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49화: 아르카디아의 숨겨진 임무
[LOCATION: EARTH-FINAL - EMERGENCY VERTICAL LIFT]
[TIME: NIGHT / RAPID CORE ASCENT]
지하 0호 귀환 캡슐 챔버를 감싸던 질소 냉각 기체 사이로 붉은 경보 조명이 빗발쳤다.
쿠구구구구!
지상 천장 너머에서 전해져 오는 묵직한 진동은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지상의 대구경 입자 포신들이 방향을 틀며 본성 코어의 수직 축선을 일제히 정렬하는 중장갑 구동음이었다.
[SURFACE DEFENSE NODES: WEAPONS ONLINE]
[TARGET LOCK: CENTRAL PLANETARY CORE WELL]
"승강 리프트가 작동합니다. 지상 도달까지 백이십 초."
오르페우스의 푸른 홀로그램이 리프트 제어반 위에서 파르르 떨렸다. 바닥판 아래의 고압 자기 반발 장치가 점화되자 둥근 원형 승강기가 맹렬한 가속도를 내며 수직 통로를 타고 치솟기 시작했다.
벽면을 따라 설치된 수천 가닥의 동축 케이블들이 거센 상승 기류에 펄럭이며 날카로운 파찰음을 토해냈다.
"이안! 지상에서 쏟아지는 파동이 평범한 마도 포격이 아니에요!"
리아가 지팡이 끝에 에메랄드빛 방어 결계를 펼치며 외쳤다. 수직 통로 틈새로 쏟아져 내리는 콘크리트 파편과 이온화된 먼지들이 결계 표면에 부딪혀 하얗게 흩어졌다.
"대륙 북부 철갑 산맥 쪽에서 압축된 입자 빔이 지면을 두드리고 있어요. 산맥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포대로 변한 것 같아요!"
A-09는 이안의 발키리 프레임 가슴 장갑에 두 손을 얹은 채 자신의 접속 단말을 응시했다. 사파이어빛 보조 항법 권한의 펄스가 그녀의 은발 사이로 푸르게 번져 나갔다.
"노드들이 깨어났어요. 그런데... 신호가 너무 아파요. 마치 아주 오랫동안 혼자 어둠 속에 버려져서 다가오는 모든 빛을 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아이 같아요."
"오르페우스가 말했지. 멸망의 날에 본성 코어를 지키기 위해 오염을 스스로 끌어안고 회로를 닫았다고."
이안이 발키리 프레임의 바이저를 내리며 대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우리가 가진 보조 항법 권한이 녀석들에게는 자신들의 격리 규칙을 깨부수려는 외부 침입자로 인식되고 있는 거다. 비틀린 회로를 물리적으로 열어젖히기 전까지는 포격을 멈추지 않을 거야."
그때 이안의 흉부 장갑 안쪽에 삽입된 보조 항법 권한 데이터 칩에서 전례 없는 고밀도 펄스가 터져 나왔다.
치리리리릭!
[SECONDARY NAVIGATION AUTHORITY: ARCHIVAL PROTOCOL UNLOCKED]
[CALLSIGN: ARCADIA EXPEDITION LOG]
[CLASSIFICATION: MISSION OBJECTIVE LEVEL-0 (RESTRICTED)]
"이건... 단순한 노드 암호문이 아니야."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발키리 프레임 내부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에 푸른색 고대 문서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LOCATION: EMERGENCY ASCENT CORRIDOR - HOLOGRAM DECRYPTION]
[TIME: NIGHT / UNSEALING PROJECT GENESIS-RETURN]
[PROJECT CODE: GENESIS-RETURN (창세기 귀환)]
공중에 흩뿌려진 입체 홀로그램 중심에 거대한 성간 방주 아르카디아의 건조 당시 단면도가 떠올랐다.
그것은 이안이 아르카디아 보안 요원으로 복무하며 보았던 통상적인 선체 매뉴얼과 전혀 달랐다. 엔진 룸 심층부와 중앙 동결 구역 아래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밀실 구역들이 붉은 선으로 하나씩 드러났다.
"이게... 우리 함선의 원래 설계도라고요?"
이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단말을 통해 데이터를 전송받던 리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흔들렸다.
"이안, 여기 쓰인 임무 조항을 보세요. '아르카디아의 최종 목적지는 외계의 신세계가 아니다'라고 적혀 있어요!"
홀로그램 화면 속에서 헬레나 지휘관의 서명과 함께 인류 연합 우주방위사령부의 최종 지령이 뚜렷하게 문장을 이뤘다.
[지침 01: 문명의 대재앙에 직면하여 인공지능 세라프 및 지상 수호 노드는 행성 표면에서 붉은 차원 오염을 흡수·중화하는 생체 양자 필드(마도 체계)를 구축한다.]
[지침 02: 행성의 완전 자정에는 상대론적 시공간 기준 수천만 년의 정화 주기가 요구된다.]
[지침 03: 아르카디아 1~4호는 외우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초광속 상대성 도약을 통해 행성의 자정 주기를 우회하여 정화가 완료된 '미래의 지구'로 귀환한다.]
[지침 04: 방주의 사명은 씨앗의 보존과 귀향이다. 고향이 스스로의 상처를 모두 치료했을 때 방주는 다시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의 새로운 생명들과 함께 문명을 복원해야 한다.]
순간 승강 리프트 안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멎었다.
"귀환... 방주였다고?"
이안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인류는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절망 속에 외우주로 쫓겨나 떠돌다 우연히 마법의 행성에 불시착한 것이 아니었다.
수천만 년 전 파멸의 화염 속에서 지구의 인공지능들과 지상에 남은 인류는 자신들의 행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깎아내어 대지를 마법과 정령의 세계로 재구성하며 시간을 벌었고 방주 아르카디아는 빛의 속도로 시간을 건너뛰어 약속된 그날에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길을 잃은 게 아니었어요."
A-09가 가슴에 손을 얹고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르카디아라는 이름은 낙원을 찾아 헤매는 배가 아니라 반드시 돌아와야 할 약속의 땅을 부르는 이름이었어요."
"하지만 비극이 있었군요."
리아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서글픈 어조로 덧붙였다.
"방주는 시간을 건너 지구로 돌아왔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부의 기록이 유실되었고 지상에서는 신들과 인간들이 그 옛날의 약속을 잊은 채 서로를 외계인과 괴물로 경계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이제 그 약속의 마지막 조각이 우리 손에 들려 있다."
이안이 대검을 쥐고 홀로그램을 닫았다. 그의 가슴 안쪽에서 묵직한 불꽃이 타올랐다.
단순한 생존이 아니었다. 이것은 수천만 년 전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낸 고향을 완전히 되찾기 위한 인류 최후의 임무였다.
띵-!
리프트의 상부 표시등이 녹색에서 선혈 같은 붉은색으로 급변했다.
[WARNING: SURFACE BREACH IMMINENT]
[ALTITUDE: GROUND LEVEL - RED CITADEL SECTOR]
승강기가 지상 붉은 성채 고지대의 외곽 지표면을 뚫고 솟구쳐 올랐다.
[LOCATION: RED CITADEL - IRON MOUNTAIN RIDGE PASS]
[TIME: NIGHT / SURFACE DEFENSE FIRE]
콰아아앙!
지상으로 리프트 문이 개방되는 찰나, 밤하늘을 찢는 굉음과 함께 붉은 섬광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차갑고 거친 밤바람 속에서 짙은 유황 냄새와 타버린 오존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지상은 이미 지옥 같은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저 멀리 대륙 북부를 병풍처럼 둘러싼 철갑 산맥의 능선 전체가 기괴한 핏빛 전자기 스파크를 번뜩이고 있었다. 산맥의 바위산 봉우리들이 좌우로 열리며 수백 미터에 달하는 육중한 거대 요새 포탑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온다! 회피해!"
이안이 소리치며 발키리 프레임의 부스터를 전개했다.
슈우우웅- 콰쾅!
산맥 정상에서 발사된 지름 수 미터 크기의 초고밀도 입자 포탄이 세 사람이 방금 빠져나온 리프트 승강장을 직격했다. 두꺼운 합금 플레이트가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수십 미터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크윽!"
리아가 공중으로 몸을 띄우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마도 결계, 풍압 반사!"
몰아치는 파편 폭풍을 거대한 바람의 장막으로 밀어내자 이안이 대검을 옆으로 눕혀 궤도 포탄의 잔여 충격파를 갈라냈다. 퀀텀 절단 휠이 고속 회전하며 허공을 맴돌던 파편들을 산산조각 냈다.
[TARGET IDENTIFIED: IRON MOUNTAIN DEFENSE NODE]
[STATUS: CORRUPTED LOGIC LOOP]
[THREAT LEVEL: STRATEGIC SIEGE ARTILLERY]
철갑 산맥의 거대한 포탑들이 다시 육중한 모터를 돌리며 이안 일행을 조준선 중심에 넣었다.
포구 주변에 얽힌 고대 금속 장갑판 사이로 붉은색 위상 오염 덩굴이 혈관처럼 펄떡이고 있었다. 대재앙 당시 본성 코어를 지키기 위해 오염을 스스로 흡수했던 그 희생의 흔적이 이제는 침입자를 멸절시키려는 맹목적인 공격성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포탑의 조준 회로가 우리를 완전히 외계 오염체로 판단하고 있어요!"
리아가 공중에서 마력 흐름을 분석하며 외쳤다.
"보조 항법 권한의 암호 주파수가 닿기도 전에 포탄부터 쏟아붓고 있어요. 이대로는 산맥 기슭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잿더미가 될 거예요!"
"A-09, 보조 항법 권한의 광역 방출이 가능한가?"
이안이 달려드는 소형 방위 드론 세 기를 대검으로 내리찍어 박살 내며 물었다.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요. 최소한 철갑 산맥 제1 방어벽 내부의 중앙 중계탑까지는 접근해야 노드의 메인 코어에 직접 주파수를 꽂아 넣을 수 있어요!"
A-09가 단말을 들어 올리며 산맥 중턱의 거대한 강철 돔을 가리켰다.
그곳은 수천 개의 대공 발칸과 지대공 미사일 포트가 촘촘히 박힌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산맥 전체가 살아 있는 강철 괴수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LOCATION: IRON MOUNTAIN ENTRANCE - VANGUARD CHARGE]
[TIME: NIGHT / BREAKTHROUGH INTO THE FORTRESS]
철갑 산맥 요새의 경보음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위이이잉-!
수백 대의 강철 보행 병기와 대공 센티널들이 요새 성벽 틈새에서 쏟아져 나와 산비탈을 가득 메웠다. 그들의 흉부에는 붉은색 감응 핵이 번뜩이고 있었다.
"오래된 친구들을 부수는 건 마음 편한 일이 아니지만."
이안이 발키리 프레임의 대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었다. 등 뒤의 메인 추진기가 청백색 플라즈마 화염을 격렬하게 뿜어냈다.
"잠들어 있는 녀석들의 뺨을 세게 쳐서라도 깨워야지."
"길은 제가 열게요!"
리아가 허공으로 솟구치며 두 손으로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사파이어빛 마법진 세 개가 겹쳐지며 회전했다.
"루미나르 상위 비전, 천공의 얼음 창!"
쿠르릉!
밤하늘에서 수십 자루의 거대한 서리 창들이 벼락처럼 쏟아져 내렸다. 산비탈을 기어오르던 기계 병기들의 관절이 얼어붙으며 일제히 멈춰 섰다.
"지금이에요, 이안!"
"간다!"
이안은 얼어붙은 병기들의 머리를 디딤돌 삼아 전속력으로 산맥을 향해 도약했다.
쾅! 쾅! 쾅!
산맥 요새에서 발사된 붉은 대구경 포탄들이 그의 발밑을 연이어 집어삼켰다. 파편과 화염이 발키리 프레임의 장갑을 사정없이 두들겼지만 이안은 결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품 안에 안긴 A-09가 가슴의 단말을 강철 돔을 향해 겨누며 외쳤다.
"철갑 산맥 수호 노드! 들리나요? 우리는 침략자가 아니에요! 수천만 년 전 당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아르카디아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사파이어빛 파동이 붉은 포연을 뚫고 산맥 전체로 퍼져 나갔다.
순간, 일제히 불을 뿜던 수십 문의 거대 포탑들이 기괴한 파찰음을 내며 잠시 회전을 멈췄다.
치직... 치지직...
포탑 내부의 시스템이 거대한 혼란에 빠진 듯 붉은 빛과 푸른 빛을 교차하며 명멸했다.
"통했다!"
리아가 환호했지만 이안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붉은 빛이 다시 푸른빛을 삼키려 발악하고 있었다.
"아직 코어가 완전히 승복한 게 아니다. 돔 내부의 반응로 제어실로 직접 돌입한다!"
이안이 대검의 날에 퀀텀 에너지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청백색의 거대한 검기가 철갑 산맥 요새의 정면 장갑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강철의 문이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다. 그 어둡고 거대한 기계의 심장부 너머로 수천만 년 동안 갇혀 있던 첫 번째 수호 노드의 진실이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