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법사의 상태창이 너무 많음

4화: 균열 아래의 흰빛
세라의 손이 이안의 손목에서 떨어지는 순간 검은 선이 피부 아래로 파고들었다.
이안은 오른손을 등 뒤로 숨겼다. 세라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녹색 눈동자는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이건 오염이 아닙니다.”
베른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뭡니까?”
“고대 봉인 연쇄 반응입니다. 이 사람의 회로가 주변 잔류 마나를 끌어당기고 있어요.”
“근거는요?”
“방금 제가 손을 댄 뒤 반응이 변했습니다.”
세라가 바닥의 검은 가루를 가리켰다. 그 아래에서 세로선과 꺾인 고리 같은 흔적이 희미하게 빛났다.
이안의 손목이 욱신거렸다. 익숙한 문양이었다. 하지만 기억의 어느 구석에서 보았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현장을 확인하겠습니다.” 세라가 말했다.
“파편은 마도탑 관리 대상입니다.”
“파편을 옮기자는 게 아닙니다. 파편이 부른 응답을 따라가자는 겁니다. 지금도 지하에서 같은 파동이 올라옵니다.”
토른이 감지판을 내밀었다. 보조 바늘이 세 번 떨린 뒤 네 박자 멈추고 다시 떨었다.
이안은 눈금을 계산했다.
“북부 구시가지 아래의 폐쇄 배수로입니다. 수압관이 신호를 전달하고 있어요.”
베른이 이안을 노려보았다.
“자네는 격리 대상이다.”
“그럼 격리 대상이 어디로 신호를 보내는지는 확인하셔야겠군요.”
세라가 베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동행합니다. 현장 판단은 제가 내리겠습니다.”
“성당이 마도탑의 지하를 지휘하겠다는 겁니까?”
“사람이 죽는 순간까지 절차를 기다리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짧은 침묵 뒤 베른은 토른에게 봉인못과 구조용 밧줄 결계를 준비하라고 했다.
이안이 미완성 봉인 지팡이를 집자 세라가 말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혼자 감당하면 구조 대상이 늘어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는 것보다 말해 주는 게 먼저입니다.”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표식도 바르칸의 목소리도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세라를 방해자로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북부 구시가지에 도착하자 시장 바닥이 낮게 울렸다. 낡은 우물 주변의 돌이 갈라지고 검은 물이 틈새로 솟았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토른이 외쳤다.
우물 안쪽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있습니다!”
세라가 곧장 우물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이안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물이 마력을 먹습니다. 밧줄만 내리면 끊깁니다.”
“그럼 다른 방법을 찾으세요.”
세라가 성표를 움켜쥐었다. 흰빛이 우물 안으로 내려갔지만 검은 물에 닿자 가늘게 찢어졌다.
이안은 지팡이를 돌려 세 겹의 지지식을 펼쳤다. 우물 벽은 멎었으나 균열은 오히려 넓어졌다.
“결계 방향을 아래가 아니라 바깥으로 잡으세요.”
“그러면 안쪽 사람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지금 아래를 막으면 물이 사람을 밀어붙입니다. 벽부터 붙들어야 합니다.”
세라는 잠깐 그를 보더니 결계의 흐름을 바꿨다.
그 순간 이안의 시야에 희미한 창이 겹쳐졌다.
[새로운 전직 기록이 공명합니다.]
[기록명: 성녀]
[동기화 조건: 살아 있는 계승자의 동의]
[주의: 동의 없는 치유는 기억을 대가로 합니다.]
이안은 눈을 감았지만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흰 글자가 세라의 손끝과 우물 안쪽의 사람들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 빛을 쓰지 마라.
바르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모르는 채로 빌리는 힘이 가장 비싸다.
우물 안에서 비명이 터졌다. 검은 물이 솟구치며 밧줄을 끊었다.
세라가 몸을 던지듯 앞으로 나섰다. 이안은 흑벽을 떠올렸다. 손목의 검은 선이 즉시 조여 왔다.
‘아직 쓸 수 없다.’
이안은 지지식의 두 번째 고리를 부쉈다. 역류한 마력이 물길을 우물 벽 한쪽으로 꺾었다.
“토른! 밧줄을 세 겹으로 묶어 제 지팡이에 연결하세요!”
“당신은 지지식을 유지해야 합니다!”
“유지할 겁니다. 그러니 빨리!”
세라는 밧줄을 허리에 감고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세라, 혼자 들어가지 마십시오.”
“혼자 아닙니다. 당신의 지지식이 있잖아요.”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이안은 이를 악물고 마력을 밀어 넣었다. 지지식 틈으로 차가운 기운이 기어 나왔다.
―왼쪽 세 걸음. 벽이 아니라 물 아래에 빈 공간이 있다.
“그걸 왜 이제 말하지?”
―네가 묻지 않았으니까.
이안은 지팡이 끝을 왼쪽 바닥에 박았다. 돌이 부서지며 숨은 통로가 열렸다. 그 안에서 작은 손이 튀어나왔다.
“여기입니다!”
세라가 아이를 끌어안은 채 외쳤다. 아이 뒤에는 배수로 작업자 세 명이 서로의 옷을 붙잡고 웅크리고 있었다.
통로는 한 사람씩 빠져나오기도 좁았다. 세라는 아이를 먼저 밧줄에 묶어 올려 보냈다. 그때 우물 벽 전체가 갈라졌다.
“이안! 지금입니다!”
“한 명씩 나와!”
“벽이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한 명씩!”
이안은 물을 막지 않고 두 갈래로 갈랐다. 대마법사식이 양쪽 벽을 압박했고 그는 세라에게 닿지 않도록 좌표를 계속 바꿨다.
첫 번째 작업자가 토른의 손에 끌려 나왔다. 두 번째도 곧 뒤따랐다. 세 번째가 몸을 빼내려는 순간 균열 아래에서 검은 물결이 솟았다.
지상으로 나온 작업자는 숨을 몰아쉬며 우물 가장자리의 돌을 붙잡았다. 그의 손톱 밑에는 검은 모래가 박혀 있었고 젖은 작업복에서는 오래된 철 냄새가 났다.
“안에 더 있습니다. 통로 끝에 문이 있었어요.”
“문을 열었습니까?” 토른이 물었다.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에서 누가 계속 두드렸습니다.”
이안은 우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들은 소리와 같았다. 작업자는 네 명이었고 구조 요청을 한 목소리는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통로 안에 남은 존재가 있다는 뜻이었다.
세라가 이안의 표정을 읽었다.
“구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사람들은 모두 나왔습니다. 하지만 저 목소리는 사람의 호흡과 달랐습니다.”
“그래도 확인해야 합니다.”
“확인과 진입은 다릅니다. 지금 들어가면 출구가 닫힐 수 있어요.”
세라는 우물 아래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잠깐 흔들린 눈빛에는 구해야 한다는 본능과 조사관으로서의 판단이 동시에 담겼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판단해야 합니다.”
이안은 그 말을 듣고 지팡이를 다시 세웠다. 세라가 혼자 들어가지 않도록 밧줄의 매듭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그녀도 말없이 그의 손을 도왔다.
세라가 그 앞을 막았다. 신성 결계가 물결을 밀어냈지만 그녀의 팔에 금이 간 빛이 번졌다.
“세라!”
“사람부터!”
성녀 상태창의 흰 글자가 흔들렸다.
[치유 권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대상: 세라 로웬]
[예상 대가: 대상의 최근 기억 일부]
이안의 손가락이 떨렸다. 힘을 쓰면 세라를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을 빼앗는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라. 왼팔을 내리세요. 결계를 넓히지 말고 사람 뒤에만 세우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지지식이—”
“제가 감당합니다.”
“또 혼자 감당하려 하네요.”
세라는 이를 악물고 결계의 모양을 바꿨다. 이안은 지지식의 마지막 고리를 자신의 마나 핵에 연결했다.
통증이 가슴을 꿰뚫었다. 균열의 압력이 몸 안으로 밀려들었다. 흰빛이 통증의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였다.
[살아 있는 자의 손을 빌리십시오.]
[강제 사용을 거부하면 동기화가 중단됩니다.]
이안은 창을 닫았다.
“세라. 손을 빌리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가 지지식을 유지합니다. 당신은 사람들의 호흡을 맞춰 주세요. 치료가 아니라 순서를 정하는 겁니다.”
세라는 작업자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 목소리를 들으세요. 하나씩 숨을 들이마시고 하나씩 내쉽니다. 겁먹어도 됩니다. 멈추지만 마세요.”
작업자들의 떨림이 조금씩 일정해졌다. 이안은 그 리듬에 맞춰 마력을 흘렸다.
세라의 결계가 사람들을 감싸고 이안의 마법이 물길을 꺾었다. 마지막 작업자가 빠져나오는 순간 우물 바닥이 크게 꺼졌다.
이안은 모든 마력을 끊고 무릎을 꿇었다. 세라도 한쪽 무릎을 꿇었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모두 살아 있습니까?”
“호흡이 있습니다.”
세라가 이안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검정이 아니었다. 흰빛이 두 사람의 손 사이에서 가늘게 떨렸다.
[첫 공명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동의는 힘을 빌리는 자와 빌려주는 자 모두의 선택이어야 합니다.]
“방금 무엇을 봤습니까?” 세라가 물었다.
“당신의 결계가 안정됐다는 것.”
“그건 제가 봤습니다. 다른 것을 물었습니다.”
이안은 잠시 침묵했다.
“아직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숨겨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물 아래에서 흰빛이 솟구쳤다. 배수로 벽에 세로선과 꺾인 고리 문양이 나타났다. 이안의 검은 봉인선과 닮은 문양이었다.
세라가 손을 뻗기도 전에 벽 안쪽에서 세 번의 두드림이 울렸다.
쿵.
쿵.
쿵.
균열 건너편에서 낮고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어라.”
세라의 손등에 작은 흰 문양이 떠올랐다. 이안은 그 문양과 자신의 봉인선을 번갈아 보았다.
바르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조된 사람들의 숨소리가 등 뒤에서 이어졌다. 문 안쪽의 것은 그 숨소리를 기다린 것처럼 다시 벽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