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수의 재도전

1화: 패배한 열아홉 수
백서준은 대국 종료 시각을 적은 뒤에도 돌을 치우지 못했다. 마지막 수순이 바둑판 위에 남아 있었다. 흑돌은 좌상귀에 무리하게 들어가 있었고, 백은 중앙에서 두 집을 더 만들었다. 흑의 19번째 수가 지나간 뒤부터 서준은 손을 빨리 움직였다. 제한시간이 끝나고 초읽기에 들어가자, 그의 계산은 더 짧아졌다.
“복기할 거야?” 조영재가 물었다.
“지금은요.”
“그 말 지난번에도 했어.”
서준은 바둑돌을 주머니에 쓸어 담았다. 입단대회 본선에서 두 번째로 탈락한 뒤, 그는 대국 기록을 열어 보지 않았다. 결과표에는 1승 3패가 적혀 있었다. 19수에서 좌상귀를 지키려다 중앙을 내준 게 문제였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생활비가 필요해 영재가 운영하는 동네 청소년 기원에서 저녁 수업 보조를 시작했다. 매주 세 번 아이들의 대국 기록을 정리하고, 복기를 도왔다. 영재는 서준에게 정답을 바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이들이 왜 그 수를 두었는지 먼저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가르칠 준비가 안 됐어요.”
“대회 준비와 가르치는 건 다른 일이야. 네가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면 돼.”
영재는 서준에게 시간당 보조비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금액은 많지 않았지만, 입단 공부 시간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됐다. 서준은 제안을 받아들이고도 대국 기록을 보여 주지 않았다.
기원에는 청소년 선수 이시아가 먼저 와 있었다. 열여섯 살인 시아는 지역 대회에서 몇 차례 우승했고, 공격적인 수읽기로 유명했다. 그녀는 서준이 새 보조 교사라는 말을 듣고 대국 기록을 꺼냈다.
“이 판 한 번 봐 주세요. 제가 47수에 끊었는데, 원장님은 너무 빨랐다고 했어요.”
“그때 네가 본 건 뭐였어?” 서준이 물었다.
시아는 상대의 약한 돌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판에는 상변의 백돌 무리가 약했고, 끊는 수가 성공하면 큰 이득이었다. 그러나 흑의 연결이 끊기면서 반대쪽 돌도 위험해졌다. 서준은 그녀에게 어느 쪽을 살리고 싶었는지 다시 물었다. 시아는 상변을 잡고 싶었다고 말했다.
“잡았어?”
“못 잡았어요.”
“그럼 목표를 정한 수가 아니라, 가능성을 정한 수였네.”
시아는 서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목표가 분명한 수였고, 상대가 잘 대응했다고 답했다. 서준은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복기는 결과를 보고 수를 틀렸다고 선언하는 자리가 아니라, 당시 선택한 이유와 다른 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선생님은 입단했어요?” 시아가 물었다.
“아직.”
“그럼 선생님도 입단 준비 중이에요?”
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영재가 수업 시작을 알리며 아이들을 불렀다. 시아는 돌을 주머니에 담고, 서준에게 다음 대국도 봐 달라고 했다.
수업 첫 시간은 아홉 살 신우와 열 살 민정이의 대국이었다. 신우는 초반에 바깥을 넓게 잡았고, 민정이는 귀의 실리를 챙겼다. 중반에 신우는 상대 돌의 눈 모양을 공격하려다가 자기 돌을 끊길 위험에 빠뜨렸다. 서준은 바로 손을 뻗어 돌을 놓으려다가 멈췄다.
“신우야, 이 수를 두면 다음에 상대가 어디를 둘 것 같아?”
신우는 3선에 끊는 수를 가리켰다. 그 수가 오면 자기 돌이 두 무리로 갈라진다고 했다. 그런데도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상대가 더 커질 것 같다고 했다. 서준은 큰 쪽을 줄이는 수와 상대를 잡으려는 수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물었다. 신우는 한참 생각하다가 돌을 내려놓았다.
“저쪽을 잡으려고 하면 우리 돌이 먼저 위험해져요.”
“그걸 봤으면 다음 수를 골라 봐.”
신우는 공격을 멈추고 자기 돌을 연결했다. 그는 돌을 살렸지만, 상대에게 중앙을 내줬다. 대국은 민정이의 승리로 끝났다. 신우는 자기 돌을 지키느라 진 것 같다고 말했다. 서준은 판 전체에서 아직 계산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답했다. 승패를 곧바로 수읽기의 성공 여부와 같게 보지 않았다.
복기에서 신우는 31수부터 다시 놓았다. 그때 중앙으로 뻗었다면 자기 돌을 살리면서 상대 집도 줄일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 상대한테 더 큰 집을 주고 싶지 않아 급하게 공격했다고 말했다. 서준은 그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대국에서 19수에 왜 그랬는지 묻는다면, 그는 아직 대답하지 못했다.
수업이 끝난 뒤 영재는 서준에게 기원 대국 기록을 정리해 달라고 했다. 아이들 각자 승패와 대국 시간, 초읽기 횟수를 적어야 했다. 서준은 신우가 마지막 10분 동안 수를 급하게 둔 사실을 봤다. 다만 그걸 산만함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기록표에는 초읽기 진입 시각과 마지막 착수 간격을 입력했다. 다음 수업에서 시간 관리 방법을 함께 살펴볼 수 있었다.
시아는 기원 문을 나서기 전에 서준에게 자신의 대국 기록을 남겨 두겠다고 했다. 그녀는 47수의 공격이 실패했어도 다른 선택보다 나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서준은 다음 주에 판을 다시 놓자고 했다. 시아는 그때는 대회 출전 자격 문제도 함께 봐 달라고 했다. 전학을 앞두고 있어서 등록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바둑 때문에 전학 가는 건 아니에요. 부모님 직장 때문이에요. 그래도 대회 등록이 막힐 수 있어요.”
“규정은 원장님하고 확인해. 내가 출전 자격을 판단할 수는 없어.”
시아는 알고 있다고 했지만, 서준이 자기 판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어서 물어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서준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입단을 못 했다고 해서 바둑을 모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문을 잠그기 전에 신우가 뛰어 돌아왔다. 책상에 두고 간 돌주머니를 찾으러 온 아이는 기록표를 보더니 조그맣게 물었다.
“아빠한테 오늘도 졌다고 말해요?”
서준은 승패 칸에 그어진 표시를 보았다. 신우가 마지막에 시계를 노려보던 표정이 떠올랐다. 남은 시간이 무서웠던 게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시간이 무서웠을 수도 있었다. 그는 기록표를 뒤집어 복기에서 신우가 찾아낸 연결을 그렸다.
“이 수를 네가 찾았다고도 말할 거야.”
아이는 종이를 접지 않고 돌주머니 위에 얹었다. 서준은 다음 수업 날짜를 써 주다가, 자기 패배를 설명할 때도 단 한 수의 오답만 내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밤 열 시가 가까워지자 기원에는 영재와 서준만 남았다. 영재는 서준의 대국 기록 파일을 열어 두었다. 서준은 파일을 닫으려 했지만, 영재는 오늘 복기하지 않으면 또 한 달이 지나갈 거라고 말했다. 서준은 지난 입단대회의 첫 판 기록을 열었다. 19수는 좌상귀에 침투한 흑의 수였다.
서준은 당시 좌상귀에 파고든 이유를 기억했다. 상대가 상변을 넓히는 것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우상귀의 백돌에 눌린 자기 흑돌은 이미 약했다. 그는 그 약점을 알고도 외면했다. 판을 다시 놓자 19수 뒤 상대가 끊었고, 서준은 두 무리를 동시에 살리려다 중앙을 잃었다.
“그때는 어디가 더 아팠어?” 영재가 물었다.
“좌상귀를 빼앗기는 게요. 내가 먼저 실수한 걸 인정하기 싫었어요.”
서준은 그 말을 하고 나서 돌을 만지작거렸다. 영재는 한 수를 잘못 둔 게 입단 실패 전체를 설명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서준은 그 판 뒤로 비슷한 상황을 만날 때마다 손을 빨리 움직였다. 다음 대국에서도 실패할까 봐 오래 고민하는 대신, 빨리 결정을 내리고 끝내려 했다.
영재는 대국을 멈추고 서준이 각 수를 몇 분 동안 생각했는지 기록해 보라고 했다. 18수까지 서준은 대부분 5분 안에 뒀지만, 19수 앞에서는 초읽기 전 11분을 썼다. 긴 고민 끝에 둔 수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서준을 화나게 했다. 그는 오래 생각했는데도 틀렸다면, 계산력이 부족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생각한 시간이 길다고 계산한 내용이 많다는 뜻은 아니야. 네가 같은 변화를 반복해서 본 걸 수도 있어.”
“그럼 제대로 봤는지 어떻게 알아요?”
“다른 수를 놓고 상대가 뭘 할지 써 봐. 네가 실제로 둔 수와 비교하면 돼.”
서준은 좌상귀에 들어갔던 흑돌을 거두고, 우상귀의 약한 흑돌을 연결하는 수를 놓았다. 백이 상변을 넓히는 응수를 놓자, 상대 집은 늘었지만 흑은 두 무리를 동시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으로 하변에 자리를 잡는 수를 보았다. 그쪽은 커질 여지가 있었지만, 백이 우상귀를 압박하면 먼저 달아나야 했다. 그는 어느 쪽이 더 좋은지 결정하지 않고, 후보 수와 응수를 노트에 각각 적었다.
영재는 대국 중에는 그만큼의 시간이 없다고 했다. 서준은 초읽기에 들어가기 전 후보를 두 개로 줄이는 연습을 해야 했다. 패배를 다시 보는 것은 실수 찾기만이 아니라, 같은 상황에서 시간을 어떻게 쓸지 준비하는 일이었다.
서준이 세 번째 후보를 찾으려 하자 돌이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졌다. 영재는 떨어진 돌을 주워 돌통에 넣었다. 시계가 없는데도 서준의 숨은 빨랐다. 그는 무릎 위에 빈손을 놓고 노트의 두 갈래를 다시 읽었다. 오늘은 이긴 판을 만들어 돌려받으려는 게 아니라, 패배한 날 보지 못했던 선택을 남기려는 것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영재가 말했다.
서준은 판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는 다음날 이어서 복기하기로 했다. 시아의 대국도 봐야 했고, 신우의 초읽기 시간도 정리해야 했다.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지만 자기 판을 덮지 않아도 되는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퇴근 뒤 집에 도착하자 입단대회 일정 안내 문자가 왔다. 다음 대회 접수는 두 달 뒤에 시작할 예정이었다. 서준은 아직 참가할지 결정하지 않았다. 그는 19수 뒤의 모든 착수를 다시 볼 용기가 있는지 먼저 알아야 했다. 기원 가방에서 대국 노트를 꺼내 책상에 펼쳤다. 페이지 끝에는 그가 적어 둔 한 줄이 있었다. ‘초읽기 전에 판을 접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