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층을 깨부수고 돌아왔다

4화: 10년 만의 걸음
붉은 경고등이 차가운 금속 벽면을 물들였다.
삐익, 삐익.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전자 경보음이 쉼 없이 터져 나왔다. 바닥에 쓰러진 채 파괴된 처리 유닛 7-119의 잔해에서는 매캐한 연기와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태현은 벽에 손바닥을 짓누르며 상체를 지탱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10년 동안 액체 속에 잠겨 있던 근육은 뼈에 달라붙은 젖은 가죽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무릎을 펴려 하자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며 꺾였다.
쿵.
태현의 상체가 다시 금속 벽에 부딪혔다.
“컥…….”
마른 기침과 함께 피 섞인 침이 입술 틈으로 흘러내렸다. 폐 속이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심장은 불규칙하게 요동치며 산소 부족을 호소했다.
그때 통로 저편에서 금속 다리가 바닥을 짓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채앵, 채애앵.
한 대가 아니었다. 붉은 조명 너머의 어둠 속에서 두 쌍의 붉은 렌즈가 번뜩였다.
“보관 자산 119번의 추가 이상 징후 확인.”
“물리적 격리 및 신경 파괴 프로토콜로 전환합니다.”
기계음이 통로를 울렸다.
새로 나타난 다족형 처리 유닛 두 대가 금속 관절을 펼치며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한 대는 고압 전류 침을 세웠고 다른 한 대는 두꺼운 진압용 집게를 벌렸다.
이대로 바닥을 기어 다녀서는 저 둘을 피할 수 없었다. 팔다리를 뜯기고 후두부에 파괴 침이 꽂히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일어서야 한다.’
태현은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튜토리얼 탑 100층의 권능을 끌어올렸다. 푸른 데이터 룬 문자가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신위(Godhood) 데이터 노드 전개]
[대상: 사용자 신경계 및 운동 전달망]
[경고: 생체 과부하 발생 위험]
현실의 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강제로 신호를 쑤셔 넣으면 된다. 가상세계에서 수천 번의 사선을 넘나들며 쌓았던 조작 감각을 자신의 육체 신경망에 덮어씌웠다.
지이잉!
태현의 척추를 타고 푸른 전류 같은 데이터가 쏟아져 들어갔다.
“크윽……!”
전신이 찢겨 나가는 극통이 덮쳐왔다.
잠들어 있던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강제로 불타오르는 감각이었다. 굳어 있던 허벅지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며 수축했고 무릎 관절이 삐걱거리며 펴졌다.
태현은 벽을 밀쳐냈다.
바닥을 딛는 순간 발바닥에서부터 뼈가 울리는 충격이 올라왔다.
비틀거렸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았다.
10년 만에, 강태현은 자신의 두 발로 현실의 대지 위에 우뚝 섰다.
푸른빛이 그의 두 눈동자 안쪽에서 거칠게 일렁였다.
“가축으로 죽을 생각은 없다.”
태현은 통로를 향해 첫 발을 내디뎠다.
첫 번째 걸음은 무거웠다. 발목이 꺾이려 할 때마다 뇌에서 강제로 보낸 전기 신호가 근육을 쥐어짜며 균형을 잡았다.
두 번째 걸음은 조금 더 빨랐다.
다가오던 처리 유닛들이 일제히 태현을 조준했다.
“비인가 기립 개체 확인. 고위험 상태로 재분류.”
“즉각 소각 절차를 집행합니다.”
앞장선 유닛이 바닥을 박차며 쇄도했다. 여섯 개의 금속 다리가 번개처럼 움직였고 고압 전류 침이 태현의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파지지직!
공기를 찢는 전격의 파열음.
태현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퇴화한 몸으로는 뒤로 물러서는 반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는 몸을 오른쪽으로 반 뼘 비틀며 앞으로 파고들었다.
침 끝이 얇은 환자복을 찢고 태현의 왼쪽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살갗이 타들어가며 살 냄새가 진동했지만 태현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좁혀진 거리 속에서 유닛의 등 뒤에 매립된 전력 공급선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오버라이드: 동력 출력 제어]
[전압 역류: 300% 강제 인가]
태현의 손끝에서 푸른 데이터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유닛의 동력 코어가 순간적으로 과전압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했다.
쾅!
내부 부품이 터져 나가며 유닛의 금속 다리들이 힘없이 꺾였다.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유닛의 몸체를 발판 삼아 태현은 그대로 몸을 던졌다.
두 번째 유닛이 진압용 집게를 휘두르며 덮쳐왔다.
태현은 바닥에 뒹굴며 벽면 하단의 금속 레일에 손을 뻗었다. 보관소 전체의 전력을 실어 나르는 주 배관이었다.
‘부서져라.’
그는 벽면 배관의 고정 래치 신호를 해제 명령으로 덮어썼다.
철컥!
벽에서 튕겨 나온 굵은 전력 케이블 뭉치가 쇠사슬처럼 튀어나와 덮쳐오던 두 번째 유닛의 다리를 휘감았다.
유닛의 균형이 무너지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태현은 숨을 헐떡이며 기어 올라가 유닛의 머리통 상단에 손바닥을 내리찍었다.
“정지.”
[유닛 7-120: 강제 회로 셧다운]
푸른 빛이 렌즈 속으로 뚫고 들어가자 붉게 타오르던 안광이 맥없이 꺼졌다.
보관소 통로에 다시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아…… 하아…….”
태현은 유닛의 잔해 위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강제 구동으로 인해 허벅지와 종아리 피부 아래에서 모세혈관이 터져 붉은 피멍이 번지고 있었다.
신위를 쓰는 순간마다 뇌세포가 깎여 나가는 것 같은 두통이 밀려왔다.
[경고: 영양액 고갈로 인한 생체 기능 급격 저하]
[남은 생체 유지 한계 시간: 약 15분]
시간이 없었다.
몸을 강제로 움직여 전투를 치른 대가로 몸속에 남아 있던 미량의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무언가를 보충하지 못하면 뇌사로 이어질 판이었다.
태현은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그는 피멍이 든 다리를 끌며 통로 끝의 거대한 철문 앞으로 걸어갔다.
철문 상단에는 선명한 붉은 글자가 박혀 있었다.
[7구역 중앙 관제실]
문 옆의 단말기 화면에는 보안 잠금 경고가 깜빡이고 있었다.
[경고: 구역 비상사태 선포로 인한 관제실 자동 봉쇄]
[접근 권한: 관리관 2등급 이상 필요]
태현은 단말기 아래의 인식 패널에 떨리는 손바닥을 얹었다.
그의 눈동자 속 룬 문자가 다시금 회전했다.
‘내 앞을 막아서지 마라.’
[신위: 보안 프로토콜 분석 중]
[암호화 알고리즘: 128비트 생체 양자 키]
[권한 덮어쓰기: 1순위 관리자 코드로 치환]
가상세계 100층에서 얻은 신위는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아카샤 시스템을 구성하는 모든 정보와 법칙을 지배하는 절대 권한이었다.
그리고 이 현실의 시설 역시 아카샤의 네트워크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다.
지지직!
단말기 화면의 붉은 경고창이 순식간에 깨지며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접근 권한 승인: 루트 오버라이드]
[7구역 관제실 격벽 개방]
치이익!
육중한 강철 격벽이 좌우로 갈라지며 내부의 차가운 냉각 가스가 쏟아져 나왔다.
태현은 안개 같은 냉기를 뚫고 관제실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넓었다. 중앙에는 수십 대의 모니터가 반원형으로 늘어선 대형 콘솔이 자리 잡고 있었고 벽면에는 각종 약품과 예비 부품이 든 캐비닛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태현은 곧장 중앙 콘솔로 다가갔다.
메인 화면에는 충격적인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었다.
[시설명: 유토피아 에너지 제7저장소]
[총 보관 자산: 144기]
[생체 가동률: 12%]
[금일 정제 바이오 에테르 생산량: 420L]
[전송 대상: 아카샤 중앙 코어]
태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유토피아 에너지…… 제7저장소?’
그들이 사람들을 가두어 두고 하던 짓의 실체가 눈앞에 드러났다.
인간의 뇌파와 정신력을 쥐어짜 ‘바이오 에테르’라는 연료로 변환하여 중앙 코어로 보내는 거대한 착취 시설.
그리고 화면 하단에서는 붉은색 경고창이 빠르게 깜빡이고 있었다.
[7구역 비상 정화 시퀀스 작동 중]
[대상: 101번~144번 전 캡슐]
[진행: 영양 공급 차단 및 신경 독소 주입 준비]
[남은 시간: 01분 30초]
관리 유닛들이 파괴되고 구역 통제가 흔들리자 시스템이 자산 전체를 안락사시켜 폐기하려 하고 있었다.
127번 캡슐에서 들려왔던 그 작은 두드림이 머릿속을 스쳤다.
태현은 지체 없이 콘솔 메인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타타타탁!
손가락 끝을 통해 신위의 데이터를 콘솔 내부 메인 프레임으로 직접 방출했다.
[정화 명령 취소]
[전체 캡슐: 최소 생체 유지 및 산소 응급 순환 모드로 강제 전환]
[권한 충돌 발생: 상위 관제 서버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내가 승인한다.”
태현의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푸른 파동이 콘솔 전체를 휩쓸었다.
쿠구구궁!
콘솔의 회로가 비명을 지르며 상위 서버의 락을 부숴버렸다.
[강제 명령 적용 완료]
[전체 캡슐 정화 시퀀스 중단]
[산소 및 기본 영양 공급 재개]
화면의 붉은 경고등이 일제히 녹색으로 바뀌었다.
멀리서 수면 캡슐들이 안정화되며 내는 낮은 기계음이 환풍구를 타고 들려왔다.
일단 사람들의 목숨은 붙들어 두었다.
태현은 숨을 헐떡이며 옆쪽의 비상 의료 캐비닛으로 몸을 돌렸다. 유리를 손바닥으로 깨부수고 안쪽에 보관된 은색 튜브들을 꺼냈다.
[고농축 바이오 생체 젤 - 응급 수급용]
태현은 튜브의 뚜껑을 뜯어내고 내용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점도 높은 젤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마자 뱃속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잦아들었다. 극도로 농축된 포도당과 전해질, 생체 활성 물질이 혈관을 타고 퍼져나갔다.
“후우…….”
손끝의 떨림이 서서히 멈췄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지만 당장 생명이 꺼져가는 위기는 넘겼다. 다리의 근육도 조금씩 본래의 감각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위이이잉!
관제실 중앙 메인 모니터 전체가 새빨갛게 물들며 거대한 경고 메시지가 화면을 뒤덮었다.
[경고: 7구역 관제망 외부 강탈 감지]
[사태 등급: 1등급 특수 오류 개체 출현]
[상위 관제망 ‘유토피아 중앙 통제 센터’로 사건 이첩]
[특수안전부 제3타격 수색대 비상 출동 명령 하달]
모니터에 뜬 글자를 바라보는 태현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올 테면 와라.”
태현은 콘솔에서 묵직한 비상용 합금 공구를 집어 들었다.
자신을 사육장에 가두었던 자들과의 진짜 전쟁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