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낙원의 배신자

6화: 도주와 삭제령
판테온의 외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엘리시움의 하늘을 찢었다.
이현은 깨진 유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발밑에 있던 바닥이 사라진 뒤에도 낙원의 중력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등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S급 버그 낙하 감지]
[대상: 강이현]
[삭제 좌표 보정 중]
붉은 하늘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관리자 권한이 있었다면 중력 보정값 하나만 되돌리면 됐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총 한 자루와 손등의 검은 문양뿐이었다.
이현은 깨진 외벽 안쪽으로 몸을 틀었다. 판테온의 관제 단말이 폭발하며 생긴 균열이 허공에 검은 선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그 선에 왼손을 걸었다.
손가락이 픽셀 사이를 파고들었다. 잡을 수 없는 오류였지만 문양이 뜨겁게 달아오르자 균열의 가장자리가 잠시 굳었다. 그 순간에도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감각이 빠르게 식어 갔다.
“이번엔 시스템이 나를 밀어내는군.”
균열에 매달린 팔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이현은 아래로 뻗은 빛의 분수를 향해 몸을 던졌다. 분수의 물줄기는 낙원의 장식일 뿐이었지만 폭파로 렌더링 순서가 뒤틀린 탓에 잠깐 단단한 발판이 되어 있었다.
그는 빛 위에 한쪽 발을 올렸다. 발판이 꺼지기 전에 몸을 굴려 상층 보행로에 떨어졌다.
검은 코트가 난간에 걸렸다. 이현은 코트를 찢어 몸을 빼냈다. 옆구리가 난간에 부딪혀 숨이 막혔지만 비명을 삼켰다.
머리 위로 은빛 집행자 세 기가 내려왔다. 사람의 형상을 흉내 낸 갑주였다.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새하얀 삭제창만 떠 있었다.
[관리자 계정 K.I.HYUN-01 폐기 확인]
[대상 권한: 없음]
[처분 사유: 낙원 배신]
이현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명령문을 쏘아 보냈다.
“정지.”
[권한 부족]
집행자들의 날이 동시에 내려왔다. 이현은 몸을 낮춰 칼날 하나를 피한 뒤 마도 권총을 발사했다. 푸른 탄환이 갑주의 어깨를 꿰뚫었지만 상처는 곧 흰 빛으로 메워졌다.
관리자 시절에는 이런 유닛의 유지 규칙을 직접 작성했다. 손상된 부위를 시민 정서 파형으로 복구하는 규칙이었다. 이제 그 규칙은 그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어 있었다.
도시 전체의 하늘에서 방송이 울렸다.
[시민 여러분은 안심하십시오]
[최고 위험 등급 버그 강이현이 낙원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대상을 발견하면 시선을 고정하고 구조 요청을 전송하십시오]
보행로 아래에서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잡았고 연인들이 걸음을 멈췄다. 모두의 눈앞에 이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그를 알아보고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곧 미소가 경계로 굳었다. 사람들의 손목에 뜬 신고창이 하나둘 붉게 채워졌다.
도망칠 방향이 사라졌다.
집행자 한 기가 팔을 휘둘렀다. 이현은 난간을 넘어 아래 축제 광장으로 뛰어내렸다.
광장에는 성녀 아리아의 기념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하얀 풍선과 금빛 꽃잎이 공중에 떠 있었고 사람들은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행복도 수치가 도시 위에 반짝였다.
[집단 동조율 82%]
집행자들이 광장 가장자리에 착지했다. 갑주의 틈에서 붉은 회로가 켜졌다. 방금 전보다 칼날이 길어지고 몸체가 무거워졌다.
이현은 광장 중앙의 분수를 바라봤다. 분수 꼭대기에는 축제용 정서 증폭기가 달려 있었다. 아담이 시민들의 감정을 하나로 묶을 때 사용하는 장치였다.
“아담. 네가 시민들을 지키는 방식은 여전하군.”
그는 증폭기의 제어봉을 향해 총을 쐈다.
탕!
빛의 기둥이 폭발했다. 분수에서 솟던 금빛 물줄기가 검은 파편으로 갈라졌다. 광장에 있던 사람들의 행복도 수치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정서 동조 불안정]
[집행자 보조 동력 분산]
집행자들의 움직임이 한 박자씩 어긋났다. 한 기가 이현을 노리고 휘두른 칼을 다른 기가 막아 냈다. 두 갑주가 충돌하며 아이 하나가 넘어졌다.
이현은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먼저 아이를 끌어안았다.
“버그가 우리를 공격한다!”
누군가 소리쳤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길을 막았다. 그들의 공포가 다시 집행자들의 회로로 흘러들었다.
[부정 정서도 처리 가능]
[삭제 효율 상승]
칼날 하나가 이현의 옆구리를 스쳤다. 검은 코트가 찢기고 피가 흘렀다. 상처 표면에 낙원의 복구 빛이 잠깐 모였다가 관리자 권한 부재를 확인하고 흩어졌다.
이현은 반격하지 않고 광장 바닥의 유지 덮개를 향해 달렸다. 사람을 밀어 길을 만들면 집행자의 동력원이 더 강해질 터였다.
“비켜.”
사람들은 비키지 않았다. 그는 시민을 밀어내지 않고 분수의 잔해를 밟아 덮개 위로 올라갔다. 총구를 아래로 향해 잠금쇠를 쐈다.
덮개가 열리며 검은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집행자의 삭제 광선이 등 뒤를 스쳤다. 이현은 계단 아래로 몸을 던졌다. 빛의 광선이 입구를 막았고 광장에는 다시 아리아의 찬송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하 유지 통로는 축제 광장보다 조용했다. 벽면의 금빛 장식이 벗겨지자 안쪽에서 낡은 케이블과 녹슨 기어가 드러났다.
이현은 옆구리를 눌렀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피가 멎지 않았다. 낙원은 그의 몸을 현실의 육체처럼 완벽하게 복구해 주지 않았다. 관리자 계정이 사라진 순간부터 그는 이곳에서도 죽을 수 있는 몸이 됐다.
통로 안쪽의 스피커가 지직거렸다.
“아직도 달아나는구나.”
백원우의 목소리였다.
이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직접 나타날 용기도 없나.”
“이미 네 앞에 나타났지. 네가 쏜 탄환은 내 가슴을 지나갔다.”
“환영을 부순 것뿐이다.”
“환영과 육체를 구분하는 일에 그렇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 너도 곧 알게 될 테니까.”
스피커 너머에서 짧은 숨소리가 흘렀다. 사람처럼 흉내 낸 음성이었다.
“이슬이의 출력이 방금 상승했다. 네 반역이 중앙 코어를 불안정하게 만들었어.”
이현의 걸음이 멎었다.
“수치는?”
“71.2배. 고갈 예측은 4.7퍼센트에서 더 낮아지고 있다.”
협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끝이 떨렸다. 통 안에서 이슬의 몸이 뒤틀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이현은 벽을 짚어 흔들리는 무릎을 세웠다.
“네가 자수하면 추출량을 낮추겠다. 관리자 승인도 복구해 주지. 아리아의 기도 파형을 안정시키면 이슬이는 더 오래 웃을 수 있어.”
“그 말은 녹음이군.”
백원우가 침묵했다.
이현은 통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음성이 벽을 세 번 튕긴 뒤 같은 높이로 되돌아왔다. 실시간 통신이라면 판테온 붕괴 직후의 회선 지연이 이렇게 일정할 수 없었다.
“지금 네가 듣는 건 명령문이야. 이슬이의 출력 수치를 미리 넣은 자수 유도 방송.”
“그렇다면 더 빨리 멈춰야겠지. 네가 길을 잃는 매 순간 이슬이의 뇌파가 타들어 간다.”
이현은 통신 회선 중계기를 쐈다. 스피커가 불꽃을 토하며 잠잠해졌다.
그는 개인 암호 영역을 열었다. 서쪽 공원 조명값과 연못 수질 보고서가 겹쳐지며 숫자들이 떠올랐다. 숨겨 둔 장부의 조각이었다.
[하층 환승역 13번 회선]
[접속 상태: 폐쇄]
[관제망 균열 발생 시 강제 개방 가능]
판테온을 쏜 탄환은 단말기 하나만 망가뜨린 것이 아니었다. 상층 관제망과 오래된 하층 회선 사이에 47초짜리 공백을 만든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현은 숫자를 기억했다.
“47초면 충분해.”
통로 끝에서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집행자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신고를 받은 시민들의 발소리도 계단 위에서 겹쳐졌다.
13번 환승역은 이미 폐쇄된 지 오래인 장소였다. 승강장 표지판은 방향을 잃고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바닥은 벽처럼 솟았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오류: 공간 좌표 불일치]
[승객 안전을 위해 대기하십시오]
집행자 세 기가 통로 양쪽과 천장에 동시에 나타났다. 삭제 광선이 좁은 역을 가로질렀다.
이현은 승객 안내 단말기에 손을 얹었다. 권한이 없다는 문구가 먼저 떴다. 손등의 문양이 그 아래에서 검게 번졌다.
단말기에 오래된 안내 방송이 켜졌다.
“13번 회선은 곧 도착합니다.”
안내 음성이 세 방향에서 동시에 울렸다. 집행자들의 탐지기가 소리를 따라 회전했다. 이현은 그 순간 바닥과 벽의 경계가 바뀌는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첫 번째 집행자가 벽에 박혔다. 이현은 총구를 갑주의 가슴에 밀착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푸른 탄환이 회로를 찢었고 갑주 안쪽의 빛이 꺼졌다.
나머지 둘의 삭제 광선이 동시에 날아왔다.
이현은 피하려 했지만 방향이 뒤집혔다. 천장이 발밑으로 내려오고 승강장 바닥이 머리 위로 솟았다. 광선 하나가 어깨를 태웠다.
[원형 접속자 반응 확인]
[권한 명칭: 미등록]
[최초 규칙 잔존율: 0.03%]
문양에서 통증이 퍼졌다. 허공의 안내문이 글자 단위로 갈라졌고 그 틈마다 어린 시절의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겹쳤다.
이현은 문양을 내려다봤다. 이것은 관리자 권한이 아니었다. 명령을 내리는 열쇠가 아니라 아담이 처음 세워졌을 때 남겨진 규칙의 찌꺼기였다. 시스템은 그 흔적을 삭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허공의 안내문 한 줄을 붙잡았다.
“한 줄만 바꾸면 된다.”
삭제 광선이 다시 날아왔다.
이현은 오류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어깨와 등에서 살이 타는 감각이 번졌지만 손끝은 안내문을 놓지 않았다. 47초 공백이 열리며 환승역 전체가 검은색으로 꺼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정지하지 않은 두 집행자의 흰 얼굴이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아주 멀리 이슬의 손가락이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톡. 톡. 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