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오르는 사람들

1화: 풀린 홀드 하나
오재원은 매트 위에 올라가기 전에 벽의 빨간 홀드를 손으로 흔들었다. 손끝이 조금 움직였다. 그는 바로 아래 구역을 막고, 체육관 회원들에게 다른 벽을 사용하라고 안내했다. 아직 오전 수업 전이라 체육관은 조용했다. 어제까지 국가대표로 불렸던 사람은 이제 홀드 하나를 조이고, 임대료 봉투를 확인하는 운영자였다.
“저 홀드 어제는 괜찮았어요.” 고등학생 이태호가 말했다.
“오늘 움직이면 오늘부터 사용하지 않는 거야.”
재원은 공구함을 가져와 고정 나사를 확인했다. 홀드 뒤쪽의 인서트가 조금씩 벽에서 밀려나 있었다. 조여도 해결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문제 구역을 통제선으로 막고, 장비 담당자에게 사진을 보냈다. 벽을 다시 열어 보려면 홀드와 뒤쪽 구조를 점검해야 했다.
태호는 지역 대회가 열흘 뒤라며 오늘 빨간 루트를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재원은 빨간 루트가 폐쇄 구역을 지나므로 사용할 수 없다고 답했다. 태호는 스타트와 탑 홀드가 멀쩡해 보인다고 주장했다. 재원은 홀드 하나가 풀리면 아래로 떨어질 수 있고, 바닥에는 다른 회원도 있다고 설명했다. 태호는 입술을 깨물며 다음 벽으로 갔다.
체육관 입구에는 임대인이 보낸 공문이 붙어 있었다. 세 달 안에 밀린 임대료를 정리하지 않으면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재원은 한 달 전에도 같은 날짜를 보고 연장을 요청했었다. 그때 임대인은 홀드 교체와 방음 공사가 먼저라고 했다. 운영을 맡은 뒤 재원은 자기 돈을 빌려 벽 일부를 보수했지만, 더 버틸 여유가 없었다.
양숙희가 강습 시간보다 일찍 왔다. 그녀는 62세였고, 반찬가게를 마친 뒤 일주일에 두 번 체육관에 왔다. 오늘은 초록색 루트를 완등해 보고 싶다고 했다. 재원은 폐쇄 구역을 가리켰다. 초록 루트의 마지막 두 홀드가 빨간 구역 옆에 있어 당분간 사용할 수 없었다. 대신 난이도가 비슷한 파란 루트를 제안했다.
“그건 손가락을 잡아당겨야 하는 동작이 많아 보여요.”
숙희는 손을 펴고 굽혔다. 손가락 관절이 뻣뻣한 날이 있었다고 했다. 재원은 상태를 숨기지 말고, 무리하면 바로 내려오라고 했다. 숙희는 병원에서 관절염 진단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재원은 그 말을 듣고 강습을 취소하지 않았다. 대신 당기는 홀드보다 발을 넓게 쓰는 쉬운 루트를 골랐다. 숙희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다시 물었다.
“손가락 아프지 않게 한 번 끝까지 가 보고 싶어요. 매달리기보다 발을 놓는 걸 배울래요.”
재원은 쉬운 노란 루트 아래에 섰다. 잡기 좋은 큰 홀드가 허리 높이에 있었고, 그 왼쪽에 숙희가 놓친 발 디딤이 있었다. 그는 자기 손바닥을 홀드에 얹고 왼발로 체중을 옮겼다. 숙희가 손에 힘을 주려 할 때마다 발밑의 노란 점을 가리켰다. 그녀는 분필 묻은 손을 털고, 손이 아닌 신발부터 벽으로 가져갔다.
숙희는 첫 시도에서 두 번째 홀드에 도달하지 못했다. 손으로 몸을 끌어당기려다 발이 벽에서 떨어졌다. 매트에 안전하게 내려온 뒤 그녀는 숨을 고르고 손가락 상태를 확인했다. 통증은 없었지만 손에 힘이 빠졌다. 재원은 바로 다시 오르지 말고, 동작을 벽 아래에서 먼저 연습하자고 했다.
태호는 옆 벽에서 빨간 난이도 루트를 반복해서 시도하고 있었다. 첫 시도에서 높은 홀드를 잡지 못했지만, 곧바로 다시 벽에 붙었다. 재원은 낙법 구역이 비어 있는지 확인하라고 했다. 태호는 괜찮다며 다시 점프했다. 그의 오른발이 매트에 비스듬히 닿았다. 태호는 발목을 잡고 벽에 등을 기댔다.
재원은 그에게 다가가 움직일 수 있는지 물었다. 태호는 일어날 수 있었지만 발목이 찌릿하다고 했다. 재원은 훈련을 멈추고 얼음팩을 가져왔다. 숙희는 매트 가장자리에서 공간을 비웠다. 태호는 대회까지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며 계속하려고 했다. 재원은 오늘은 등반을 멈추고, 붓기와 통증이 남으면 보호자에게 알리고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대회 연습을 못 하면 어떡해요?”
“몸을 다친 채 연습하면 대회에 못 나갈 수도 있어.”
태호는 얼음팩을 대고도 벽 쪽을 계속 바라봤다. 그는 대회 완등 기록을 진학 추천서에 쓰려고 준비 중이었다. 부모는 성적이 좋지 않으면 운동 진로를 계속 지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태호는 그 사실을 재원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대회가 중요하다는 말로 압박을 숨겼다.
점심 무렵 재원은 느슨해진 홀드 뒤쪽을 점검했다. 다른 홀드의 나사도 한 곳 풀려 있었다. 그는 벽의 해당 구역을 전부 막고, 회원들에게 안전 점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회원 한 명은 회비를 냈는데 쓸 수 있는 벽이 줄었다고 불평했다. 재원은 이용료 일부를 환불하거나 다음 수업으로 넘길 수 있다고 안내했다. 체육관 운영비가 빠듯했지만 안전 점검을 생략할 수는 없었다.
임대인이 재원을 만나러 왔다. 그는 공사 구역이 늘어나면 월세를 내지 못할 거라며, 장비 교체 비용을 재원이 부담할지 물었다. 재원은 계약서상 벽 구조와 홀드 관리 책임을 확인하겠다고 했다. 임대인은 대화가 길어지면 계약 갱신이 어렵다고 말했다. 재원은 회원 안전과 시설 책임을 구두로 넘길 수 없다고 답했다. 임대인은 다음 주까지 보수 계획과 밀린 월세 상환안을 서면으로 달라고 했다.
숙희는 다시 노란 루트 아래에 섰다. 폐쇄된 초록 루트를 돌아보던 시선을 자기 신발로 옮겼다. 오른손으로 잡는 큰 홀드와 왼발 디딤을 먼저 확인했다. 재원은 손을 올리는 순서보다 발을 어디에 놓는지 물었다. 숙희는 벽 가까이 발을 붙이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이번에는 두 홀드 더 올라갔다. 마지막에 내려오는 순간에도 낙법 자세를 유지했다.
“손에 힘이 덜 들어갔어요.” 숙희가 말했다.
“몸을 벽 가까이 둔 덕분이에요. 다음엔 같은 동작을 다시 해 보죠.”
그녀는 완등하지 않았지만, 손가락을 무리하게 쓰지 않고 더 높은 홀드에 도달했다. 재원은 그 시도를 기록했다. 숙희는 대회에 나갈 생각이 없다고 했다. 재원은 그녀에게 대회 출전을 권하지 않았다. 동네 대회 참가보다 자기 몸에 맞는 방법을 찾는 게 지금 목표였다.
태호는 벤치에서 신발 끈을 다시 묶었다. 한쪽 운동화를 신다가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보다 벽을 보는 표정이 더 아팠다. 대회 참가 확인서가 가방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재원이 가방을 건네자 태호는 종이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추천서 때문에 그래?”
“누가 말했어요?”
“네가 지난주에 물어봤잖아. 완등 몇 개면 쓸 수 있냐고.”
태호는 한동안 운동화 혀만 잡아당겼다. “아빠가 이번에도 결과 없으면 끝내래요. 선생님은 벽 하나 닫으면 다른 벽으로 옮기면 되죠. 저는 옮길 데가 없어요.”
재원은 괜찮아질 거라는 말을 삼켰다. 대표팀에서 빠진 날에도 누군가 그런 말을 했고, 그는 그 사람의 얼굴보다 문손잡이만 기억했다. 열어 줄 수 없는 문 앞에서 남의 등을 두드리는 일은 쉬웠다.
“오늘은 병원부터 가자. 추천서 조건은 내일 학교에 같이 물어보자.”
“못 나오면요?”
“그때 네 앞에서 모른 척하지 않을게.”
태호는 대답 대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신호음이 울리자 손등에 힘줄이 솟았다. 숙희는 남은 반찬통을 재원에게 맡기고 매트를 쓸러 갔다. 그녀의 빗자루 소리가 태호의 작은 목소리를 덮었다. 통화가 끝난 뒤 그는 한쪽 신발을 손에 든 채 나갔다. 문 밖에서 기다리던 아버지가 가방을 받아 들었다.
저녁 강습이 끝나고 오래된 회원 정민석이 매트를 들추었다. 벽 밑에서 떨어져 나온 와셔가 굴러 나왔다. 재원은 손전등을 비췄다. 민석은 그에게 와셔를 건네면서 입구의 월세 공문을 봤다고 했다.
“지난달 강습 줄인 것도 이거 때문이에요?”
재원은 공구함 뚜껑을 닫았다. “낮에 다른 체육관 세팅 일을 나가요.”
“그럼 우리한테는 왜 일정 조정이라고 했어요?”
매트 사이에 낀 분필 조각이 희게 부서졌다. 재원은 그것을 집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여기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걱정 안 하게 해 준 게 아니라, 고를 시간을 뺏은 거잖아요.”
민석은 화난 채로 매트를 도로 놓았다. 돈을 모아 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내일 남은 회원들과 이야기할 때 자신도 부르라고 했다. 재원은 그가 돌아선 뒤에도 공구함을 열지 못했다. 자신을 믿고 회비를 낸 사람들이 떠나는 장면만 생각하느라, 남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숙희의 물병이 벤치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잊은 물병을 찾으러 돌아와 조용한 벽을 올려다봤다. 재원은 초록 루트의 첫 동작을 보여 주려다 왼팔을 어깨 위로 올리지 못했다. 팔이 멎은 위치에서 숙희의 시선과 만났다.
“선생님도 오늘 안 되는 동작이 있어요?”
그는 팔을 내렸다. “네.”
숙희는 왜 다쳤느냐고 묻지 않았다. 물병을 가방에 넣고 노란 홀드 앞에 섰다. “그럼 말로 해 줘요. 저는 선생님이 다 올라가는 걸 보러 온 게 아니에요.”
재원은 벽을 오르지 않고 왼발 디딤을 가리켰다. 숙희가 발끝을 돌렸다. 낮에 놓쳤던 홀드에 손바닥이 닿았고, 그녀는 웃다가 스스로 내려왔다. 오늘의 두 홀드가 어제의 한 홀드보다 높다는 것을, 재원은 그제야 숫자 없이 보았다.
혼자 남자 그는 공과금 봉투와 보수 견적을 벤치에 펼쳤다. 금메달을 넣어 둔 서랍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몇 번이나 빛을 받아도 메달은 나사를 대신할 수 없었다. 재원은 회원 단체방에 내일 영업 전에 만나 달라고 썼다. ‘걱정하지 마세요’까지 입력한 뒤 그 문장만 지웠다.
전송 직후 임대인에게 문자가 왔다. 다음 주 수요일에 새 임차인을 데리고 체육관을 보겠다는 내용이었다. 석 달은 돈을 갚을 시한이었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겠다는 약속이 아니었다. 재원은 느슨한 빨간 홀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내일 회원들 앞에서 숨길 수 없는 것은 벽 한 조각보다 훨씬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