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마법어를 독해하는 천재 언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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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구금된 기록관
붉은 인장이 찍힌 문서가 푸른 수정구의 빛을 가르고 있었다.
도윤은 문서의 글자보다 라온의 손을 먼저 보았다. 검집을 쥔 손가락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떨리지는 않았다. 이 남자는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구금 사유는 확인했습니다.”
도윤이 말했다.
“그럼 손을 내밀어라.”
라온이 허리춤에서 은빛 봉인구를 꺼냈다. 두 개의 고리가 맞물린 작은 금속구였다. 손목에 닿으면 시전자의 마력을 묶고 문장 발화를 막는 도구였다.
“확인했다고 해서 이행에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동의는 필요 없다. 감찰국 직권 구금이다.”
“문서의 두 번째 인장을 보십시오.”
도윤은 문서에 손대지 않은 채 아래쪽을 가리켰다. 붉은 인장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적용 조건이 이어져 있었다. 라온이 읽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읽고도 지나친 부분이었다.
“현장 증거의 일차 목록을 작성하기 전에는 유적 조사 대상자를 호송할 수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문서가 말하는 무단 독해는 처분 사유이고 유적에서 발견한 기록은 별도의 증거입니다.”
“그 조항은 증거가 훼손될 우려가 없을 때 적용된다.”
“지금 훼손되고 있습니다.”
도윤은 수정구 옆 바닥을 보았다. 푸른빛이 한 번 번질 때마다 제단 주변의 먼지가 원을 그리며 밀려났다. 가장 가까운 돌 선반의 받침에서 가느다란 금이 뻗고 있었다.
세라가 그 틈을 발견하고 혀를 찼다.
“라온 경. 저 선반이 무너지면 제단이 눌립니다.”
“그러니 먼저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밖으로 나가면 갱도가 막혀요.”
“다른 출구가 있나?”
세라는 대답하지 않고 검은 밀랍이 흩어진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밀랍 가루 사이에는 구두 뒤축이 남긴 반달 모양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제단 앞에 서서 수정구를 열려 했고 실패한 뒤 급히 물러난 흔적이었다.
“출구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 사람들은 이 안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세라가 밀랍을 천 조각 위에 털어 넣었다.
“도윤 씨를 데려가려면 이 흔적도 목록에 넣어야겠네요. 검은 서기관들이 여기서 뭘 했는지 확인하지 않고 나가면 다음에 들어올 사람은 아무것도 못 찾을 테니까.”
라온의 시선이 세라에게 옮겨 갔다.
“그대는 감찰관이 아니다.”
“그래서 더 잘 봐요. 감찰관은 문서만 보니까.”
세라가 밀랍 조각을 봉투에 넣었다. 말투는 가벼웠지만 손은 신중했다. 도윤은 그녀가 자신을 위해 시간을 버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라온 경.”
“말해라.”
“현장 증거의 일차 목록을 제가 작성하겠습니다. 라온 경은 봉인과 안전을 확인하십시오. 세라는 구조를 기록하고요. 목록이 끝나는 즉시 저는 봉인구를 받겠습니다.”
“피의자가 조사를 맡겠다는 건가?”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저뿐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기록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라온 경이 모든 획을 확인하고 서명하면 됩니다.”
라온은 봉인구를 든 손을 내리지 않았다. 잠시 뒤 그의 눈이 문서 아래쪽의 빈 칸으로 향했다.
“목록 작성자는 감찰관이어야 한다.”
“그 조항에는 자격 있는 해독자의 협력을 받을 수 있다는 예외가 있습니다.”
도윤은 문서의 세 번째 줄을 읽었다. 글자 몇 개가 붉은 인장에 가려져 있었지만 문장 끝의 조건 표식은 분명했다. ‘발화가 필요한 증거’라는 뜻으로 보였다.
“제가 석문을 열지 않았다면 이 증거들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를 묶는 순간 수정구와 선반의 상태를 판독할 사람도 사라집니다.”
라온의 오른팔 봉인 문양이 희미하게 빛났다.
“규정상 열다섯 분이다. 그 안에 목록을 끝내고 호송한다.”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요.”
“보장하지 않았다. 가능한 경로를 확인하겠다는 뜻이다.”
“그럼 열다섯 분 동안 임시 조사관으로 인정해 주십시오.”
“감찰국은 죄인을 조사관으로 임명하지 않는다.”
“기록관은 죄인이 아닙니다.”
말이 떨어진 순간 수정구에서 푸른 파문이 일었다. 석실 전체에 낮은 금속음이 울렸다. 돌 선반마다 잠금쇠가 튀어나오고 바닥의 얇은 선들이 제단을 향해 모였다.
라온이 검을 뽑았다.
“뒤로 물러서라.”
도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제단 아래 새로 드러난 기호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바깥 석문에 있던 것과 같은 한정사가 아니라 ‘등록한다’에 가까운 어근이었다.
수정구는 구금 선언에 반응한 것이 아니었다. 기록관의 자격을 가진 발화자와 그를 감시하는 증인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었다.
“라온 경. 문서에 서명할 자리가 하나 비어 있습니다.”
“나중에 확인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서고가 닫힙니다.”
그때 돌 선반 하나가 기울었다. 세라가 몸을 날려 나침반을 선반 아래 홈에 밀어 넣었다. 은빛 바늘이 멈추며 푸른 선 하나가 받침을 감쌌다.
“나중이라는 말은 밖에 나갈 수 있을 때 하세요.”
세라가 이를 악물었다.
“저도 여기서 죽고 싶지는 않거든요.”
라온은 무너지는 선반과 문서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봉인구를 허리춤에 되돌려 넣고 문서 뒷면에 붙은 얇은 금속판을 떼어 냈다.
“열다섯 분 동안이다. 해독은 내가 허가한 표식만 대상으로 한다.”
“동의합니다.”
“발화는 금지한다.”
“필요하다면 발화 전 허가를 요청하겠습니다.”
“요청을 거절하고 중지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라온은 금속판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카르딘이라는 획이 새겨지자 바닥의 선 하나가 회색으로 변했다.
세라가 나침반을 놓지 않은 채 물었다.
“저는요?”
“그대는 외부 안내인이다.”
“현장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이고 출구를 찾을 사람입니다. 증거 구조를 모르면 다 같이 선반에 깔려요.”
라온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적어라. 증언의 범위는 지형과 흔적에 한정한다.”
세라는 나침반의 덮개를 닫고 금속판에 이름을 남겼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도윤은 두 사람이 차례로 남긴 이름을 보았다. 문서는 단순한 구금 통보서가 아니었다. 증거를 누가 보았는지 기록하는 계약문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필체가 남은 벽으로 다가갔다.
“필체를 확인하겠습니다.”
“접촉하지 마라.”
“접촉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윤은 등불을 낮춰 벽면을 비췄다. 점을 먼저 찍고 쐐기를 비껴 긋는 획순 아래에 작은 표식 세 개가 있었다. 첫 번째는 도윤이 읽을 수 있는 ‘말하다’의 어근이었다. 두 번째는 ‘듣다’에 가까웠다. 세 번째는 반쯤 긁혀 있었다.
한세진은 자신의 필체로 해독 결과를 적지 않았다. 누군가가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마지막 획을 남겨 두었다.
“아버지는 여기에 해석을 남긴 게 아닙니다.”
라온이 곧장 물었다.
“그대의 아버지인가?”
도윤의 목이 잠겼다. 숨길 이유와 말해야 할 이유가 동시에 떠올랐다.
“필체가 일치합니다. 왕립문자원 연구 기록에 남은 습관과 같습니다.”
“그 사실을 왜 지금 말하지 않았지?”
“확인하기 전에는 가설이었으니까요.”
“지금은 확정인가?”
“필체의 동일성은 확정입니다. 그가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라온은 더 캐묻지 않고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라가 벽 아래 먼지를 쓸어 내자 긁힌 문장이 나타났다.
도윤은 무릎을 굽혔다. 세 개의 표식이 이어진 뒤 마지막에 짧은 금이 가 있었다. 하린 고어의 명령형과 닮았지만 방향이 반대였다.
‘혼자 서명하지 말라.’
정확한 번역은 아니었다. 하지만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나누고 서명을 금지하는 구조만큼은 분명했다.
“아버지는 세 명을 요구했습니다.”
“세 명?”
“말하는 사람 하나와 듣는 사람 둘입니다. 혼자 문장을 완성하면 안 된다는 경고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문장을 완성하려는 순간 막아야겠군.”
라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번에는 도윤을 죄인처럼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 역시 벽의 경고를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정구 안의 실루엣이 다시 움직였다. 푸른빛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변했다.
“이…….”
한 음절뿐이었다. 이름인지 명령인지 알 수 없었다. 실루엣의 입술이 한 번 더 열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도윤은 발화를 삼켰다. 손등의 네 번째 인장이 뜨거워졌지만 그는 손을 뒤로 감췄다.
“읽어 달라는 뜻일까요?” 세라가 물었다.
“모릅니다.”
도윤은 처음으로 그 말을 두려움 없이 내놓았다.
“그래서 지금은 읽지 않겠습니다.”
그는 미완성 표식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대신 라온에게 금속판을 내밀었다.
“이 경고도 증거 목록에 넣어 주십시오. 저는 혼자 해석하지 않았다는 표시를 남기겠습니다.”
라온은 금속판에 문장을 추가했다.
“한도윤의 해석은 현장 대조를 거쳤다. 증인 라온 카르딘.”
세라가 옆에서 말했다.
“그리고 세라 벨크가 구조를 확인했어요.”
라온은 잠시 망설인 뒤 그녀의 이름도 새겼다.
두 이름과 하나의 해독자 표식이 금속판에 연결되자 제단 주변의 푸른 선이 잦아들었다. 석실이 세 사람을 밀어내는 대신 안쪽으로 길을 내기 시작했다.
가장 깊은 선반 뒤에서 돌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벽 한가운데가 안으로 접히며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세라가 먼저 등불을 들었다. 통로 안쪽 벽에는 검은 밀랍이 새로 묻어 있었다. 먼지가 내려앉은 주변과 달리 그 흔적만은 아직 윤기가 남아 있었다.
“검은 서기관들이 이 안에 들어갔어요.”
라온이 검을 세웠다.
“그대는 구금 상태다. 내 뒤에서 움직여라.”
도윤은 열린 통로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기록관을 기다린다더니.”
세라가 등불을 앞으로 내밀었다.
“기다린 건 저것들일 수도 있겠네요.”
도윤의 손등에서 네 번째 인장이 차갑게 식었다. 아버지의 경고는 혼자 서명하지 말라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 이미 다음 문장 앞에 서 있었다.
라온이 통로로 한 발 들어섰다.
“열다섯 분은 끝나지 않았다. 진실을 확인한 뒤 구금을 집행한다.”
도윤은 그 뒤를 따랐다. 통로 안쪽에서 검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말했다.
“증인은 셋이 아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