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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의 골동품 거래상9화

뒷골목의 골동품 거래상

뒷골목의 골동품 거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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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50억의 우회로

오전 5시 49분.

섀도 엔틱 지하 감정실의 모니터에는 네 개의 분할 흑백 화면이 차가운 노이즈를 내뿜으며 깜빡이고 있었다.

사거리 모퉁이 쪽 화면에서는 신유경이 탄 광수대 감시 승합차가 골목길을 천천히 돌아 나오고 있었다. 가짜 사파이어 반지를 넣은 민속품 수거 상자를 쫓아간 탓에 경찰의 시선은 잠시 섀도 엔틱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태오는 그 틈이 기껏해야 십여 분에 불과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맞은편 화면에서는 흰색 소형 화물차가 낡은 지하 차도 입구의 거친 콘크리트 기둥 옆에 비상등을 끈 채 웅크리고 있었다.

태오는 작업대 위의 광학 렌즈 컨트롤러를 돌려 화물차 적재함 틈새를 정밀하게 확대했다.

차량의 왼쪽 후미등은 붉은 플라스틱 커버가 깨져 있었다. 틈새로 비치는 적재함 내부에는 흔한 화물 상자가 아닌 검은색 무선 릴레이 송수신기가 육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상단에는 세 가닥의 고주파 동축 케이블이 차체 루프 안테나로 뻗어 있었고 그 옆에 놓인 은색 두랄루민 보관함 표면에는 붉은빛이 도는 합금 봉인재 조각이 굳어 있었다.

오복자가 새벽에 확인해 준 바로 그 납과 주석의 특수 합금 봉인이었다.

“H-09.”

태오는 낮게 읊조렸다.

H-09는 고정된 지하 금고의 방 번호가 아니었다. 이동 중인 특수 차량 내부에서 정해진 시간에만 전원이 들어오는 다중 서명 보안 모듈의 식별 코드였다.

낡은 지하 차도는 과거 네오 서울의 구형 광케이블망과 슬럼가의 폐쇄 유선 선로가 얽혀 있는 지하 차폐 지대였다. 지상의 광역 전파 감청망이 닿지 않고 일반 기지국에서도 신호가 여러 갈래로 분산되는 완벽한 음영 구역이었다.

그곳에서 오전 6시 10분, 50억 규모의 비자금 트랜잭션이 국외로 전송될 예정이었다.

태오는 감정 작업대 한구석에 놓인 구형 해외 송금용 단말의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초록색 모노크롬 액정 화면에 거친 도트 글자가 떠올랐다. 정식 감정원에서 일하던 시절, 해외 경매소와 고미술품 신탁 펀드를 연결할 때 사용하던 비공식 다중 서명 단말기였다. 표면은 긁히고 낡아 있었지만 내부의 고보안 암호화 칩셋은 여전히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진짜 사파이어 반지를 꺼냈다.

자외선등의 푸른 광선 아래에서 일곱 개의 정밀 절삭면이 각기 다른 각도로 날카로운 빛을 튕겨냈다.

태오는 디지털 마이크로미터를 들어 반지의 첫 번째 면부터 다섯 번째 면까지의 홈 깊이와 각도를 순서대로 측정했다. 그리고 투명 필름에 옮겨 두었던 수치를 단말기 키패드에 차례로 입력했다.

3-1-5-2-4

첫 다섯 숫자는 단순한 계좌 번호가 아니었다. 50억 원을 다섯 개로 쪼개어 해외 가상자산 계정으로 순차 분산 전송하는 분할 노드의 호출 순서였다.

그렇다면 일곱 번째 면에 새겨진 미세한 흠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태오는 현미경의 배율을 80배로 올렸다. 검은 점 두 개 사이에 예리하게 그어진 선은 B-17 전표에 찍혀 있던 9-B의 곡선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것은 단순한 통과 식별자가 아니었다. 다섯 개의 분할 경로 중 특정 노드의 송금 패킷을 강제로 우회시키는 임시 라우팅 오버라이드 코드였다.

“10억, 10억, 10억, 5억, 15억.”

태오는 채권의 압인 배열과 양피지의 분할 구조를 조합해 금액의 가중치를 계산했다.

앞선 네 개의 노드는 자금을 잘게 쪼개어 추적을 교란하는 분산 통로였다. 진짜 핵심은 마지막 5번 승인 노드인 4번 경로였다. 해외 페이퍼컴퍼니의 최종 집결 계좌로 15억 원이 한 번에 흘러 들어가는 분기점이었다.

50억 전체를 건드리면 중앙 통제 시스템이 침입을 감지하고 즉시 롤백을 실행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노드의 승인 해시만 9-B 코드로 비틀어 자신의 그림자 지갑으로 떨어뜨린다면, 송금자는 거래가 정상 완료된 것으로 착각하고 몇 분 뒤에야 자금 증발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 몇 분의 시간차가 태오에게는 생존의 여유였다.

오전 6시 3분.

지하 차도 주변의 공기가 서서히 굳어졌다.

화물차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짙은 감색 방한 점퍼를 입은 사내 둘이 조용히 내려섰다. 그들의 귀에는 얇은 튜브형 무전 리시버가 꽂혀 있었고 허리춤에는 은밀하게 권총집의 묵직한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사내들은 지하 차도 입구와 출구를 각각 등지고 서서 주변 골목의 동태를 살폈다.

태오는 모니터를 주시하며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단말 화면의 녹색 커서가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TARGET NODE: 4 / ROUTING: 9-B OVERRIDE

그는 사파이어 반지의 일곱 번째 면에서 읽어낸 절삭 각도와 붉은 봉인재에 묻어 있던 합금 성분의 전기 저항값을 암호화 키로 주입했다.

단말기 하단에 붉은색 대기 문구가 점멸했다.

STANDBY FOR 06:10:00 UTC+9

초침 소리가 감정실의 적막을 차갑게 쪼갰다.

오전 6시 8분.

화물차 지붕의 안테나 끝에서 미세한 푸른색 LED가 빠른 속도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한빛 재단 보존실과 연결된 암호화 위성 채널이 개방된 신호였다.

동시에 사거리 모퉁이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게 번쩍였다.

신유경의 경찰 승합차였다. 미끼 상자가 가짜임을 확인한 신유경이 날카로운 코너링으로 사거리를 향해 회차하고 있었다.

“시간이 빠듯하군.”

태오는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경찰이 사거리에 도착해 화물차를 불심검문하면 송금망 자체가 즉시 폐쇄된다. 반대로 화물차가 먼저 송금을 끝내고 빠져나가면 자금은 영영 국외로 증발한다.

단 몇 초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외줄 타기였다.

오전 6시 9분 50초.

51초, 52초, 53초.

화물차 적재함 내부의 릴레이 단말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 통신음이 새어 나왔다.

6시 10분 정각.

TRANSACTION INITIATED.

단말 화면에 녹색 로그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첫 번째 10억이 3번 노드를 통해 빠져나갔다.

두 번째 10억이 1번 노드를 관통했다.

세 번째 10억이 5번 노드를 거쳐 스위스 익명 중계소로 이동했다.

네 번째 5억이 2번 노드를 통과했다.

그리고 마지막 15억이 적재함의 H-09 보안 모듈을 거쳐 4번 최종 노드로 진입하는 순간.

태오는 단말의 엔터 키를 주저 없이 내리쳤다.

EXECUTE 9-B ROUTE.

화면이 0.5초간 멈칫했다.

사파이어 반지의 절삭 암호와 붉은 봉인재의 고유 키가 지하 차도의 중계 프로토콜을 파고들었다.

4번 노드로 향하던 15억 원 상당의 해외 다중 서명 가상자산 패킷이 허공에서 궤도를 급격히 틀었다. 9-B의 우회 통로를 타고 강태오가 3년 전 스위스 비밀 계좌에 동결해 두었던 옛 무기명 지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OVERRIDE SUCCESSFUL.

RECEIVED: 1,500,000,000 KRW EQUIVALENT (MULTI-SIG HASH: #7F-9B-04E1)

CONFIRMATION BLOCK MINTED.

성공이었다.

단말 화면 구석에 거래 확인 해시와 함께 자금의 원천 소유주를 가리키는 숨겨진 식별자가 찰나의 순간 노출되었다.

HANBIT-C-03 / SPONSORED BY: KIM_ASSET_TRUST

김 의원의 비자금 관리 트러스트였다.

그와 동시에 지하 차도에 서 있던 흰색 화물차 내부에서 날카로운 오류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적재함 문이 거칠게 열리고 노트북을 든 기술자가 뛰쳐나왔다.

“어디로 튄 거야! 4번 블록이 안 닫혀!”

경계 중이던 사내들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오전 6시 14분.

사거리 모퉁이로 신유경의 경찰 승합차가 급제동하며 멈춰 섰다.

이어 반대편 큰길에서는 짙은 선팅을 한 검은색 세단 세 대가 굉음을 울리며 사거리로 진입했다. 김 의원 측의 본대 회수조 차량이었다.

자금의 이상 증발을 감지한 카르텔의 무장 인력과 섀도 엔틱의 냄새를 맡고 돌아온 경찰이 사거리 한가운데서 정면으로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태오는 송금 단말의 전원 플러그와 통신 케이블을 즉시 뽑아냈다.

화면의 로그는 자동으로 소거되었고 최종 15억의 수령 증명 해시와 원장 데이터만이 새끼손톱만 한 외장 암호화 칩 안으로 압축 저장되었다.

그는 칩을 꺼내 섀도 엔틱 이중 방화벽 내부의 비밀 수납공간에 밀어 넣었다.

작업대 위의 낡은 유선 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태오는 수화기를 들었다.

“강 감정사.”

낮고 거친 음성. 백사장의 직속 연락책 추 실장이었다.

“동부 보세구역 쪽에서 이상한 신호가 잡혔어. 재단 놈들 자금 라인 하나가 통째로 꼬였다는데 자네 가게 쪽은 조용한가?”

“사거리가 꽤 소란스럽습니다.”

태오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재단 놈들이 눈이 뒤집혀서 움직이고 있어. 100억 채권 쪽에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 조심해. 백 사장님께서 자네가 다치는 걸 원치 않으셔.”

“걱정 마십시오. 장물은 제자리에 있습니다.”

태오는 전화를 끊었다.

유리창 너머 사거리에는 경찰 승합차의 붉은 경광등과 검은 세단의 푸른 상향등이 뒤엉켜 사방을 번갈아 비추고 있었다.

한빛 재단의 무장 인력들이 차에서 내려 섀도 엔틱의 지하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고 신유경과 수사관들도 권총을 쥔 채 차 문을 박차고 내렸다.

사거리는 완전히 봉쇄되었다.

태오는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왼쪽 주머니에는 진짜 사파이어 반지가, 오른쪽 주머니에는 붉은 금속 가루를 바른 가짜 반지가 들어 있었다.

50억의 물줄기는 갈라졌고 이제 사거리의 덫을 찢고 나갈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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