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화된 지구에 세계수를 심었습니다

1화: 씨앗은 폐허에서 숨을 쉰다
회색비가 연구소 지붕을 두드렸다.
윤서린은 방진복 목깃을 조였다. 왼쪽 필터의 교체 경고등이 붉게 깜빡였다. 계기판의 숫자는 열세 분을 남겨 두고 있었다.
열세 분 뒤면 보존실의 공기 순환이 멈춘다.
서린은 손목 단말기에 남은 전력을 확인하고 복도를 달렸다. 회색비가 시작된 뒤 열두 해 동안 폐종자 연구소는 사람 대신 먼지를 보존해 왔다. 전기가 끊긴 뒤에도 씨앗을 지키던 냉각 장치는 이제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었다.
천장의 배관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바닥의 검은 가루와 섞여 기름처럼 번졌다. 방사성 먼지가 녹은 물이었다.
서린은 보존실 문 앞에서 멈췄다. 안쪽 선반에는 봉인 화분 네 개가 남아 있었다. 세 개는 투명한 용기 안에서 갈색으로 썩어 있었다.
마지막 화분만 달랐다.
작은 밀봉 용기 안에 마른 흙이 담겨 있었다. 흙 한가운데에 검은 씨앗 하나가 놓여 있었다. 라벨에는 오래된 필체가 남아 있었다.
‘열지 말 것.’
서우의 글씨였다.
서린은 손가락으로 라벨을 쓸었다. 그 순간 보존실 천장에서 경보음이 터졌다. 물이 문틈으로 밀려들었다.
“서우야.”
대답은 없었다.
서린은 화분을 품에 넣고 보존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안쪽 단말기 하나가 자동으로 켜졌다.
“누나가 또 늦었네.”
서우의 목소리였다.
서린의 발이 굳었다.
“이번에는 꼭… 살아서 나와.”
녹음은 거기서 끊겼다. 회색비가 연구소 외벽을 후려쳤다. 보존실 안쪽의 유리창이 하얗게 흐려졌다.
서린은 재생 버튼을 다시 누르지 않았다. 대신 화분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비상 통로 끝에서 금속문이 열렸다. 밖에는 강도윤이 서 있었다. 낡은 구조 헬멧 위로 방수포가 씌워져 있었고 왼쪽 무릎 보조기가 빗물에 젖어 있었다.
“열세 분 남았어.”
“알아.”
도윤의 시선이 화분으로 향했다.
“그건 버려.”
“안 돼.”
“사람을 옮기기도 빠듯해. 역까지 삼백 미터야. 방진 장비 하나가 더 필요해.”
서린은 화분을 내려다봤다. 씨앗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죽은 것처럼 매끈하고 검었다.
“이게 마지막 종자일 수도 있어.”
“죽은 종자를 들고 가다 네가 죽으면 아무것도 못 심어.”
“그래서 내가 가져가.”
서린은 비상 보관함에서 손수레를 꺼냈다. 도윤은 말없이 손수레의 고정끈을 풀었다. 화분을 올리고 방수포를 덮는 손길이 거칠었지만 끈을 묶는 매듭은 정확했다.
두 사람이 외벽 통로로 나왔을 때 멀리서 철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연구소 뒤편을 돌던 약탈단의 흔적이었다. 낡은 타이어 자국이 진흙 위에서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도윤이 손을 들었다.
“큰길은 안 돼.”
“폐수로로 가자.”
서린이 먼저 말했다.
도윤이 그녀를 보았다.
“물이 차 있을 텐데.”
“그래도 시야가 가려져.”
“좋아. 내가 앞을 본다.”
“뒤는 내가 맡을게.”
폐수로 입구에서 한이안이 튀어나왔다. 열여섯 살 소년은 낡은 표본 상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은회색 눈동자가 화분을 훑었다.
“그거 연구소에서 가져온 거예요?”
“길 막지 마.” 도윤이 말했다.
이안은 대답 대신 화분 가까이 손을 가져갔다. 그의 팔에 난 잎맥 같은 반점이 순간적으로 떨렸다. 이안은 소매를 끌어내려 반점을 가렸다.
“폐수로 안쪽에 균사가 부풀었어요. 왼쪽 벽은 밟으면 무너져요.”
“어떻게 알아?”
“냄새가 다르니까.”
도윤이 앞을 살폈다. 서린은 이안의 표본 상자를 한 번 보았지만 묻지 않았다.
“길을 아는 사람이 필요해. 따라와.”
세 사람은 폐수로 안으로 들어갔다.
무릎까지 찬 물에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검은 막이 갈라졌다. 독기가 방진복 틈을 찾듯 달라붙었다. 도윤은 구조용 봉으로 앞의 천장을 두드렸다. 이안은 벽에 난 하얀 균사가 어느 방향으로 기울었는지 확인했다.
“앞에 갈림길이에요. 오른쪽은 막혔고 왼쪽은 역으로 이어져요.”
그때 뒤에서 철판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도윤이 돌아섰다. 폐수로 입구의 어둠 사이로 손전등 세 개가 흔들렸다. 사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빗물에 젖은 무전기 잡음만 가까워졌다.
“빨리.”
도윤이 손수레를 밀었다. 수레 바퀴 하나가 깨진 배관에 걸렸다. 화분이 기울었다.
서린은 즉시 화분을 품에 안았다. 도윤은 손수레를 버리고 앞쪽 배관을 붙잡았다. 천장의 콘크리트 조각이 그의 어깨 옆으로 떨어졌다.
“놔요!” 이안이 소리쳤다.
“역까지 열다섯 걸음.”
도윤은 이를 악물고 배관을 밀어 올렸다. 서린이 화분을 들고 먼저 통과했다. 이안은 뒤에 남아 균사가 가득한 벽을 표본 상자로 두드렸다.
“여긴 곧 막혀요. 지금!”
세 사람은 역의 관리 통로로 뛰어들었다. 바로 뒤에서 폐수로 천장이 무너졌다. 약탈단의 빛이 먼지 너머로 사라졌다.
지하철역은 오래전에 승객을 잃었다. 무너진 승강장 한쪽에만 흙이 드러나 있었다. 선로 아래에서 물이 스며 나오고 그 위로 잿빛 포자가 떠다녔다.
서린은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을 흙에 대자 감각이 밀려왔다. 독성은 깊이 삼십 센티미터까지 내려가 있었다. 물은 위쪽에서 선로를 따라 흘렀고 흙은 그 물을 머금은 채 굳어 있었다.
“여기라면 뿌리가 물길을 잡을 수 있어.”
“뿌리?” 도윤이 물었다.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씨앗이 살아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다만 이곳이 연구소보다 오래 버틸 수 있는 흙이라는 사실만 알았다.
그녀는 화분의 봉인을 열었다.
마른 흙 사이에서 검은 씨앗이 굴러 나왔다. 씨앗은 차갑지 않았다. 서린의 손가락이 닿자 아주 약한 열이 번졌다.
이안의 팔 안쪽이 다시 떨렸다.
“누나. 그거 가까이서 보지 마요.”
“왜?”
“몰라요. 그냥… 안쪽에서 뭔가 깨어나는 느낌이라서.”
서린은 씨앗을 흙에 올렸다. 물통을 꺼내자 도윤이 손목을 잡았다.
“얼마나 남았지?”
“삼백 밀리리터.”
“그걸 전부 부으면 네가 마실 물이 없어.”
서린은 물통을 기울였다. 물이 흙 위로 떨어졌다.
“이건 마실 물이 아니야.”
“서린.”
“아직 누구도 이 씨앗을 믿지 않아. 나도 그래. 하지만 심지 않으면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어.”
물이 절반쯤 스며들었을 때 씨앗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린은 남은 물을 모두 부었다. 그리고 장갑을 벗었다.
“손 떼.”
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조금만 더.”
맨손이 젖은 흙을 눌렀다. 차가운 감각이 손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동시에 체온이 빠져나갔다. 손끝부터 감각이 둔해졌다.
씨앗 표면에 가느다란 금이 갔다.
금 사이에서 검은 실뿌리가 나왔다. 실뿌리는 흙을 파고들지 않았다. 먼저 흙 속의 검은 물방울을 빨아들였다. 공기에서 쇠 냄새가 짙어졌다.
서린의 머릿속에 서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열두 살 겨울에 서우가 창가에서 웃고 있었다. 귤 껍질을 길게 벗겨 누나의 손목에 감던 장면이었다. 서린은 그 얼굴의 눈썹 모양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썹 끝이 흐려졌다.
“안 돼.”
서린은 손을 떼려 했다. 흙 속 실뿌리가 손바닥을 붙잡았다.
서우의 얼굴이 더 희미해졌다. 대신 씨앗 안쪽에서 누군가 숨을 쉬는 소리가 났다.
“서린.”
서우의 목소리 같았다. 그러나 녹음에서 들었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너무 가까웠고 너무 비어 있었다.
서린은 이를 악물었다.
“그 이름으로 나를 붙잡지 마.”
그녀는 손을 놓지 않았다. 잃을지도 모르는 기억보다 지금 눈앞의 흙을 선택했다.
도윤이 무너진 배관을 찾아 달려갔다. 선로 위쪽에서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구조용 봉을 배관 틈에 끼우고 어깨로 받쳤다.
“서린! 물길이 바뀐다!”
“이안. 흙 가장자리에 돌을 세워.”
“제가요?”
“네가 균사를 봤잖아.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 말해 줘.”
이안은 잠깐 멈칫했다. 그가 표본 상자를 내려놓고 선로 옆 자갈을 주워 나르기 시작했다.
“여기는 막으면 안 돼요. 오른쪽으로 빼야 해요.”
“도윤. 들었지?”
“들었다.”
세 사람의 움직임이 맞물렸다. 도윤이 배관을 붙잡는 동안 이안은 물길을 틀었고 서린은 씨앗 위의 흙을 눌렀다.
금이 벌어졌다.
검은 줄기 하나가 올라왔다. 줄기는 손가락만큼 가늘었고 잎은 손톱보다 작았다. 하지만 잎이 펴지는 순간 승강장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쓰린 냄새가 옅어졌다.
서린은 헛기침을 했다. 목 안쪽을 긁던 독기가 잠시 물러났다. 도윤이 방진 마스크를 벗어 계기판을 보았다. 수치는 아주 조금 내려가 있었다.
“몇 걸음까지?”
“모르겠어.”
서린은 손을 바라봤다. 손바닥에 검은 흙이 묻었고 최근의 따뜻한 기억 하나가 비어 있었다. 서우가 귤 껍질을 어디에 버렸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은 남아 있었지만 손목에 감긴 껍질의 감촉은 사라졌다.
첫 잎의 맥 한 줄기가 어둡게 변했다.
“이게 대가야?” 이안이 물었다.
“아직 몰라.”
서린은 잎을 만지지 않았다. 씨앗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전부 알 수 없었다. 다만 정화가 공짜가 아니라는 것만 알았다.
역 입구 바깥에서 금속을 긁는 소리가 났다.
도윤이 즉시 손전등을 껐다. 어둠 속에서 무거운 발굽이 바닥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도윤은 서린 앞에 섰다.
“괴수다.”
서린은 첫 잎을 손으로 가리지 않았다.
“공격할 생각이면 벌써 들어왔어.”
“그걸 어떻게 알아?”
“모르겠어. 하지만 저 잎을 숨기면 우리가 먼저 이 장소를 포기하는 거야.”
네 번째 발굽 소리가 울렸다. 역 입구의 검은 안개 사이로 뿔이 보였다. 사슴을 닮은 머리였지만 몸집은 승강장 기둥만 했다. 검은 뿔 사이에는 이끼와 작은 잎이 자라 있었다.
괴수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앞발로 기둥 아래를 길게 긁었다. 콘크리트가 갈라지며 젖은 흙이 드러났다.
그 뒤로 물이 고인 선로 쪽에 발자국 세 개가 찍혔다.
이안이 숨을 죽인 채 말했다.
“저건… 길을 보여 주는 걸까요?”
괴수는 고개를 들었다. 잎이 난 뿔이 첫 잎을 향했다가 선로 쪽으로 돌아갔다.
서린은 그 움직임을 기록할 연필을 찾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괴수의 의도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다만 물길과 영역을 표시하고 있다는 추측은 할 수 있었다.
그때 역 안쪽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한 번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숨을 삼키는 소리였다. 소리는 첫 잎이 만든 좁은 공기 바깥에서 들려왔다.
도윤이 서린을 보았다.
“밖에 사람이 있어.”
서린은 첫 잎과 어둠 사이의 거리를 재었다. 아직 안전 구역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작았다. 그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기침 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린은 자신의 빈 기억을 손으로 누르고 일어섰다.
“이안. 물통을 세어.”
“왜요?”
“사람을 데려와야 하니까.”
도윤이 역 입구의 괴수를 돌아봤다. 괴수는 여전히 떠나지 않고 선로 옆 물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린은 첫 잎을 향해 몸을 돌렸다.
폐허에서 처음으로 초록이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숨을 따라 누군가가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