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33화: 시간표는 비어 있지 않다
토요일 오전 10시, 역삼동 주식회사 루미너스 501호 대표실.
대형 모니터에는 메이븐 애드가 작성한 대외비 문건이 떠 있었다.
‘L-02. 루미너스 소속 배우 브랜드 위험 관리안.’
윤서연이 문건의 세부 분석표를 짚었다.
“신우진 배우의 첫 방송 성공으로 L-01 문건이 막히자 곧바로 L-02가 집행되었습니다. 표적은 유나린 배우가 전속 모델로 있는 친환경 기초 화장품 브랜드 그린테라피입니다.”
오기태가 출력된 보고서 사본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린테라피는 6개월 단발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재계약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메이븐 애드가 그린테라피 경영진에게 이 보고서를 전달했어요. 핵심 논리는 하나입니다.”
오기태의 손가락이 붉은색 경고 표시가 붙은 항목을 가리켰다.
“유나린 배우가 픽스온 텐트폴 오리지널 <투명한 그림자>의 메인 주연으로 들어가면서 향후 5개월간 지방 및 해외 로케이션 촬영에 묶인다는 점입니다. 이 기간 동안 브랜드 팝업스토어나 시즌별 오프라인 프로모션 행사를 소화할 수 없어 계약 불이행 위험이 발생한다는 논리예요.”
윤서연이 덧붙였다.
“그린테라피 이사회에 속한 박상훈 전무가 이 문건을 근거로 재계약 보류 의견을 냈습니다. 계약 조항상의 ‘성실 프로모션 의무’ 위반 소지를 들며 월요일 오전 11시까지 명확한 일정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재계약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유나린이 조용히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6개월 전 1인 기획사 시절 좁은 사무실에서 처음 맺었던 화장품 광고였다. 유나린의 데뷔와 루미너스의 첫 자금 기반을 함께 닦아 준 소중한 브랜드였다.
“저 때문에 또 회사가 곤란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강시우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나린 씨 때문이 아닙니다. 상대는 배우의 작품 활동 자체를 리스크로 둔갑시켜 우리를 흔들려는 것뿐입니다.”
시우의 시야에 푸른빛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스타메이커 Lv.2: 브랜드 가치 및 프로젝트 시너지 분석]
- 대상 인물: 유나린 (배우 / 루미너스)
- 브랜드 신뢰도 및 친화 지수: S+
- 그린테라피 브랜드 성장 기여도: 초도 완판, 매출 280% 견인, 재구매율 78%
- <투명한 그림자> 글로벌 방영 연계 시너지: 94%
- 메이븐 애드 L-02 위험성 타당도: 18% (의도적 악의적 프레임)
상태창의 수치는 명확했다. 유나린의 가치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시우는 오기태를 바라보았다.
“기태 실장님, 메이븐 애드 쪽 작성자는 확인됐습니까?”
“박종민 이사입니다. 신성 엔터 전략기획본부 산하 경영 자문 법인에서 매달 비공식 자문료를 받아 온 계좌 흐름을 확인했습니다. 공식 고발용 증거로는 더 다듬어야 하지만 구관모 전무의 지시로 루미너스 배우들을 연쇄 타격하려는 정황은 확실합니다.”
“좋습니다. 프레임의 목적이 일정 공백이라면 우리는 그 일정표가 얼마나 꽉 차 있고 가치 있는지 보여 주면 됩니다.”
시우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가라앉았다.
일요일 오후 2시, 루미너스 502호 회의실.
탁자 위에는 <투명한 그림자>의 전체 프로덕션 타임테이블과 그린테라피의 연간 마케팅 캘린더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윤서연이 한이준 감독과의 조율 결과를 보고했다.
“한이준 감독님과 제작팀의 동의를 받았습니다. 다음 달 초 크랭크인 전까지 남은 일주일 동안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활용해 사계절 뷰티 필름과 고화질 지면 화보를 사전 제작할 수 있습니다. 루미너스 502호 스튜디오와 연계 촬영장을 이미 확보했습니다.”
“완벽합니다.”
시우가 화이트보드에 도표를 그렸다.
“기존 매니지먼트의 방식은 방송이 시작된 뒤 부랴부랴 쪼개기 일정으로 광고 행사를 맞추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 소속사가 아닙니다. 루미너스는 <투명한 그림자>의 30퍼센트 제작 지분을 가진 공동 제작사입니다.”
최지환과 신우진도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최지환이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보았다.
“시우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작사가 직접 스케줄을 통제하면 배우가 작품에 몰입하면서도 브랜드 퀄리티를 최상으로 뽑아낼 수 있죠. 저도 도울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신우진 역시 듬직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제 <블랙 아웃> 첫 방송 때도 대표님이 47초 장면을 지켜 주셨습니다. 나린 씨 광고도 우리가 반드시 지켜 냅니다.”
시우는 동료들의 든든한 시선을 받으며 제안서의 핵심을 정리했다.
“우리가 가져갈 카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촬영 전 사계절 뷰티 필름 사전 완비로 5개월 공백을 원천 차단한다. 둘째, <투명한 그림자> 극중 자연스러운 에피소드 연계를 통해 글로벌 PPL 효과를 극대화한다. 셋째, 픽스온 글로벌 런칭 시점에 맞춘 아시아 6개국 동시 독점 프로모션 권한을 패키징한다.”
윤서연의 눈이 반짝였다.
“단순한 일정 방어가 아니라 그린테라피의 해외 진출을 이끄는 글로벌 앰버서더 패키지군요.”
“그렇습니다. 상대가 만든 족쇄를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바꿉니다.”
월요일 오전 10시 30분, 강남구 그린테라피 본사 12층 대회의실.
회의실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테이블 상석에는 박상훈 전무가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마케팅팀 김지수 팀장이 굳은 표정으로 서류를 쥐고 있었다.
박상훈 전무가 메이븐 애드의 L-02 문건을 툭툭 쳤다.
“강 대표님,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우리 그린테라피는 이번 하반기 사활을 걸고 대규모 오프라인 팝업과 신제품 라인을 출시합니다. 그런데 유나린 배우가 5개월 동안 지방과 해외에 묶이면 현장 프로모션은 누가 뜁니까? 신성 엔터 쪽에서는 당장 투입 가능한 톱급 신인 패키지를 제안해 왔습니다.”
김지수 팀장이 다급하게 반박했다.
“전무님, 유나린 배우의 6개월 실적을 보셔야 합니다. 유나린 배우 기용 후 초도 물량이 3일 만에 완판되었고 재구매율은 78퍼센트에 달했습니다. 지금 모델을 교체하면 기존 충성 고객층의 반발이 큽니다.”
“실적은 과거의 일이야. 앞으로 5개월간 얼굴도 못 비추는 모델을 수억 원 주고 유지할 수는 없어.”
박상훈 전무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때 강시우가 준비해 온 두꺼운 바인더를 테이블 중앙으로 밀었다.
“박 전무님, 그 5개월이 비어 있다는 것은 메이븐 애드의 일방적인 왜곡입니다.”
박상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곡이라니요?”
“메이븐 애드가 제출한 보고서는 유나린 배우를 단순 피고용 모델로만 규정하고 작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루미너스는 <투명한 그림자>의 지분 30퍼센트를 보유한 공동 제작사입니다.”
시우가 화면에 프리 프로덕션 일정표와 비주얼 콘셉트 기획안을 띄웠다.
“크랭크인 전 다음 주 일주일간 4개 계절 테마의 프리미엄 뷰티 필름 12편과 고화질 화보를 사전 제작합니다. 5개월 동안 매달 새로운 콘셉트의 영상이 온·오프라인에 순차 공개될 것입니다. 공백은 단 하루도 생기지 않습니다.”
박상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전 제작이라 해도 현장 행사의 공백은 남지 않습니까?”
“그 공백을 메우고도 남을 진짜 기회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우가 다음 슬라이드를 넘겼다. 픽스온 글로벌 유통망과 그린테라피의 아시아 진출 로드맵이 완벽하게 맞물려 있었다.
“<투명한 그림자>는 픽스온을 통해 아시아 6개국을 포함한 전 세계 190개국에 동시 스트리밍됩니다. 루미너스는 공동 제작사 권한으로 그린테라피의 친환경 제품을 극중 인물의 시그니처 아이템으로 자연스럽게 녹여낼 것입니다. 드라마 방영 시점에 맞춰 현지 독점 프로모션 팝업을 열면 그린테라피는 국내 브랜드를 넘어 아시아 전역의 K-뷰티 대표 브랜드로 도약하게 됩니다.”
김지수 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전무님, 저희가 내년 상반기 목표로 하던 일본과 동남아 진출 계획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별도의 수십억 원 해외 마케팅 비용 없이 픽스온 글로벌 텐트폴에 직결되는 구조입니다.”
박상훈 전무는 시우의 제안서를 넘기며 말을 잇지 못했다.
상대 기획사가 가져온 제안은 단순한 모델 교체였지만 강시우가 가져온 제안은 회사의 미래 시장을 열어 주는 거대한 비즈니스 패키지였다.
시우가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참고로 메이븐 애드의 박종민 이사는 특정 대형 기획사로부터 지속적인 자문을 받아 온 인물입니다. 편향된 보고서에 흔들려 연 280퍼센트의 매출 성장을 견인한 최고의 파트너를 놓치시겠습니까? 아니면 루미너스와 함께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시겠습니까?”
회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박상훈 전무가 안경을 벗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강 대표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단순한 배우 매니저가 아니라 진정한 비즈니스 파트너를 몰라볼 뻔했군요.”
박상훈이 서류를 덮고 김지수 팀장을 돌아보았다.
“김 팀장, 기존 6개월 단발 계약서 폐기하세요. 2년 전속 APAC 글로벌 브랜드 앰버서더 계약서로 다시 작성해 오세요. 모델료는 최고 대우로 상향하고 해외 런칭 매출 인센티브 조항도 루미너스 안대로 넣으세요.”
김지수 팀장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월요일 오후 3시, 청담동 신성 엔터테인먼트 본사 18층 전략기획본부.
구관모 전무는 창밖을 내다보며 서늘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등 뒤에서 비서가 조심스럽게 보고서를 올렸다.
“전무님, 그린테라피 건 결과가 나왔습니다.”
“유나린이 하차하고 우리 쪽 신인이 들어갔나?”
“아닙니다. 그린테라피 측에서 유나린 배우와의 계약을 2년 전속 APAC 글로벌 앰버서더로 전격 격상 체결했습니다. 계약 규모도 기존의 세 배 이상으로 커졌습니다.”
구관모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떻게 된 거지? 5개월 일정 공백 리스크를 이사회가 그대로 받아들였단 말인가?”
“루미너스가 픽스온 오리지널의 30퍼센트 제작 지분을 이용해 사전 브랜디드 콘텐츠와 아시아 동시 진출 패키지를 묶어 역제안했다고 합니다. 메이븐 애드의 보고서 신뢰도 역시 클라이언트 측에서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구관모는 들고 있던 만년필을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강시우. 배우 뒤에 숨는 놈인 줄 알았더니 아예 제작사의 권한으로 판을 뒤흔들고 있군.”
구관모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신성의 막강한 자본과 인맥으로도 제작과 매니지먼트를 하나로 엮어 낸 루미너스의 철벽 구조를 뚫어 내기란 쉽지 않았다.
“메이븐 애드 라인은 전면 정리해. 더 이상 어설픈 광고 공작으로는 저놈들을 건드릴 수 없다.”
같은 시각, 역삼동 루미너스 501호 대표실.
정식으로 날인된 그린테라피 2년 전속 글로벌 앰버서더 계약서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유나린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서명란을 어루만졌다.
“대표님, 정말 꿈만 같아요. 1인 기획사에서 처음 시작할 때 썼던 계약서가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어요.”
강시우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나린 씨가 매 순간 진심으로 연기하고 대중에게 신뢰를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입니다. 이제 편의점 알바생 유나린이 아니라 아시아가 주목하는 배우 유나린입니다.”
최지환과 신우진, 윤서연, 오기태가 모두 박수를 보냈다.
신우진의 <블랙 아웃> 첫 방송 성공에 이어 유나린의 대형 글로벌 계약까지 완벽하게 성사되었다. 외부의 악의적인 음해와 공작은 루미너스의 단단한 시스템 앞에서 번번이 거대한 기회로 치환되고 있었다.
윤서연이 태블릿을 확인하며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대표님, <투명한 그림자> 제작팀에서 최종 연락이 왔습니다. 크랭크인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대망의 첫 촬영 슬레이트가 올라갑니다!”
시우가 창밖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결연하게 주먹을 쥐었다.
“좋습니다. 이제 진짜 현장으로 갑시다.”
루미너스의 배우들이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판 위에서 첫 번째 카메라를 마주할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