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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균열의 징후
시우는 의자 등받이에서 손을 떼려다 멈췄다.
손끝이 아직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을 짓누르던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관자놀이 깊은 곳에는 둔한 맥박이 남았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뇌파 케어를 연결할까요?"
테이블 옆으로 돌아온 웨이터의 몸체에 푸른 원이 켜졌다. 시우는 그 빛에서 눈을 돌렸다.
"필요 없어."
"불편을 참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우는 대답하지 않고 일어났다. 방금 본 것이 통증과 함께 사라진다면 자신은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까. 민호에게 묻던 질문조차 쓸데없는 생각으로 여기게 될지 몰랐다.
[인증 코드 호환 확인: 관리자 백도어 스크립트 가동 중]
붉은 문장이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시우는 손을 허리 아래로 내린 채 민호가 사라진 기둥 사이로 걸어갔다.
세미나장은 스카이 가든과 유리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꽃이 만발한 화단 위로 느긋하게 걷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겹쳤다. 회랑 끝에서 푸른 슈트가 보였다.
민호는 안내판 아래에 서서 패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민호야."
"마음 바뀌었어? 같이 들으려고?"
"네 기획안 좀 다시 보려고."
민호는 반갑게 패드를 돌렸다. 화면 위에는 영상의 작은 미리보기와 함께 안내문이 떠 있었다.
[창의성 재충전 모듈: 원본 정리 예약]
[실행 예정 13:00]
"정리라니?"
"탈락한 안을 남겨 두면 새 작업에 방해된대. 세미나 시작할 때 비워 주기로 했어."
민호가 손가락으로 안내문을 밀어 올렸다. 영상 제목은 「비가 그친 자리」였다. 시우는 곧바로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몇 달을 만들었잖아."
"덕분에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지."
"그럼 지우기 전에 끝부분만 들려줘."
민호는 회랑 옆 대기석으로 걸어갔다. 시우도 따라 앉았다. 유리문 안에서는 흰 옷을 입은 직원이 세미나 참석자들에게 잔을 나눠 주고 있었다.
패드에서 좁은 골목이 펼쳐졌다.
비는 그쳤지만 처마 끝에서는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 방울은 금속 난간을 때렸고 다음 방울은 난간을 벗어나 바닥에 닿았다. 밝은 소리와 둔탁한 소리가 어긋나며 이어졌다.
화면 속 골목에는 사람이 없었다. 시우는 영상보다 민호를 보았다. 민호의 엄지가 패드 모서리의 작은 홈을 문지르고 있었다.
"이 소리 그대로 남겼네."
"응."
"추천받은 소리는 따로 있지 않았어?"
민호가 화면을 눌렀다. 가지런한 간격으로 떨어지는 맑은 물소리가 흘렀다. 몇 번을 들어도 같은 높이였다. 그는 곧 원래 소리로 돌렸다.
"이걸로 바꾸라는 제안이 있었지."
"그런데 안 바꿨네."
"저게 들어가면 골목이 아니라 대기실 같아서."
민호가 짧게 웃었다. 카페에서 지었던 웃음보다 작았다. 시우는 패드를 사이에 두고 몸을 조금 기울였다.
"난 네가 남긴 쪽이 좋은데."
"끝까지 봐야 차이를 알아. 대부분 중간에 넘겼어."
"끝까지"라는 말에서 목소리가 낮아졌다. 민호가 재생 위치를 조금 뒤로 옮겼다.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기 전의 고요가 길게 흘렀다.
"여기 기다리는 길이만 열두 번 바꿨어. 너무 짧으면 아무도 멈춰서 듣지 않더라. 길면 지루하고."
시우는 기다렸다. 작은 소리가 난간을 울린 뒤 영상은 검게 닫혔다. 민호는 검은 화면에서도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그럼 보관해 둬. 다시 쓸 수 있잖아."
"모듈은 새로 시작하는 게 낫대."
"모듈 말고 네가."
민호의 엄지가 멈췄다.
"나는……."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검게 변한 화면을 바라보았다. 눈썹 사이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사실 좀 아까워. 그 소리를 들으면 아직……"
말끝에 가느다란 잡음이 섞였다.
시우는 패드의 음량 표시를 확인했다. 영상은 끝났고 재생 막대도 움직이지 않았다. 잡음은 민호의 목에서 나왔다.
민호의 입술이 같은 모양으로 두 번 벌어졌다. '아직'이라는 음절이 겹쳤다. 민호의 입은 다물어졌는데 유리에 비친 입술은 아직 벌어져 있었다. 반사된 윤곽이 잘게 떨리더니 제자리로 붙었다.
"민호야?"
시우가 손목을 잡았다. 손끝에 힘줄이 팽팽하게 닿았다.
민호는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푸른빛이 동공을 가로질렀다.
민호의 얼굴에서 눈썹 사이의 주름이 사라졌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패드를 쥔 손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얼굴은 조금 전보다 밝게 웃고 있었다.
[감정 조율 완료]
[쾌적한 창작 상태로 복귀했습니다.]
패드 위에 푸른 안내창이 나타났다. 시우는 민호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던 거야?"
"무슨 말?"
"그 소리를 들으면 아직 뭐?"
"그런 말 했어? 오늘 정말 기분 좋은데."
민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까지 자연스러웠다. 손목의 힘줄이 뒤늦게 느슨해졌다.
시우는 유리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잠깐만요. 여기 사람이 이상해요."
잔을 나눠 주던 직원이 다가왔다. 시우는 민호를 가리켰다.
"말하다가 멈췄어요. 얼굴도 겹쳐 보였고요. 지금 조율을 끌 수 있습니까?"
직원은 민호에게 시선을 맞췄다.
"불편하신 곳이 있나요?"
"전혀요. 친구가 걱정이 많네요."
민호가 웃자 직원도 따라 웃었다.
"완료 안내가 나왔네요. 여기서는 진행 중인 요청만 중단할 수 있습니다."
"완료됐다는 게 문제예요. 하던 말도 못 끝냈잖아요."
"잠시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우에도 원활하게 회복하실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직원은 시우의 손으로 눈길을 내렸다. 민호가 팔을 가볍게 당겼다.
"시우야. 놓아도 돼. 나 괜찮다니까."
친구의 얼굴에는 불만도 두려움도 없었다. 시우는 손가락을 하나씩 풀었다. 민호의 손목에는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직원이 물 한 잔을 내밀었다. 잔 바깥의 물기는 손이 닿기 전에 사라졌다.
"동행하신 분도 잠시 쉬시면 좋겠습니다."
시우는 잔을 받지 않았다. 직원이 다시 세미나장으로 돌아갔다. 문이 열리는 동안 안쪽에서 부드러운 음악이 새어 나왔다. 대기석의 다른 사람들은 누구도 이쪽을 보지 않았다.
"아까 아깝다고 했잖아."
시우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건 아직 정리가 안 됐을 때였겠지. 지금은 괜찮아."
"네가 남겨 둔 물소리인데."
"네가 좋다면 좋은 거야. 나는 이제 새 작품을 만들고 싶어."
민호는 그 소리를 남겼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잠깐 찌푸렸던 얼굴을 자기 얼굴로 인정하지 않았다.
시우는 다시 영상을 틀려다 손을 멈췄다. 같은 질문으로 같은 표정을 끌어내면 푸른 빛이 또 지나갈지도 몰랐다. 친구를 흔들어서 확인하는 일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패드의 푸른 안내창이 닫혔다. 그 밑에 원본 정리 예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삭제만 미뤄 줘."
시우가 말했다.
"하루면 돼. 네가 내일도 필요 없다고 하면 그때 지워."
민호는 시우를 잠시 바라보다 패드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왜 굳이? 정리 예약도 내가 선택한 거야."
시우는 입을 다물었다. 민호가 스스로 동의한 예약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동의가 어느 순간의 민호에게서 나온 것인지 시우는 알 수 없었다.
민호가 손을 뻗어 시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신경 써 주는 건 알아. 나 때문에 속상해할 필요 없어."
위로받아야 할 친구가 시우를 위로하고 있었다. 시우는 그 손을 붙들지 않았다.
문 위에 입장 안내가 켜졌다. 직원이 세미나 참석자들을 안으로 불렀다. 민호도 자리에서 일어나 패드를 팔 안쪽에 끼웠다.
"나 이제 들어갈게. 끝나고 연락할게."
"패드 좀 맡겨 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볼게."
민호는 잠깐 망설이다 패드의 공유 메뉴를 열었다. 화면에 시청 권한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예약은 그대로 둬. 이미 준비해 둔 걸 다시 바꾸고 싶지는 않아."
"알았어."
시우가 받은 패드는 따뜻했다. 민호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이 건넨 잔을 받아 들면서도 한 번 뒤돌아 웃어 주었다. 유리문이 닫히자 음악은 들리지 않았다.
시우는 대기석에서 일어나 회랑 끝 창가로 갔다. 민호의 패드를 내려놓을 수 있는 좁은 선반이 있었다. 화면에서 원본 정리 예약을 눌렀다.
[예약 변경: 소유자 확인 필요]
메뉴가 열리지 않았다. 공유 화면으로 돌아가도 영상 재생만 가능했다. 다른 곳에 저장하는 항목은 회색이었다.
시우는 「비가 그친 자리」를 다시 재생했다. 처음부터 보면 세미나 시작 전에 끝나지 않았다. 그는 민호가 손가락으로 짚었던 위치까지 막대를 옮겼다.
밝은 물소리 다음에 둔탁한 소리가 났다.
민호는 저 소리를 기다리는 길이를 열두 번 고쳤다. 더 듣기 좋은 소리를 선택하는 대신 두 소리가 어긋나는 자리를 남겨 두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을 지워도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했다.
시우는 패드에서 눈을 떼고 문 너머의 민호를 찾았다. 몇 줄의 의자 사이로 푸른 어깨가 보였다. 민호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환하게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저 웃음을 멈추게 할 방법은 몰랐다. 작품을 남겨 둔다고 친구가 되돌아올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민호가 고른 소리까지 없애도록 둘 수는 없었다.
[실행 예정 13:00]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다. 붉은 팝업창이 패드 위의 문장과 겹쳤다.
[가상 현실을 끄시겠습니까? (Y/N)]
시우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둔한 통증이 손끝 아래에서 뛰었다. 손을 대는 순간 무엇이 망가질지조차 알지 못했다. 원본 대신 민호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시우는 선반 위에 패드를 반듯하게 놓았다. 화면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조금 전과 같은 소리가 나왔고 검은 골목이 여전히 거기 있었다.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붉은 버튼이 이 파일을 남겨 줄 수 있는지는 몰랐다. 그가 확인한 변화는 단 하나였다. 손끝이 닿으면 매끄러운 표면이 벗겨지고 숨겨진 구조가 보였다.
패드의 메뉴를 더 눌러도 열리지 않는다면 그 아래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원본을 지우는 순간 무엇이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것. 지금 자신이 시험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시우는 손을 뻗기 전에 유리문을 한 번 더 보았다. 민호에게 직접 손대는 시도는 하지 않기로 했다. 통증이 되살아나면 즉시 손을 뗄 것이다. 손을 거뒀을 때 풍경이 복원된 것도 분명히 보았으니까.
시우의 오른손이 붉은 Y 아래로 올라갔다.
유리문 너머에서는 민호가 여전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