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정지 능력으로 날로 먹는 법

34화: 사라진 시험지
시험지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기 좋은 종이였다.
시우는 아침 자습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시험을 보지도 않았고 시험지가 학생들 손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교실 안에는 이미 범인이 하나 정해져 있었다.
최유나였다.
"최유나가 어제 교무실에 마지막으로 들어갔다며?"
"반 서류 내러 갔다던데. 그때 가져간 거 아니야?"
"시험지 원본이면 답이 적혀 있을 수도 있잖아."
시우는 책상에 엎드린 채 귀를 막고 싶었다. 그러다 앞자리에서 손을 꽉 쥐고 있는 유나를 보았다.
드르륵.
교실 앞문이 열렸다. 마동철 교사가 굳은 얼굴로 들어왔고 그 뒤에 국어 담당 교사가 서 있었다. 교사의 손에는 투명 파일과 종이 봉투가 들려 있었다.
"다들 조용히 해라. 아직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지 마."
"어제 교무실에 보관하던 2학년 평가 원본에서 3쪽과 4쪽이 사라졌다. 오늘 오후에 사용할 자료라서 지금 확인이 필요하다."
유나의 어깨가 아주 조금 움찔했다.
"어제 교무실에 들어간 학생은 최유나 한 명이었다. 그렇다고 유나가 가져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가방과 서류를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유나는 말없이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렸다.
"확인하세요. 저는 안 가져갔어요."
필통과 문제집과 반장용 서류철이 차례로 나왔다. 바닥까지 뒤집었지만 시험지 같은 것은 없었다.
그때 국어 교사가 유나의 투명 파일 가장자리에 붙은 작은 종이 섬유를 집어 들었다.
"이건 시험지에서 떨어진 조각일 수도 있겠는데."
"그 파일은 어제 교무실에 가져갔던 파일이에요. 반 설문지를 넣어 둔 거고요."
유나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손가락 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교실 뒤쪽에는 하린이 서 있었다. 녹음기는 꺼져 있었지만 수첩은 열려 있었다.
시우는 결국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방부터 보는 건 종이 찾는 순서가 아닌데요."
마동철이 눈을 찌푸렸다.
"그럼 네가 순서를 알려 주겠냐?"
"일단 종이가 어디에 있었는지부터 봐야죠. 유나 가방은 이미 다 봤잖아요."
"강시우. 이번에는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시우는 유나를 보았다.
"그런데 유나가 억울하게 반장 자리에서 빠지는 건 귀찮아서라도 막아야겠네요. 반장 바뀌면 공지 전달이 더 느려질 테니까."
유나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능력 쓰지 마."
낮은 목소리였다.
"안 써. 이번에는 진짜로 그냥 볼 거야."
하린이 수첩을 닫았다.
"저도 같이 봐도 될까요? 기록하지 않고 관찰만 할게요."
유나가 바로 잘랐다.
"취재는 안 돼."
"저도 강시우 학생의 추론을 믿을 이유는 없어요. 그래도 같이 보면 서로 확인할 수 있잖아요."
시우는 먼저 교실을 나섰다.
"빨리 와. 시험지보다 복도 소문이 먼저 시험을 망치겠어."
교무실 안에는 종이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시험지 원본 네 장이 펼쳐져 있었다. 1쪽과 2쪽 그리고 5쪽과 6쪽. 종이 사이가 비어 있었다.
국어 교사는 남은 원본을 눌렀다.
"어제 아침에 여섯 쪽을 모두 출력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서 봉투에 넣었는데 오후에 3쪽과 4쪽이 없어진 걸 알았다."
"출력하고 바로 세어 보지는 않았어요?"
시우가 묻자 교사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자료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유나 학생이 서류를 가져왔을 때도 책상 위에 시험지가 있었다."
유나의 얼굴이 굳었다.
"저는 문 옆 책상에 서류만 놓고 바로 나왔어요. 시험지는 보지도 않았어요."
시우는 투명 파일을 받아 들었다. 가장자리에 붙은 조각은 시험지와 비슷했지만 결이 조금 거칠었다.
그는 남은 시험지의 모서리를 살폈다. 3쪽과 4쪽이 빠진 자리는 찢긴 흔적이 없었다. 두꺼운 종이를 억지로 잡아 뺀 자국도 없었다. 대신 2쪽과 5쪽의 위쪽에 똑같은 회색 줄이 나 있었다.
"이거 복사기 자국이네요."
"시험지는 복합기로 뽑았어."
시우는 복사실에 있는 큰 기계로 걸어갔다. 출력함 안에는 반 설문지와 행사 안내문이 섞여 있었다. 옆 덮개 틈에는 종이가 아주 조금 삐져나와 있었다.
"이건 어제부터 있었습니까?"
"어제 출력할 때 종이가 걸렸다는 말은 들었다. 방송반 학생이 뺐다고 했고."
마동철이 덮개를 열었다.
기계 뒤쪽 좁은 통로에 종이 한 장이 반쯤 접힌 채 끼어 있었다. 위쪽에는 4쪽이라고 적혀 있었고 가운데에는 롤러가 남긴 긴 회색 줄이 있었다.
국어 교사가 숨을 내쉬었다.
"그럼 한 장은 여기 있었던 거네."
"유나가 가져간 게 아니라요."
하린이 말했다.
시우는 종이와 유나의 파일을 번갈아 보았다.
"복사기 안쪽 종이 가이드가 닳았어요. 종이가 들어갔다 나오면서 섬유를 긁어내고 있어요. 유나 파일에 붙은 건 시험지를 찢은 조각이 아니라 기계에서 묻은 가루에 가까워요."
4쪽은 기계 안에서 접혔다. 그렇다면 3쪽은 왜 없을까.
하린이 회수된 페이지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여기에 빨간 펜 표시가 있어요."
교사가 몸을 숙였다.
"채점 기준을 수정하려고 표시한 거다. 3쪽에도 비슷한 메모가 있었을 텐데."
"시험 문제를 훔친 사람이 아니라 수정 메모를 가져간 사람일 수도 있겠네요."
유나가 날카롭게 말했다.
"아직 그렇게까지 말할 단계는 아니야."
시우는 4쪽의 빨간 표시 옆에 적힌 숫자를 보았다.
7시 36분.
출력 시작 시간이었다.
"3쪽에는 뭐가 적혀 있었어요?"
"문항 말고는 수정 전 원본을 폐기하라는 메모가 있었다. 출력 시간도 적어 두었을 거야."
하린의 펜 끝이 움직였다.
출력 시간.
시우는 그 단어 아래에 그어진 밑줄을 보며 입술을 다물었다. 누군가 답을 훔치려 했다면 전체 시험지가 필요했다. 한 장만 가져가 얻는 것은 문제 일부와 숫자 하나뿐이었다.
그 숫자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복사실과 교무실 사이 복도에는 종이 조각이 몇 개 흩어져 있었다.
시우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조각들을 확인했다. 대부분 행사 안내문이었다. 한 조각에는 검은 줄과 숫자 일부가 남아 있었다.
3…
유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게 시험지야?"
"아직 몰라."
시우는 조각을 뒤집었다. 가장자리는 안쪽으로 말려 있었다.
"어제 교무실에 들어갔을 때 복사기 쪽에 갔어?"
"아니. 문 옆 책상에 서류를 두고 선생님께 확인받았어. 창가 쪽에서 다른 선생님이랑 이야기하고 있었고 잠깐 자리를 비웠어."
하린이 물었다.
"몇 분 정도였어요?"
유나가 하린을 노려보았다.
"왜 내가 시간을 외워야 하는데?"
"외우라는 뜻은 아니에요. 누군가 그 시간을 알고 있었는지 확인하려는 거예요."
시우는 문 옆 서류함을 바라보았다. 회색 서류함 아래 칸의 먼지가 한 부분만 네모나게 깨끗했다. 시험지 한 장 정도의 크기였다.
그는 안쪽을 더듬었다. 손끝에 종이의 거친 모서리가 닿았다.
꺼내 보니 회색 줄이 있는 종이 조각이었다. 위쪽에는 3이라는 숫자의 절반이 남아 있었다.
유나가 숨을 들이켰다.
"그럼 3쪽도 여기 있었네."
"있었던 흔적만 있어."
조각의 길이는 손가락 두 마디보다 짧았다. 누군가 페이지를 잡아당기다 찢겼거나 문틈에 눌린 것처럼 보였다. 원본 대부분은 사라진 채였다.
마동철이 교무실 쪽에서 걸어왔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시우는 조각을 교사에게 건넸다.
"유나는 시험지를 가져가지 않았어요. 4쪽은 복사기 안에 있었고 3쪽은 복사기나 서류함 주변에서 따로 빠졌어요. 유나가 들어오기 전후의 빈 시간에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유나 파일의 섬유는 시험지 조각이 아니라 복사기에서 생긴 가루였고 3쪽과 4쪽이 묶음에서 빠진 모양도 달라요. 무엇보다 유나가 시험지를 가져갔다면 4쪽만 기계 뒤에 남겨 두고 3쪽만 깨끗하게 빼 갈 이유가 없어요."
시우는 국어 교사를 보았다.
"선생님은 출력 직후 여섯 장을 세지 않았죠?"
교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유나가 나간 뒤 봉투에 넣으려고 세었다."
"그럼 유나는 마지막으로 들어간 학생일 뿐이에요. 시험지가 없어진 시간은 더 앞일 수 있어요."
교사는 유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네 파일에 조각이 붙어 있어서 성급하게 생각했구나."
유나는 투명 파일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사과는 받을게요. 대신 반 아이들한테도 그렇게 말해 주세요. 이미 제가 시험지 훔쳤다는 소문이 다 났으니까."
마동철이 헛기침했다.
"그건 내가 정리하마. 하지만 원본 한 장은 아직 없다. 평가를 그대로 진행할 수는 없겠군."
하린이 수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군가 유나가 마지막으로 교무실에 있었다는 인상을 만들고 싶었다면 두 장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라지게 하는 게 효과적이에요. 하나는 기계 고장처럼 보이게 하고 다른 하나는 사람 손이 탄 것처럼 보이게요."
유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누가 나를 범인처럼 보이게 만든 거야?"
"아직은 가설이에요."
하린은 수첩을 닫았다.
"하지만 단순한 분실로만 보이지는 않아요."
시우는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학생들은 시험지가 사라진 일보다 점심 메뉴를 더 궁금해했고 교사들은 평가 일정을 다시 잡느라 바빴다.
그 평범한 소란 속에서 누군가가 유나를 의심받게 만들 만큼 정확한 시간에 한 장의 종이를 가져갔다.
점심시간 직전 교실로 돌아오자 아이들의 시선이 유나에게 몰렸다.
마동철은 교사의 말을 대신 전했다. 유나는 시험지를 가져간 사람이 아니며 파일에 붙은 조각도 복사기 고장으로 생긴 것이라고 했다.
유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시우의 책상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네가 해결했다고 말하지 마."
"내가 말 안 해도 오 아저씨가 말할 텐데."
"그럼 미리 입을 막아."
"코코아를 사 주면 생각해 볼게."
유나는 한숨을 쉬다가 시우의 손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손끝이 차갑지 않았다.
"정말 능력 안 썼지?"
"응. 종이는 멈추지 않았고 나도 멈추지 않았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오늘은 건강했다는 뜻."
하린이 두 사람의 옆에 섰다. 그녀의 수첩에는 새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사라진 시험지.
사라진 선택.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이어져 있었다.
최유나를 마지막 목격자로 만든 사람은 시험지를 훔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시우는 그 문장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거 지워."
"왜요?"
"유나가 보면 화낼 거야."
"이미 봤어요."
유나가 팔짱을 꼈다.
"화낼 거니까 지워."
하린은 펜을 들고도 바로 지우지 않았다.
"시우 학생. 이번엔 네가 먼저 말했네요."
"뭘?"
"저를 취재 대상처럼 부르지 말라고요."
시우는 잠깐 말을 잃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
"같이 확인하는 사람이라고 해 주세요."
"그건 더 귀찮은데."
"그래도 더 정확해요."
시우는 하린의 수첩을 빼앗으려다 멈췄다. 수첩 안에는 47초와 3초와 오늘 사라진 시험지의 시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다른 사건처럼 보이는 숫자들이 한 줄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교실 뒤문이 열렸다. 마동철이 급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강시우. 최유나. 윤하린. 너희 셋은 잠깐 따라와라. 옥상 쪽에서 또 일이 생겼다."
유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우는 식판에 담길 점심을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 찾지 못한 시험지 한 장을 생각했다.
평범하게 살겠다는 결심은 시험지 한 장만큼이나 쉽게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