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마법어를 독해하는 천재 언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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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부정의 범위
“황실 명령이다. 감찰 기사 카르딘은 즉시 칼을 버려라.”
출구 밖에서 울린 목소리는 메마르고 거칠었다.
라온은 망설임 없이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오른팔에 새겨진 회색 봉인 문양이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황실 유적감찰국 특별 호송 규정 제7조.”
라온의 목소리가 갱도 안을 차갑게 울렸다.
“현장 집행관의 고유 식별 암호와 수결을 대라. 규정된 절차 없이는 황실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없다.”
바깥에서 거친 헛웃음이 돌아왔다.
“고결한 카르딘 경께서 아직도 법도를 믿으시는군. 언어학자와 유물만 넘기면 목숨은 보전해 주마. 거부하면 통로째로 매몰될 뿐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파공음이 터졌다.
투구궁!
육중한 철제 화살촉이 나무 덧문을 꿰뚫고 들어왔다. 화살대는 바닥에 박히며 검붉은 불꽃과 함께 지독한 악취를 뿜었다.
도윤은 바닥에 꽂힌 화살을 내려다보았다. 화살촉 둘레에 검은 밀랍이 두껍게 발려 있었다.
“정규 감찰대의 무기가 아닙니다.”
도윤이 낮게 말했다.
“황실 기사단은 독성 마력 밀랍을 쓰지 않습니다. 저자들은 규정을 집행하러 온 군인이 아닙니다.”
라온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알고 있다. 교단의 사병들이 쓰는 방식이다.”
세라가 등불을 낮추며 출구 옆 벽면으로 물러섰다. 목에 걸린 나침반 바늘이 벽 틈새의 어둠을 가리키며 가늘게 떨렸다.
“정문으로 나가면 벌집이 돼요. 밖에는 최소 대여섯 명이 포위망을 짰습니다.”
세라는 낡은 지지목 아래 쌓인 석탄 가루를 걷어냈다.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어두운 구멍이 입을 벌렸다.
“폐광 배수를 위해 뚫었던 수직 통로예요. 내려가면 유적 하부 배수 회랑과 이어집니다.”
“안전을 보장할 수 있나?”
라온이 묻자 세라가 나침반을 쥐고 돌아섰다.
“문 밖에서 화살을 몸으로 받아내는 것보다는 안전해요. 제 신호에 맞춰 움직이고 절대 발을 헛디디지 마세요. 이번에는 셋 모두 제 판단을 따라야 합니다.”
그 순간 덧문 밖에서 둔탁한 도끼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뜯겨 나갔다. 문틈으로 횃불의 붉은 연기가 쏟아졌다.
라온은 검집을 쥔 채 결단을 내렸다.
“세라 벨크의 안내를 현장 긴급 대피로 승인한다. 앞장서라.”
세라가 좁은 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도윤이 뒤를 따랐고 라온은 마지막으로 몸을 던지며 입구의 버팀목을 걷어찼다.
우르릉 쾅!
무너져 내린 암석과 흙더미가 입구를 집어삼켰다. 밖에서 쏟아지던 고함이 단숨에 차단되었다.
통로는 가파르고 축축했다. 발밑은 젖은 진흙과 부서진 침목으로 미끄러웠다. 세라는 벽을 짚고 나침반의 진동을 살피며 걸음을 재촉했다.
“경사가 급해요. 미끄러지면 바닥까지 굴러떨어집니다.”
도윤은 스쳐 지나가는 벽면의 질감을 확인했다. 거친 암벽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매끄러운 화강암 판석으로 바뀌었다.
돌 표면에는 물길을 유도하는 홈과 함께 고대의 유체 제어 표식이 촘촘히 음각되어 있었다.
“단순한 광산 배수로가 아닙니다. 유적 설계 당시 지하수를 빼내기 위해 만든 방어 배수 회랑입니다.”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광부들이 유적 벽을 뚫고 물길을 이은 거예요. 덕분에 폐광 바닥까지 이어지지만 유적의 방어 장치도 그대로 살아 있어요.”
뒤쪽 위에서 둔탁한 파쇄음이 울렸다. 흙더미를 뚫고 들어오는 쇠갈고리 소리와 사냥개의 으르렁거림이 갱도를 타고 흘러내렸다.
“벌써 흙더미를 파헤쳤군. 추격조의 발소리가 넷이다.”
라온이 뒤를 돌아보며 검을 비껴잡았다.
“서둘러야 해요! 바닥이 보입니다!”
세라가 속도를 높였다.
내리막이 끝나며 거대한 지하 공동이 나타났다. 천장은 까마득했고 바닥에는 짙은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직선 회랑이 놓여 있었다. 폭은 열 걸음 남짓이었고 길이는 쉰 걸음 정도였다.
회랑 양옆은 바닥 모를 낭떠러지였다. 오직 그 통로만이 맞은편의 현무암 아치문으로 이어졌다.
회랑 바닥에 깔린 사각 판석마다 붉은빛 기하학 문양이 불길하게 맥동했다. 머리 위에는 수십 개의 거대한 석창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회랑 입구 오른편 석주에는 고대 문자로 된 경고문이 선명했다.
“저 문을 넘어야 다음 석실로 갑니다. 그런데 저 바닥 문양…… 보통 함정이 아니에요.”
세라가 숨을 헐떡였다. 뒤쪽 갱도에서 사냥개의 짖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라온이 석주로 다가가 경고문을 응시했다. 감찰국 기사로서 익힌 기초 금기어 지식이 스쳤다.
“멈추는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라온이 번역문을 읊조리며 칼자루를 쥐었다.
“표준 독해집에 실린 전형적인 돌파형 함정 문구다. 발을 멈추면 천장의 추가 떨어지거나 바닥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세라 역시 신발 끈을 조였다.
“망설일 틈이 없어요. 단숨에 내달려 저 아치문 안으로 뛰어들어야 해요!”
세라가 앞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라온 역시 도윤의 팔을 잡고 회랑으로 몸을 던지려 했다.
“내가 앞장선다. 도윤은 내 발자국만 밟아라!”
“멈추십시오!”
도윤이 날카롭게 외치며 세라의 외투 자락과 라온의 칼집을 동시에 낚아챘다.
세라가 비틀거리며 멈춰 섰다. 신발 끝이 붉게 빛나는 첫 번째 판석 바로 앞에서 흙먼지를 일으켰다.
“도윤 씨! 뭐 하는 짓이에요? 지금 놈들이 코앞까지 왔어요!”
라온도 차가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이유 없는 지체는 자살행위다. 손을 놓아라.”
“발을 딛는 순간 우리 셋 다 저 석창에 꿰뚫립니다.”
도윤의 목소리는 서릿발처럼 단호했다. 두 사람을 놓지 않은 채 등불을 석주 앞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라온 경이 읽은 것은 조작된 번역입니다. 문장의 어순이 완전히 뒤틀려 있습니다.”
“조작이라니? 도감에 실린 원문과 일치한다.”
“원문이 아닙니다.”
도윤은 석주 중간의 세 겹 쐐기 기호 아래를 가리켰다. 거뭇한 얼룩이 묻어 있었다. 손톱으로 강하게 긁어내자 굳어 있던 검은 밀랍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밀랍이 벗겨진 자리에서 가느다란 가로 갈고리와 두 개의 수직 점이 드러났다.
“또 밀랍이에요?”
세라가 눈을 크게 떴다.
“검은 서기관들이 지나가며 의도적으로 이 부호를 가렸습니다. 하린 고어의 복합문에서 앞 절과 뒤 절의 경계를 나누는 휴지 부호입니다. 숨을 멈추고 의미 단락을 끊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단락을 끊는 게 왜 함정의 해독을 바꾸지?”
라온이 묻자 도윤이 빠르게 설명했다.
“부정 표식의 작용역 즉 부정의 범위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부호가 가려지면 문장 앞머리의 부정 표식이 바로 뒤의 '멈추다'라는 어근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멈추지 마라' 즉 '멈추는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명령문으로 왜곡됩니다. 뒤따라오는 자들이 공포에 질려 전력 질주하도록 유도한 악의적인 덫입니다.”
통로 모퉁이에서 횃불이 번쩍였다. 거친 고함과 함께 무장한 사내들의 그림자가 쏟아졌다.
“잡았다! 저기 서 있다!”
세라의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그럼 원래 뜻이 뭔데요? 빨리 말해요!”
도윤은 복원된 휴지 부호를 중심으로 문장의 구조를 올바르게 재배열했다.
“부정 표식은 '멈추다'에 걸려 있지 않습니다. 주어는 '멈추어 선 자'이고 부정 표식은 문장 맨 끝의 '파멸'을 지배합니다.”
도윤의 손끝이 마지막 표식을 짚었다.
“원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발을 멈추어 선 자는 해를 입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멈춰 선 자가 안전하고 달리는 자가 죽는다고?”
“이 함정은 연속적인 진동에 반응합니다. 붉은빛이 깜빡이는 동안에는 어떤 움직임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멈추지 않고 달리는 순간 저 수십 개의 석창이 회랑 전체를 쓸어버립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네 명의 무장 괴한이 뛰쳐나왔다. 선두의 거구 사내가 도끼를 치켜들며 잔혹하게 웃었다. 목줄 풀린 사냥개 두 마리가 회랑을 향해 맹렬하게 쇄도했다.
“어디서 쥐새끼처럼 멈춰 서 있느냐! 모가지를 따 버려라!”
“도윤 씨!”
세라가 단도를 뽑았고 라온도 검을 세우며 발을 내딛으려 했다.
“물러서라!”
“움직이지 마십시오!”
도윤이 라온의 어깨를 누르며 제지했다.
“숨도 크게 쉬지 마십시오! 절대 저 판석 위로 발을 올리면 안 됩니다!”
라온의 발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 찰나 사냥개 두 마리가 붉은 판석 위로 몸을 날렸다. 뒤를 이어 도끼를 든 사내와 칼을 뽑은 용병이 뛰어들었다.
쿵! 쿵! 쿵!
그들의 발이 세 번째 판석을 밟는 순간이었다.
쿠르르르릉!
지하 공간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진동했다. 바닥의 붉은 문양이 핏빛 화염처럼 타오르더니 판석 아래에서 거대한 톱니바퀴 맞물리는 굉음이 터졌다.
“어……?”
사내가 멈추려 한 순간 머리 위의 쇠사슬이 일제히 끊어졌다.
콰아아아앙!
수십 개의 거대한 석창이 벼락처럼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날카로운 암석 창들이 회랑 전체를 강타했다. 사냥개의 비명도 사내들의 고함도 파쇄음에 짓눌려 흔적 없이 사라졌다.
돌과 돌이 부딪치며 불꽃과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회랑 전체가 자욱한 석분과 마력의 충격파에 휩싸였다.
입구 바로 앞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세 사람의 옷자락이 거센 돌풍에 미친 듯이 펄럭였다. 라온은 검으로 날아오는 돌 파편을 쳐내며 두 사람을 등 뒤로 숨겼다.
세 사람의 발밑으로는 단 하나의 석창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서 있는 문턱 앞의 첫 번째 안전선은 붉은빛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우르릉 쾅!
이어지는 2차 붕괴로 회랑 뒤쪽 갱도 입구가 통째로 무너졌다. 뒤따라오던 나머지 추격자들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바위들이 통로를 완전히 메워 버렸다.
적막이 찾아왔다.
먼지 사이로 피어오르던 붉은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부서진 석창 잔해 위로 맑고 차가운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함정이 소진되어 안전 모드로 돌아선 신호였다.
세라가 주저앉을 뻔한 다리에 힘을 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하…… 하하…… 진짜로 멈춰 섰더니 살았네요.”
세라는 땀을 닦아내며 도윤을 돌아보았다. 갈색 눈동자 속에 깊은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라온 역시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차가운 회색 눈동자가 부서진 석주와 도윤의 손등을 번갈아 응시했다.
“학회의 도감에 실린 번역을 맹신했다면 우리는 지금 저 돌무더기 아래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라온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단 한 글자의 부호로 삶과 죽음이 뒤바뀌는군.”
도윤은 옷의 돌가루를 털어내며 석주를 바라보았다.
“고대어는 단순한 문자가 아닙니다. 화자와 청자 그리고 조건이 맞물린 정밀한 계약입니다. 부정의 범위를 왜곡하는 것만으로도 수천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덫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도윤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검은 밀랍 조각에 닿았다.
“검은 서기관들은 이 문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뒤를 쫓는 추격자가 도감의 번역을 따를 것이라는 점까지 계산하고 이 덫을 놓았습니다.”
라온이 부서진 통로를 등지고 돌아섰다.
“뒤로 돌아갈 길은 사라졌다.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세 사람이 조심스럽게 회랑을 건넜다. 푸른빛으로 정화된 판석은 더 이상 진동에 반응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부서진 잔해를 넘어 맞은편 현무암 아치문 아래로 들어섰다.
아치문 너머는 유적의 더 깊은 심부였다. 제1석실의 하부에 해당하는 광활한 원형 돔 공간이 어둠 속에서 자태를 드러냈다.
그때였다.
공간 깊은 곳에서 기괴하고 아름다운 울림이 피어올랐다.
웅…… 웅…… 우우웅…….
바람 소리도 사람의 숨결도 아니었다.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음성 마법 장치가 침입자들의 기척과 말소리를 먹고 서서히 깨어나는 불길한 태동이었다.
도윤의 손등에 새겨진 네 개의 어근 인장이 차가운 공명에 반응하듯 일제히 푸른빛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