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마수, 말로 합시다!

9화: 경호원은 칼보다 빠르다
관리국 차량이 강남 특무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신아린은 태블릿을 켰다.
"계약서를 쓰죠."
유진우는 무릎 위의 가방을 내려다봤다.
"전담 경호원이 되겠다는 분이 계약서부터 내미십니까?"
"당신은 돈부터 확인하는 사람 아닙니까?"
"신뢰와 돈은 별개입니다. 신뢰는 공짜지만 경호는 유료니까요."
태블릿 화면에는 ‘유진우 마수 전문 통역 사무소 전담 경호 계약’이라는 제목이 떠 있었다.
"기간은 일 년. 현장 동행은 의뢰가 있는 날로 한정합니다. 사무실 감시는 업무에서 제외하고요."
"현장에서는 제 판단이 우선입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통역 중에 제가 듣기도 전에 칼이 나가면 계약 위반입니다."
신아린의 손가락이 멈췄다.
"마수가 공격 태세를 취하면요?"
"제가 철수하라고 말할 때까지 검을 뽑지 않는 조항을 넣으시죠. 대신 제가 위험을 오판하면 당신이 강제로 데리고 나가도 됩니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신아린은 조항을 수정했다.
‘통역 개시 후 선제 공격 금지. 단 통역사의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발생할 경우 경호원은 최우선 방어권을 갖는다.’
"위험 수당은 월 삼백만 원입니다. 현장 수당은 별도입니다."
"S급 경호원이 월 삼백만 원이면 관리국 시절 월급 아닙니까?"
"당신 사무소가 아직 작다는 점을 고려했습니다. 화염 늑대 사건의 성공 보수는 특무실 최고액으로 정산됐고요."
진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통장 잔액이 늘어나는 소리는 언제나 훌륭한 설득이었다.
"계약 기간에는 제 의뢰를 다른 경호팀과 중복 수행하지 않는 조항도 넣죠."
"당신이 다른 S급 경호팀을 구할 수 있습니까?"
"없으니까 독점 조항을 넣는 겁니다."
신아린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때 차량의 통신기가 끼어들었다.
"현장 삼 분 전입니다. 서울 3호선 연장 공사장 지하 28미터에서 진동 재발. 현장 업체가 발파 준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진우의 표정이 굳었다.
"발파를 준비한다고요?"
신아린이 즉시 통신기를 잡았다.
"모든 폭약 설치를 중지시키세요. 제 명령입니다."
"현장 책임자가 공사 손실을 이유로 거부 중입니다."
"그럼 손실 계산서에 사망자 수까지 적으라고 하세요."
차량이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지면 아래에서 둔중한 진동이 올라오며 천장등이 흔들렸다.
쿵.
진우의 귀에는 금속이 찢기는 듯한 마수의 신음이 들렸다.
[내 천장을 또 때렸다!]
그는 태블릿에 서명했다.
"계약 성립입니다. 이제부터 신 팀장님은 제 경호원입니다."
신아린도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당신은 제 보호 대상입니다."
차량이 공사장 임시 차단선 앞에서 멈췄다.
공사장 안은 흙먼지와 경고음으로 가득했다. 굴착기 세 대가 멈춰 있었지만 한쪽에서는 발파용 장약을 옮기는 인부들이 보였다.
"누가 작업을 계속하라고 했습니까?"
신아린이 들어서자 형광 조끼를 입은 남자가 달려왔다.
"시공 책임자 오세만입니다. 마수 출현 추정만으로 공사를 멈추면 하루 손실이 수억입니다. 저 아래 것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습니다."
"모습을 드러내면 멈추시겠습니까?"
"그때는 헌터들이 처리하면 됩니다."
진우는 바닥에 손을 댔다. 굴착기 엔진의 규칙적인 떨림 사이로 불규칙한 파동이 세 번 섞였다.
쿵. 쿵쿵.
"저건 이동 진동이 아닙니다. 아래에서 벽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현장 헌터 한 명이 창을 들고 비웃었다.
"소리만 듣고 마수 종류까지 압니까?"
진우는 벽에 걸린 도면을 낚아챘다. 새 터널의 굴착선 아래로 오래된 배수로가 지나가고 있었다.
"굴착선이 옛 수로를 가로막았습니다. 물길이 막히면서 아래쪽 압력이 올라갔고 마수가 집 안에 갇힌 겁니다."
오세만의 얼굴이 굳었다.
"그 도면은 검토했습니다. 빈 수로입니다."
"빈 수로라면 왜 안쪽에서 규칙적인 진동이 올라옵니까?"
진우는 특수 확성기를 꺼내 지하로 향했다.
"여기 위의 인간들이 듣고 있다. 누구냐. 왜 땅을 울리느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곧 공사장 바닥이 솟구쳤다.
쿠구구구궁!
흙더미가 갈라지고 굵은 돌비늘을 두른 머리가 솟아났다. 길이 12미터는 되어 보이는 토룡이 터널 입구를 가로막았다. 이마에는 깨진 콘크리트가 박혀 있었고 입가에는 피 섞인 흙이 묻어 있었다.
헌터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크아아아아아!
[내 새끼들이 깔렸다! 인간들이 천장을 부쉈다! 전부 땅속에 묻어 버리겠다!]
"무기 내려!"
진우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울렸다.
오세만이 소리쳤다.
"저 마수가 공격을 선언했습니다!"
"공격 선언이 아니라 구조 요청입니다. 안쪽에 새끼들이 있습니다."
토룡의 앞발이 바닥을 찍었다. 신아린이 검집을 뽑아 검기를 흘리자 푸른 결계가 솟아 인부들을 감쌌다.
"진우 씨. 세 번까지입니다. 그 안에 답을 얻으세요."
"충분합니다."
진우는 토룡에게 물었다.
"새끼들이 살아 있느냐."
[둘은 살아 있다. 하나는 뒷발이 돌에 끼었고 하나는 물이 차오르는 구멍에 매달렸다. 너희 쇳덩이가 수로를 막았다.]
진우는 도면을 오세만에게 들이밀었다.
"배수 펌프를 내려야 합니다."
"터널에 사람이 들어가면 붕괴 위험이 큽니다."
"폭약을 터뜨리면 새끼도 사람도 같이 죽습니다."
신아린이 장약을 옮기는 인부들을 바라봤다.
"지금 당장 치우세요. 배수 펌프와 지지대를 가져오십시오."
"손실이 나면 책임지실 겁니까?"
"사람이 죽으면 손실 계산서가 아니라 형사 기록을 쓰게 됩니다."
인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룡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인간은 늘 늦는다.]
"늦었지만 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이 길을 알려 주세요. 이름이 있습니까?"
[굴각.]
"굴각. 새끼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굴각은 거대한 머리로 무너진 터널을 가리켰다. 그때 지하 깊은 곳에서 더 큰 진동이 터졌다.
쿵…….
[저 아래의 벽이 또 운다.]
진우의 관자놀이가 바늘로 찔린 듯 아파졌다.
지하 터널 안은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았다. 신아린이 앞에서 검기로 천장을 받치고 진우가 굴각의 진동을 따라갔다.
"왼쪽입니까?"
굴각이 앞발로 두 번 땅을 긁었다.
[왼쪽은 물. 오른쪽은 돌. 가운데로 가면 내 새끼 냄새가 난다.]
"가운데로 갑니다. 지지대 세 개만 더 세워 주세요."
신아린은 갈라진 천장을 얇은 검기로 붙잡았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이런 일을 계속하면 체력 수당도 넣어야겠네요."
"경호원의 업무 범위에는 구조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럼 오늘은 특별 수당입니다."
굴각이 갑자기 몸을 틀었다. 돌무더기에서 가느다란 울음이 새어 나왔다.
[아기들이 있다. 내가 파겠다.]
"위쪽 돌은 건드리면 무너집니다. 오른쪽부터 파세요."
[인간이 내 굴을 가르치느냐!]
"당신 굴이 무너지면 새끼가 다칩니다. 화낼 시간에 오른쪽 흙부터 미세요."
굴각은 진우가 가리킨 흙벽을 밀었다.
콰직!
흙벽이 무너지며 좁은 틈이 열렸다. 안쪽에서 작은 토룡 두 마리가 끼익거렸다. 한 마리는 뒷발이 돌에 눌렸고 다른 한 마리는 허리까지 찬 물에 떠 있었다.
신아린이 몸을 낮췄다.
"제가 작은 아이를 꺼내겠습니다."
그녀는 검기를 칼날이 아니라 실처럼 가늘게 뽑아 돌 틈을 벌렸다. 진우는 굴각에게 외쳤다.
"돌을 세 손가락만큼만 들어. 더 들면 천장이 내려앉아."
[내 힘을 믿지 못하느냐.]
"당신 힘을 믿으니까 정확히 하라는 겁니다."
굴각의 발톱이 돌을 들어 올렸다. 신아린이 그 아래로 손을 넣어 새끼의 다리를 빼냈다.
작은 토룡이 굴각의 배 쪽으로 기어갔다. 굴각은 혀로 새끼의 이마에 묻은 흙을 핥았다.
[살았다.]
뒤쪽에서 물이 터졌다. 막힌 수로의 압력이 지지대를 밀어냈다.
"신 팀장님!"
신아린이 검기를 넓혔다. 푸른 벽이 물살을 막았지만 균열이 빠르게 번졌다.
"진우 씨 먼저 나가십시오."
"굴각에게 수로를 열게 해야 합니다. 왼쪽 아래만 세 번 치라고 하세요."
진우는 굴각에게 소리쳤다.
"왼쪽 벽을 깨면 물이 빠집니다. 위쪽을 치면 모두 묻혀요. 왼쪽 아래만 세 번!"
굴각은 새끼들을 몸으로 감싸고 앞발을 들었다. 첫 번째 타격에 벽이 갈라졌다. 두 번째에 오래된 배수로가 드러났다. 세 번째 타격과 함께 물이 수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터널의 압력이 잦아들었다.
신아린이 검기를 거두며 무릎을 세웠다.
"세 번 맞았습니다."
"정확했죠."
"당신이 아니라 굴각이요."
진우는 웃으려 했지만 관자놀이의 통증은 더 심해졌다. 먼 지하의 진동은 아직 끊기지 않았다.
굴각도 그 방향으로 머리를 들었다.
[저 아래에 낯선 벽이 있다. 오래전부터 잠들어 있던 벽이다. 오늘 인간들의 쇳소리가 그 벽까지 깨웠다.]
진우의 눈앞에 푸른 자막이 겹쳐졌다.
[경고: 비정상적인 마력 공명 감지]
지상으로 올라오자 공사장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 발파 장약은 차단선 밖으로 옮겨졌고 배수 펌프가 옛 수로의 물을 빼고 있었다.
오세만은 젖은 도면을 들고 서 있었다.
"임시 통로를 확보하고 이 구간 공사를 중단하겠습니다. 마수 둥지는 보존 구역으로 표시하죠."
"임시가 아니라 굴각과 정식 협의해야 합니다."
진우는 확성기를 굴각에게 향했다.
"지상 인간들이 공사를 멈추고 새끼가 다닐 통로를 만들겠답니다. 대신 당신도 공사장 밖으로 나와 사람을 공격하지 마십시오."
굴각은 흙더미 위에 앞발을 올렸다.
[내 새끼들이 안전하고 물길을 돌려준다면 한 계절 동안 이곳을 지키겠다.]
"한 계절 동안 비공격 및 공사 감시 협약을 받아들인답니다."
신아린이 단말기로 현장을 기록했다.
"관리국 입회하에 협약서를 작성하겠습니다. 진우 씨가 통역하고 제가 증인으로 서명하죠."
굴각이 진우에게 다가왔다.
[작은 혀. 네가 내 굴을 살렸다.]
[보수?]
"인간들 사이에서는 도움에 대한 답례가 필요합니다."
굴각이 땅속으로 앞발을 집어넣자 누런 결정 하나가 진우의 손바닥 위로 굴러 나왔다. 오래된 지하수처럼 맑은 빛이 안에서 일렁였다.
신아린이 숨을 삼켰다.
"토룡의 지맥석입니다. 터널과 수로의 마력을 저장하는 희귀 결정이에요."
진우는 결정을 들어 올렸다.
"수수료로 잘 받으마. 다만 다음부터는 집이 무너지기 전에 먼저 신고하세요."
[인간의 신고라는 건 무엇이냐.]
"크게 소리치기 전에 작은 소리로 알려 주는 겁니다."
[그건 어렵다. 나는 작은 소리를 잘 못 낸다.]
진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지하 깊은 곳에서 또 한 번 진동이 올라왔다.
쿵…….
이번에는 굴각의 포효가 아니었다. 진우의 귀에만 낮은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드디어…… 내 말을 들을 자가 나타났구나.]
진우의 손안에서 지맥석이 차갑게 식었다. 신아린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슨 소리입니까?"
진우는 지하 1,000미터 방향을 바라봤다. 굴각은 몸을 웅크린 채 그곳을 향해 떨고 있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는 특수 확성기를 가방에 넣었다.
"하지만 다음 협상은 꽤 비쌀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