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로 귀환한 절대마법사

15화: 뜻밖의 단서
가람동 외곽의 저녁 하늘은 매캐한 냄새로 물들어 있었다.
가람동 6구역 균열 현장에서 빠져나온 지 세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민아의 승합차 안에는 협회 단말의 경보음이 끊이지 않고 울렸다.
"협회 민원 서버에 올린 현장 영상 조회수가 벌써 삼만을 넘겼어요."
민아가 운전대를 잡은 채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했다.
"생존자 진술서와 아레스 단말의 유도 결 기록도 정식 접수 번호가 나왔어요. 서도현도 협회 감사팀 앞에서는 이번 일을 단순 정화 사고로 덮기 어려울 거예요."
진우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둠이 깔린 언덕 너머로 3층 높이의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 보였다. 아레스 길드 가람 지부 복합 관리 기지였다.
건물 외벽에는 감시 카메라와 마력 감지 센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정문 앞에는 검은 방호복을 입은 보안 요원들이 분주하게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놈들이 바쁘게 움직이는군."
"네. 협회에서 현장 조사 공문이 내려가자마자 문서 파기 트럭을 불렀다는 제보가 들어왔어요."
민아가 태블릿 화면을 진우 쪽으로 돌렸다.
"가람 지부 지하 2층에는 대격변 초기부터 모아 둔 특수 이관 문서 보관실이 있어요. '3-임시' 표식이 붙은 원본 대장도 저곳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하지만 감사관이 도착하기 전에 전부 소각기에 집어넣을 생각인 것 같아요."
"시간이 없다는 뜻이군."
"정문으로 들어가면 시간을 끌 수 있어요. 제가 푸른하늘 길드 명의로 긴급 증거 보전 신청서를 들고 서도현을 대면할게요. 정문에서 협회 조사관이 올 때까지 실랑이를 벌이면 진우 씨가 뒤로 들어갈 틈이 생길 거예요."
민아의 눈빛은 단단했다. 진우는 그녀의 손에 쥐어진 협회 공문을 보았다.
"위험할 수 있다."
"가람동 균열에서 사람들을 구해 준 건 진우 씨였어요. 부모님을 찾는 일이라면 저도 물러서지 않아요."
진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은 피우지 않는다. 기록만 찾아 나오겠다."
"조심하세요. 기지 내부에는 헌터용 마력 감지망이 깔려 있어요. 강한 스킬을 쓰면 바로 비상벨이 울려요."
"걱정하지 마라."
진우는 차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기지 외벽에 접근하자 차가운 철조망과 마력 감지선이 얽힌 결계가 나타났다.
진우는 손끝을 들어 감지선의 파동을 짚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맥동하는 미세한 전류와 마나의 흐름이었다.
코어 안쪽에서 묵직한 통증이 스쳤다. 균열에서 연속으로 룬을 비튼 후유증이었다. 진우는 호흡을 고르며 마나를 아주 얇게 실처럼 뽑아냈다.
1서클 응용 마법, 잔향 흐리기.
감지선이 진우의 마력을 인식하기 직전 파동의 주파수를 공기 중의 자연 마나와 같은 결로 맞추었다. 삐걱거리던 감지 센서의 붉은 불빛이 파란색으로 바뀌며 침묵했다.
진우는 소리 없이 담장을 넘어 환기 통로 외벽에 붙었다.
정문 쪽에서 민아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푸른하늘 길드 소속 최민아 헌터입니다! 협회 긴급 증거 보전 명령에 따라 아레스 가람 지부의 문서 반출을 전면 중지할 것을 요청합니다!"
정문 초소에서 서도현이 보안 요원들을 대동하고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서도현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최민아 헌터. 하위 길드가 협회 완장을 차고 남의 지부에 행패를 부리는 모양인데 여긴 정당한 자산 정리 구역입니다."
"사고 현장의 생체 반응 유도 기록과 3-임시 대상자 명단이 이 안에 있다는 진술을 확보했습니다. 지금 반출하는 상자들을 감사관 입회 하에 전수 조사해야 합니다!"
서도현과 민아의 날 선 공방이 시작되자 정문의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환기구 덮개의 나사를 마력으로 푼 진우는 미끄러지듯 통로 안으로 몸을 던졌다. 좁고 어두운 금속 통로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통로 아래쪽에서 거친 숨소리와 상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움직여! 3-임시랑 대격변 이송 대장부터 2호 소각로에 처넣어!"
"서 반장님이 정문에서 시간 끌고 있을 때 끝내야 합니다."
보안 요원 둘이 굵은 자물쇠가 달린 철제 상자를 수레에 싣고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상자 표면에는 붉은 페인트로 '에테르 1차'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진우는 천장 통로에서 내려다보며 차갑게 눈을 빛냈다.
'에테르.'
11화에서 찢긴 이관 대장 원본에서 읽어 냈던 그 단어였다. 부모님의 이름 옆에 짓눌려 있던 바로 그 압인의 정체였다.
보안 요원들이 수레를 밀고 들어간 곳은 복도 끝의 특수 문서 보관실이었다.
방 안에는 거대한 산업용 고열 파쇄기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붉은 불꽃이 파쇄기 투입구 안쪽에서 뿜어져 나왔다.
"상자 열어. 첫 번째 묶음부터 던져."
보안 요원이 철제 상자의 래치를 풀고 두꺼운 서류철 한 묶음을 꺼냈다. 종이 뭉치가 파쇄기 투입구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진우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2서클 응용 마법, 소리 차단막.
파쇄기의 굉음과 방 안의 모든 공기 진동이 일순간 진공 상태처럼 멎었다.
"어……?"
보안 요원이 고개를 든 순간 진우의 그림자가 그의 뒤로 떨어졌다.
진우의 손끝이 요원의 목덜미 뒤 마력 순환점을 짚었다.
수면의 결.
강한 충격도 소리도 없었다. 사내의 동공이 풀리며 스르륵 바닥으로 쓰러졌다. 옆에 서 있던 다른 요원이 놀라 허리춤의 마력 권총을 뽑으려 했다.
진우는 손을 튕겨 요원의 손목을 가볍게 쳤다. 권총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고 진우는 다른 손으로 그의 가슴팍에 마나를 흘려 신경을 마비시켰다.
쿵 소리조차 나지 않고 두 명의 보안 요원이 바닥에 얌전히 눕혀졌다.
진우는 파쇄기 투입구에 걸쳐 있던 서류철을 낚아챘다. 그리고 철제 상자 안에 가득 찬 서류들을 빠르게 넘겼다.
누렇게 바랜 종이들 위로 대격변 초기 날짜들이 빼곡했다.
[대격변 2년 차 특수 연구 인력 이관 보고서]
[관리 분류: 3-임시 특수 자원]
[프로젝트 코드명: 에테르(Ether)]
진우의 손가락이 서류의 한 페이지에서 굳어졌다.
[대상자 07: 강성태 (차원물리연구소 책임연구원 / 공간 균열 마나 파동 제어식 설계)]
[대상자 08: 이혜숙 (차원물리연구소 선임연구원 / 차원 결계 응축 및 안정화 수식)]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증명사진 속 부모님의 젊은 얼굴이 진우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백 년 전 아르카디아로 떨어지기 직전 보았던 바로 그 다정한 얼굴들이었다.
서류 하단에는 붉은색 도장과 함께 메모가 적혀 있었다.
'1차 안정화 제어식 도출 완료. 본 연구의 성과는 일반 게이트 억제가 아닌 차원 통로 강제 확장 및 에테르 핵 추출에 필수적임. 대상자들은 비공개 특별 연구 구역(심부 관측소)으로 강제 배속함.'
'승인: 천공(天空) 특수사업팀.'
'주의: 대상자들의 연구 협조는 강제 유지 중이며 외부 실종 처리 및 전산 데이터 영구 봉쇄 조치함.'
진우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부모님은 게이트의 재앙 속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다.
차원 균열을 막고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연구하던 부모님의 지식을 탐낸 자들이 두 사람을 납치해 강제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국내 1위 길드인 천공의 이름 아래서.
"살아 계셨군요."
진우의 입술 사이로 낮고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 년의 전쟁을 버티며 가슴속에 품었던 유일한 소망.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믿었던 허탈함 뒤에 비로소 선명한 실체가 드러났다.
부모님은 살아 있다. 어딘가의 차원 연구 시설에 갇혀 지금도 싸우고 있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보안 요원의 무전 단말에서 날카로운 잡음이 터졌다.
치지직.
- 가람 지부 응답하라. 지하 2층 문서 파쇄 완료되었는가?
서도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훨씬 굵고 쇳소리가 섞인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 본부 긴급 하달이다. 가람동 6구역에서 우리 전투조를 박살 낸 놈이 지부로 접근했을 가능성이 있다. 놈의 이름은 강진우. E급 임시 등록자다.
무전기 너머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강태호 헌터님. 지금 출발하셨습니까?
그래. 방금 본부 차량으로 올림픽대로를 탔다. 강태문 그 한심한 놈이 E급 애송이 하나한테 장비를 털리고 징징대더군. 내 손으로 직접 찢어서 게이트에 던져 넣겠다. 문서 파기가 끝나면 지부 전 구역을 봉쇄하고 기다려라.
강태호.
아레스 길드의 핵심 무력이자 A급 상위 랭커.
진우는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사내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삐이이익-!
그 순간 기지 전체에 붉은 비상 경보등이 켜졌다.
정문 쪽에서 서도현의 고함과 함께 기지의 방폭 셔터가 내려가는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지하 2층 보안 신호가 끊겼다! 셔터 전부 내리고 지하 통로 봉쇄해!"
진우는 서류철 원본과 '에테르 프로젝트' 관련 핵심 일지를 품 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남은 상자 속의 불필요한 장부들에 손을 얹었다.
1서클 점화 마법.
미세한 불씨 하나가 파쇄기 내부로 빨려 들어가며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남은 찌꺼기들이 타오르며 아레스가 조작하려던 흔적들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진우는 파쇄실 천장의 비상 배기구를 향해 몸을 띄웠다.
마력의 결을 발끝에 모아 벽을 차자 굳게 닫혀 있던 배기구 철망이 찌그러지며 열렸다. 진우는 순식간에 배기관을 타고 지상으로 솟구쳤다.
기지 뒤편의 어두운 숲속으로 착지한 진우는 기지 건물을 돌아보았다.
창문마다 붉은 경보등이 번쩍이고 있었고 보안 요원들이 허둥지둥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정문에서는 방폭 셔터가 닫히기 직전 민아가 푸른하늘 승합차를 후진시켜 안전지대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진우는 기지 외곽의 도로변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골목 모퉁이에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가 진우의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 문이 열리며 민아가 다급하게 손짓했다.
"진우 씨! 타세요!"
진우가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차는 부드럽게 가속하며 가람동 도로를 빠져나갔다.
백미러 너머로 아레스 지부 기지의 사이렌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어요?"
민아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다치지 않았다."
진우는 품에서 꺼낸 두꺼운 서류철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에테르 프로젝트'라는 글자와 부모님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본 민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건……."
"부모님의 기록이다."
진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돌아가신 게 아니었다. 대격변 직후 연구 성과 때문에 강제로 끌려가셨다."
"세상에…… 그럼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 계신다는 뜻인가요?"
"그렇다."
진우는 서류 상단에 찍힌 '천공'의 인장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아레스는 단순한 하청이자 관리자에 불과했다. 부모님을 가두고 차원의 힘을 착취하는 거대한 배후는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아레스에서 사냥꾼을 보냈다."
"네? 사냥꾼이요?"
"강태호라는 사내다. 본부에서 직접 나를 처리하러 오고 있다."
민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강태호…… 아레스 길드의 간부이자 A급 공격대장이에요. 강태문의 사촌 형인데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아요. 그자가 직접 움직였다면 진우 씨를 죽이겠다는 뜻이에요."
민아의 떨리는 목소리에도 진우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진우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빌딩 숲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길을 막는 사냥꾼의 목을 꺾어야 했다.
"오라고 해라."
진우가 낮게 읊조렸다.
손끝에 닿은 서류의 감촉이 서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