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36화: 결재선은 위를 향한다
수요일 오전 9시, 역삼동 주식회사 루미너스 501호 대표실.
대형 모니터에는 전날 밤 노스윈 리스크 서버에서 추출한 예약 파일의 메타데이터가 떠 있었다.
‘루미너스_공동제작지분_재검토안_v1’
업로드 실행 시각은 목요일 새벽 2시 30분이었다. 픽스온의 정례 투자심의위원회가 열리는 금요일 오전보다 정확히 하루 앞선 시간표였다.
윤서연이 문서의 세부 속성을 짚었다.
“픽스온 투자심의위원들에게 공식 안건으로 올라가는 심의 참고 서식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외부 자문서 형식을 빌려 내부 의결을 흔들려는 목적입니다.”
오기태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생성 이력을 띄웠다.
“서식 템플릿의 고유 등록 코드는 SH-SP-2024-C09입니다. 신성 엔터테인먼트 산하 경영 자문 법인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서식 코드입니다.”
강시우의 시야에 반투명한 푸른빛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스타메이커 Lv.2: 적대 문서 구조 및 위협도 분석]
- 대상 문서: 루미너스_공동제작지분_재검토안_v1
- 위협 강도: S (제작 권한 및 IP 지분 직접 침탈)
- 핵심 논리: 화물역 세트 18:12 가상 사고에 따른 현장 통제력 상실
- 권고 조치: 루미너스 30% 공동 제작 지위 박탈 및 단순 투자자로 격하
- 문서 내 논리적 모순율: 98% (실제 촬영 완료 시각 18:38 및 무사고 사실과 정면 배치)
시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문서의 핵심 논리는 하나군요. 화물역 세트에서 안전사고가 났으니 루미너스는 30퍼센트 공동 제작사 자격이 없다는 프레임입니다.”
윤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18시 12분에 배우들이 대피로를 이탈해 부상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현장 통제력이 상실되었으니 지위를 박탈하고 전문 대행사로 권한을 넘기라는 결론입니다.”
오기태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시간에 우리 배우들은 정식 도면대로 계단실에서 완벽하게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사고는커녕 완벽하게 끝났는데 문서는 이미 참사를 확정해 뒀던 겁니다.”
상대는 조작된 도면으로 배우들을 위험한 통로로 몰아넣고 그 혼란을 틈타 가상의 사고 보고서를 만든 뒤 픽스온 투자심의에 던지려 했다.
치밀한 계획이었지만 결정적인 빈틈이 있었다. 그들이 설계한 사고는 현장에서 단 1초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태 실장님. 이 예약 파일의 전송 경로를 지금 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연결을 끊으면 시스템 오류로 처리되겠지만 상대는 다른 유통망이나 찌라시 매체로 문서를 흘려 심의위원들을 흔들 겁니다.”
시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끊지 않습니다. 상대가 만들어 둔 시간표 그대로 들어오게 둡니다.”
“함정을 그대로 밟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적이 파놓은 함정의 뚜껑을 열어 두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심의위원들과 투자사들이 직접 보게 만드는 겁니다.”
수요일 오후 2시, 루미너스 502호 대회의실.
문이 열리며 한성 캐피탈 김성태 대표가 들어왔다.
“강 대표. 방금 이상한 문건을 받았습니다.”
김성태가 테이블 위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오늘 오전 우리 한성 캐피탈 리스크팀으로 들어온 비공식 제보입니다. <투명한 그림자> 촬영장에서 중대한 안전사고가 발생했고 픽스온이 금요일 심의에서 루미너스의 지위를 뺄 예정이니 지급 보증을 즉시 철회하라는 권고였습니다.”
윤서연이 서류를 확인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노스윈 서버에 예약된 문서와 문맥이 완전히 일치합니다. 투자사를 먼저 흔들어 루미너스를 고립시키려는 수작입니다.”
김성태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블루스톤 파트너스 놈들에게 당할 뻔한 뒤로 신성 냄새가 나는 장난질에는 이골이 났습니다. 이런 찌라시에 흔들려 지급 보증을 뺄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하지만 금요일 픽스온 본사 심의에서 이 문건이 터져 나오면 보수적인 심의위원들이 동요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오기태가 노트북을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관할 경찰서와 전파관리소에서 조금 전 연락이 왔습니다. 화물역 세트 상공에 떴던 무허가 드론 조종자의 신원과 메모리카드를 확보했습니다.”
김성태의 눈이 커졌다.
“불법 드론을 잡았습니까?”
“맞은편 상가 옥상에서 조종하던 외주 영상업자였습니다. 노스윈 리스크로부터 현장의 혼란과 제작 중단 상황을 촬영해 달라는 조건으로 착수금을 받았더군요.”
오기태가 노트북을 빔프로젝터에 연결하자 4K 초고화질 항공 영상이 재생되었다.
드론 카메라는 계단실의 유리창과 열린 통로를 위에서 선명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상 안에는 혼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우진이 스태프들과 함께 비상구를 점검하고 적재 상자를 안전 구역 밖으로 옮기는 모습이 명확히 담겨 있었다. 그 뒤를 이어 계단실 중간참에서 유나린과 최지환이 완벽한 호흡으로 연기에 몰입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유나린의 떨리는 손끝과 문고리를 쥐는 순간의 긴장 그리고 최지환이 난간을 짚으며 상대를 지키듯 돌아서는 동작까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김성태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게 사고 현장입니까? 완전히 작품 홍보용 메이킹 필름이 아닙니까!”
시우가 미소를 지었다.
“상대는 루미너스가 우왕좌왕하는 장면을 찍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상이 증명하는 것은 완벽한 안전 수칙 준수와 주연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입니다.”
윤서연이 힘주어 덧붙였다.
“현장 안전 일지, 픽스온 정식 도면, 그리고 적이 직접 돈을 주고 찍어 준 이 4K 영상까지 합치면 그 어떤 허위 보고서도 힘을 쓸 수 없습니다.”
김성태가 시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루미너스가 판을 이렇게 완벽하게 짜 두었는데 내가 물러설 이유가 없지요. 끝까지 함께 갑니다.”
수요일 밤 11시 40분, 루미너스 501호.
중앙 모니터에는 픽스온 보안 감사실에 상주하는 박지은 팀장의 화상 화면이 떠 있었다.
“강 대표님. 픽스온 최고경영진 주재로 필드링크의 본사 메인 서버 접근 로그를 전격 동결했습니다.”
오기태가 화면을 분할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목요일 새벽 2시 30분 전송 시 필요한 최종 승인 토큰의 발급 IP를 추적했습니다. 필드링크 본사 7층 조명석 이사의 업무용 PC였습니다. 그리고 초안 템플릿을 보낸 발신지는 신성 엔터 자문 법인의 메일망이었습니다.”
결재선의 꼬리가 완벽하게 드러났다.
신성 엔터가 기획하고 노스윈이 조작 문서를 만들었으며 필드링크 조명석이 협력사 지위를 이용해 공식 심의망에 밀어 넣으려 한 것이다.
시우가 시계를 확인했다. 목요일 오전 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 팀장님. 지금 조명석 이사에게 긴급 보안 화상 소환을 거세요.”
잠시 후 분할 화면에 필드링크 조명석 이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박 팀장님? 이 야심한 시각에 감사실 호출이라니 무슨 일입니까? 문태성 건은 이미 사내 징계에 들어갔다고 했을 텐데요.”
박지은이 차갑게 화면을 띄웠다.
“조명석 이사님. 문태성 씨가 아니라 이사님 본인의 업무용 단말에서 발생한 전자 서명 때문에 부른 겁니다.”
조명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단말이라니요?”
시우가 화면 앞으로 다가앉았다. 서늘한 목소리가 흘렀다.
“조 이사님. 목요일 새벽 2시 30분 노스윈 서버에서 픽스온 투자심의망으로 자동 업로드되도록 예약된 루미너스_공동제작지분_재검토안_v1 파일의 최종 승인 토큰이 이사님의 PC에서 생성되었습니다.”
조명석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그건 외부 리스크 자문 업체에서 참고용으로 올리는 일상적인…….”
“일상적인 검토서에 발생하지도 않은 사고가 적혀 있습니까?”
시우가 화물역 완료 보고서와 조작 문건의 비교표를 화면에 띄웠다.
“문건에는 화요일 18시 12분에 배우들이 대피로를 이탈해 사고가 났다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정식 촬영 종료 시각은 18시 38분이었습니다. 사고는 없었고 정식 안전팀과 한이준 감독, 픽스온 현장 감독관의 서명이 들어간 무사고 완료 확인서가 존재합니다.”
조명석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착오가 아닙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사고를 미리 적어 두고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문서를 생성한 것은 명백한 사전 음해이자 업무방해입니다. 심지어 문서를 만든 서식 코드는 신성 엔터테인먼트의 전용 서식입니다.”
박지은이 쐐기를 박았다.
“조명석 이사님. 픽스온 법무팀은 지금 이 순간부로 필드링크와의 모든 협력 계약을 해지하고 사기 미수 및 업무방해 혐의로 형사 고소장을 접수합니다. 이 화상 회의의 모든 로그는 증거로 보존됩니다.”
조명석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목요일 새벽 2시 30분.
약속된 시각이 되자 노스윈 서버의 타이머가 깜박이며 파일 전송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파일이 도착한 곳은 픽스온 심의위원들의 개인 사서함이 아니었다.
픽스온 보안 감사실이 사전에 구축한 고립된 감사 샌드박스 서버였다.
타임스탬프와 함께 거대한 경고 메시지가 기록되었다.
‘위조 문서 격리 완료. 조작 로그 영구 봉인.’
박지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습니다. 내일 금요일 오전 투자심의위원회에는 이 조작 문건 대신 감사실의 전말 보고서와 한성 캐피탈의 확약서 그리고 드론 원본 영상이 공식 안건으로 올라갑니다.”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작품의 권리를 온전히 지켰습니다.”
화상 연결이 종료되고 대표실에는 깊은 정적이 찾아왔다.
같은 시각, 청담동 신성 엔터테인먼트 본사 18층.
구관모 전무는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보고가 이어졌다.
“……필드링크 조명석 이사가 픽스온 감사실에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노스윈 서버의 파일도 격리되었고 서식 코드까지 전부 털렸습니다.”
구관모의 손에 쥐인 크리스털 컵이 파르르 떨렸다.
“촬영장에 사고 하나 유도하지 못하고 서식 꼬리까지 잡혀?”
“루미너스 쪽에서 현장 안전 도면을 미리 확보해 동선을 바꿨고 상공의 드론 영상까지 역으로 확보했다고 합니다. 금요일 픽스온 투자심의는 루미너스의 30퍼센트 지분을 만장일치로 추인하는 분위기입니다.”
구관모는 들고 있던 컵을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하는 파편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강시우…… 로드 매니저 따위로 굴러먹던 놈이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거냐.”
구관모의 서늘한 눈빛 속에 처음으로 짙은 초조함이 번져 가고 있었다.
목요일 오전 8시 30분, 루미너스 사무실.
유나린과 최지환이 새 대본을 품에 안고 밝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유나린이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한이준 감독님께서 화물역 계단실 장면 가편집본을 보여주셨는데 분위기가 정말 압도적이었어요.”
최지환 역시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위험한 통로를 피해 계단실로 들어간 선택이 장면 전체의 긴장감을 살렸더군요. 오늘부터 이어지는 야외 로케이션 촬영도 준비를 마쳤습니다.”
시우는 밝은 표정의 두 배우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칼날이 회사를 노렸지만 그 칼날은 배우들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제작사 대표로서 시우가 지켜내야 할 약속이었다.
윤서연이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
“대표님, 픽스온에서 정식 공문이 도착했습니다. 금요일 투자심의에 앞서 루미너스의 공동 제작사 적격 판정이 사전 승인되었습니다. 대규모 지방 로케이션 제작비 집행도 전액 승인되었습니다.”
시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좋습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시우가 창밖의 찬란한 아침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바깥의 거센 외압은 루미너스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회사의 기틀을 더욱 단단하게 벼려 주는 담금질이 되었을 뿐이다.
“자, 다음 현장으로 갑시다.”
루미너스의 진짜 전진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