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교수님의 연구실 노예가 되기 싫어서

1화: 조교 계약서의 작은 글씨
연구실 문 앞
황립 아카데미 마도학부 제3공명연구실 앞에는 아침부터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없는 복도는 조용하지 않았다. 벽 안쪽에서 금속이 갈리는 소리가 났고 천장 등불은 일정하지 않은 간격으로 깜빡였다. 문 아래로 푸른빛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리에트 벨로아는 문고리를 잡지 않은 손으로 발령서를 눌렀다.
발령서 아래에는 아직 서명하지 않은 조교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첫 장의 업무 범위에는 ‘연구 보조’라고 적혀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 줄이었다.
‘지도교수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연구·강의·행정 및 이에 부수하는 업무 전반.’
리에트는 손톱으로 그 문장을 두 번 두드렸다.
“이건 업무가 아니라 빈 종이에 가까운데.”
“그래도 빈 종이보다는 낫지 않아?”
옆에서 마렐 오르티스가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식어 버린 치즈빵 두 개와 설탕을 입힌 견과가 들어 있었다.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조의금 대신 간식이야. 선배 조교들도 그렇게 말하고 들어갔다가 한 달 뒤 눈 밑이 보라색이 돼서 나왔어.”
리에트는 봉투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마렐이 농담할 때 목소리 끝이 조금 높아졌다.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장학금 심사는 이번 달 말이야. 조교 발령이 취소되면 연구비 추천도 같이 사라져.”
“알아.”
“그럼 서명할 거야?”
리에트는 계약서 뒤쪽으로 넘겼다. 보수 항목은 비어 있었다. 성과물은 연구실이 보관하고 관리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저자권과 원자료에 관한 말은 없었다.
“서명은 할 수 있어. 그대로는 안 해.”
“교수님 계약서에 수정 의견을 달겠다고?”
“계약서에 없는 조건은 나중에 없었던 일이 되니까.”
그때 연구실 안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터졌다. 복도 바닥의 마력선이 한 번 떨렸다. 리에트의 오른손 손끝이 저렸다.
낯선 이질감이었다. 눈으로 본 것은 단순한 진동인데 피부는 진동보다 늦은 박자를 감지했다. 두 개의 파장이 겹친 뒤 한쪽이 아주 조금 밀려난 느낌.
리에트는 저린 손을 소매 안으로 감췄다.
“지금 들어가도 돼?”
“보통은 노크하고 살아서 나와.”
“그럼 노크부터 하지.”
리에트가 세 번 두드리기도 전에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첫 지시
은발의 남자가 문틈에 서 있었다. 연구 가운은 한쪽 소매가 접혀 있었고 푸른 눈 아래에는 밤을 통째로 세어 버린 사람처럼 그늘이 졌다. 그는 리에트의 얼굴보다 손에 든 계약서를 먼저 보았다.
“리에트 벨로아.”
“에르반 루센 교수님.”
“늦었군.”
리에트는 벽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각보다 4분 빨랐다.
“아직 4분 남았습니다.”
“연구실은 시계보다 먼저 시작한다.”
에르반은 인사를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리에트는 문턱을 넘었다.
연구실 안은 탄 광물과 묵은 잉크 그리고 식지 않은 차 냄새가 섞여 있었다. 벽면에는 공명식 도형이 빼곡했고 바닥에는 분해된 장치가 놓여 있었다. 통로를 확보하려 부품을 한쪽으로 민 흔적만 남아 있었다.
에르반은 중앙 작업대 앞에서 서류 세 묶음을 밀었다.
“이 세 개를 정리해.”
“무엇을 기준으로요?”
“실패 원인.”
“실험은 언제 했습니까?”
“첫 번째는 어제 저녁. 두 번째는 자정. 세 번째는 네가 문을 열기 전.”
“실험 목표와 안전 중단 기준은요?”
에르반이 그제야 리에트를 보았다.
“목표는 성공. 중단 기준은 장치가 깨지기 전.”
리에트는 세 묶음 중 가장 얇은 노트를 펼쳤다. 계산식은 정갈했다. 각 고리의 파장과 입력량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실패 로그의 마지막 줄마다 같은 부분이 비어 있었다.
제3고리 기준선. 공란.
그녀는 실제 장치를 살폈다. 기록에는 세 개의 고리가 같은 높이로 연결되어 있어야 했다. 장치의 세 번째 고리는 다른 둘보다 한 손가락만큼 낮았다. 연결선도 노트의 그림과 달랐다.
“교수님. 이 장치의 배선이 기록과 다릅니다.”
“그래서 실패했겠지.”
“기록에는 그 차이가 없습니다.”
“기록에 없는 건 중요하지 않다.”
“실패를 설명하는 정보라면 중요합니다.”
에르반의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공명식을 읽을 줄 안다고 했지.”
“수리마도학과 수석 장학생입니다.”
“그건 성적표에 적혀 있다.”
그는 작은 수정석을 리에트 쪽으로 밀었다.
“저출력으로 점검해.”
“보호판은요?”
“필요하면 네가 가져와.”
“연구실 안전 규정은?”
“벽에 붙어 있다.”
안전 규정은 반쯤 찢겨 있었고 마지막 항목은 잉크가 번져 읽을 수 없었다.
‘담당자의 판단에 따라 즉시 중단할 수 있다.’
담당자가 누구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리에트는 서랍에서 은판과 보호 장갑을 꺼냈다. 장치의 입력부를 분리한 뒤 수정석을 낮은 출력으로 연결했다. 계산대로라면 세 고리의 파장이 순서대로 흔들려야 했다.
첫 번째 고리가 떨렸다.
두 번째 고리가 따라갔다.
세 번째 고리에서 손끝이 저려 왔다.
리에트는 즉시 손잡이를 내렸다. 푸른빛이 꺼지고 장치 안쪽에서 작은 딱 소리가 났다.
“왜 멈췄지?”
“세 번째 고리의 반응이 계산보다 늦었습니다.”
“느꼈나?”
“관찰했습니다.”
“눈으로?”
리에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르반은 세 번째 고리의 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검은 가루가 아주 조금 쌓여 있었다.
“계속해.”
“계약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서명하지 않는 조교
에르반은 작업대 아래에서 부속 약정서를 꺼냈다. 서류를 이미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서명하면 연구실 출입 권한이 생긴다.”
리에트는 첫 장부터 읽었다. 업무 범위는 발령서보다 넓었다. 연구 보조와 강의 준비와 실험실 정리 그리고 교수의 지시로 정하는 모든 업무가 포함되어 있었다.
성과물은 연구실의 관리 아래 보관한다는 문장도 있었다. 기여자 명단과 저자 표기에 관한 조항은 없었다.
“보수가 없습니다.”
“장학금이 있지.”
“장학금은 학교가 지급합니다. 교수님이 주시는 보수가 아닙니다.”
“연구실에 들어오는 것이 보상이다.”
“그 보상으로 강의 준비와 행정까지 하라는 뜻입니까?”
“필요한 일이다.”
리에트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필요한 일과 제 일이 같은지는 구분해야 합니다.”
에르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를 내는 대신 계산을 다시 하는 얼굴이었다.
“그럼 조건을 말해.”
“업무 시간을 기록하겠습니다. 안전상 필요하면 실험을 중단할 권한을 갖겠습니다. 원자료는 제가 작성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기여 내용은 연구 결과와 함께 남겨야 합니다.”
“추천서가 필요하지 않나?”
“필요합니다.”
“그럼 결과를 내.”
“결과를 내기 위해서라도 기록이 필요합니다.”
리에트는 계약서 여백에 짧게 적었다.
‘서명 전 확인 사항: 업무 시간·안전 중단 권한·원자료 열람·기여 기록에 관한 별도 합의 필요.’
그리고 자신의 이름 옆에 날짜를 썼다. 서명은 하지 않았다.
“유보 의견을 남겼습니다. 검토 없이 서명할 수는 없습니다.”
에르반은 여백의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출입 권한도 없다.”
“발령서상 첫 출근은 오늘입니다. 계약 검토와 업무 확인은 출근 업무에 포함됩니다.”
에르반은 첫 번째 실험 노트를 집어 들고 마지막 장을 펼쳤다.
“좋아. 계약은 나중에 확인하지.”
“나중에가 언제인지 적어 주신다면요.”
“네가 이 문제를 설명한 뒤.”
“오늘 안에요?”
“오전까지 가능하다고 판단했지.”
“그건 교수님이 하신 판단입니다. 제 약속은 아닙니다.”
리에트는 계약서를 노트 아래에 끼웠다. 에르반이 질문하지 않은 약속을 그녀에게 덧씌우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그럼 오전까지는 관찰 결과만 내겠습니다. 원인 확정은 재현 실험 뒤로 구분하겠습니다.”
에르반의 시선이 처음으로 노트에 머물렀다.
“구분할 줄은 아는군.”
칭찬인지 확인인지 알 수 없었다. 리에트는 장치로 돌아갔다.
빈칸의 위치
이번에는 눈으로 배선을 따라갔다. 첫 번째 고리의 입력선은 중앙 기준점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도 같았다. 세 번째만 기준점 대신 외곽 접지에 이어져 있었다.
노트의 도형에는 그 선이 없었다. 계산식에도 접지에 관한 변수가 없었다. 실패 로그의 마지막 줄이 비어 있던 이유가 보였다. 측정해야 할 기준선이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리에트는 빈칸 옆에 연필로 작은 점을 찍었다.
‘실패 원인 후보: 제3고리 기준선 누락. 기록과 실제 접속 불일치.’
그녀는 은판을 세 번째 고리와 중앙 기준점 사이에 임시로 걸었다. 손끝의 저림이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두통까지 번졌다. 편차 감응을 오래 쓰면 감각이 흐려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에트는 눈을 떼고 호흡을 세 번 고른 뒤 저출력 펄스를 한 번 보냈다.
세 고리가 동시에 떨렸다. 세 번째 고리는 여전히 반 박자 늦었다. 그러나 검은 가루가 더 쌓이지는 않았다.
두 번째 펄스 뒤에는 장치의 빛이 흔들렸다. 리에트는 입력을 끊고 결과를 적었다.
세 번째 펄스는 보내지 않았다. 아직 안정화됐다고 부를 수 없었다.
“왜 끝내지?” 에르반이 물었다.
“두 번의 관찰로 임시 접속이 편차를 줄인다는 점은 확인했습니다. 보호판을 보강하지 않고 세 번째를 보내는 건 검증이 아니라 소모입니다.”
“겁이 많군.”
“겁이 아니라 순서입니다.”
그 순간 장치 안쪽에서 짧게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세 번째 고리 표면에 가느다란 선이 생겼다. 리에트가 손을 대지 않았다면 다음 펄스에서 깨졌을 균열이었다.
에르반은 금을 본 뒤 리에트의 기록을 보았다.
“빈칸을 찾았군.”
“빈칸이 원인이라고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네가 찾은 건 빈칸이다.”
그는 노트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내일까지 관찰 기록을 논문 형식으로 정리해.”
리에트는 고개를 들었다.
“논문으로요?”
“결과를 남기고 싶다며.”
“교수님 성과물 귀속 조항은 아직 합의되지 않았습니다.”
“조건을 적어.”
“이미 적었습니다.”
에르반은 잠시 침묵했다. 연구실 안에는 식은 차 냄새와 장치에서 새어 나오는 금속 냄새만 남았다.
“더 명확하게.”
리에트는 새 종이를 꺼냈다. 관찰자와 장치 준비자와 계산 검토자와 최종 승인자를 나누어 적었다. 에르반의 이름을 최종 승인자 칸에 쓰면서도 저자 순서는 비워 두었다.
“이렇게 기록하면 연구실에서 일한 시간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에르반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연구실 노예가 되기 싫은 모양이지.”
리에트는 손끝의 두통을 눌렀다.
“노예는 계약서를 읽지 않으니까요.”
에르반의 푸른 눈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
리에트는 빈 노트 첫 장에 제목을 적었다.
‘제3고리 접속 편차의 발생 조건에 관한 예비 관찰.’
제목 아래에는 결론을 쓰지 않았다. 대신 실험 시각과 입력량 그리고 중단 시점을 한 줄씩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유보한 계약 조건을 노트 표지 안쪽에 옮겼다.
무급 조교가 되는 것과 연구자의 이름을 빼앗기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었다.
리에트는 깨진 고리를 바라보았다.
갈려 나가기 전에 이걸 논문으로 끝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