 계속 좋아하길 바랐던 것 같아요.”
정 여사는 꽃다발 리본을 만졌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늘 같은 자리에서 해야 하는 건 아니더라.”
해주는 그 말을 계약서보다 오래 생각했다. 민혁이 제안한 돈을 받으면 당장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버티는 것이 옳은지, 옮기는 것이 포기인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 판단은 촬영 결과나 누군가의 연애 연출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계약서 뒷면에 촬영 수당과 꽃 주문 대금을 따로 계산했다. 홍보에 참여하는 시간만큼은 노동으로 기록하고, 장식 주문은 재료비와 작업비를 분리해야 했다. 그 기준을 민혁에게도 알렸다. 그는 답장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모티콘 대신, 다음 계약 수정안에 그 항목을 넣겠다고 적었다.
밤에 해주는 오늘의 꽃을 정리하다가 깨진 화병에서 건진 백합 한 송이를 발견했다. 줄기가 꺾여 더는 세울 수 없었지만, 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꽃을 작은 유리병에 옮겨 담았다. 잘못된 조건을 그대로 복구하는 대신, 쓸 수 있는 부분을 골라 새로운 자리를 만드는 일. 오늘 자신이 한 일도 그런 모양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