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거짓말을 하면 성녀님이 피를 토하십니다4화

거짓말을 하면 성녀님이 피를 토하십니다

거짓말을 하면 성녀님이 피를 토하십니다

AD
스폰서 광고

4화: 거짓 없는 칼날

돌바닥 밑에서 울린 비명은 짧았다.

두꺼운 석판과 오래된 회반죽을 뚫고 올라온 소리는 젖은 헝겊으로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둔탁했다. 하지만 그 박자와 높낮이는 방금 전 시녀방에서 흩어진 앞치마 끈을 쥐고 흐느끼던 엘라의 숨소리와 정확히 일치했다.

“방향은 화물 통로 하단이다.”

이안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는 릴리아를 안아 든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차가운 흉경 너머로 규칙적이고 묵직한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내려놓으세요. 걸을 수 있습니다.”

“발목에 힘도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 계단을 구를 셈인가.”

“느려집니다.”

“내가 뛰면 네가 걷는 것보다 세 배는 빠르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화물 통로로 이어지는 아치형 석문으로 몸을 돌렸다.

릴리아의 심장은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 숨이 가쁘게 차오르지도 않았고 목구멍을 찌르는 핏물도 올라오지 않았다. 이안의 말은 과장이나 위선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사실이었다.

거짓이 없는 문장을 들을 때마다 온몸의 신경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흉악범과 마주하며 거짓말의 무게에 짓눌려 살았던 한세아에게 그리고 타인의 위선에 내장이 찢기던 성녀 릴리아에게 이 감각은 기괴할 만큼 생경한 평온이었다.

“도렌, 휴고.”

이안이 계단 입구에 선 기사들에게 짧게 명령했다.

“서고 하층과 연결된 상부 통로를 차단해라. 관리인 베르트는 취조실에 감금하고 누구와도 접촉시키지 마.”

“존명!”

기사들의 군화 소리가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이안은 어두운 나선형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서 올라오는 공기는 차갑고 축축했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양피지 냄새 그리고 코끝을 아리게 찌르는 은빛 성석 가루의 쇠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벽면에 꽂힌 마력 석등이 드문드문 흔들리며 벽면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단장님.”

릴리아가 그의 어깨너머로 계단 바닥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성녀가 갑자기 수사관처럼 굴고 있습니다. 평소의 릴리아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고 있죠. 그런데 왜 제 말을 그대로 따릅니까?”

이안의 시선은 계단 아래의 어둠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호흡은 릴리아를 안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의심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런데요?”

“하지만 네가 가리킨 자리마다 명백한 흔적이 나왔다. 찢긴 명부, 사라진 신발, 창틀의 성석 가루 그리고 베르트의 거짓말까지.”

그가 계단참을 돌며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은 거짓말을 들을 때마다 진짜 피를 흘린다. 세상 어떤 간첩도 그런 방식으로 연기를 하지는 않아.”

심장은 여전히 고요했다.

릴리아는 속으로 짧은 숨을 들이켰다. 이 남자는 자신의 직관이나 감정에 기대지 않는다. 오직 눈앞에 드러난 사실과 검증된 증거만을 바탕으로 판단한다. 대한민국 경찰청에서 일할 때도 이런 유형의 동료는 드물었다. 감정을 섞지 않고 팩트만을 집요하게 밀고 나가는 사람. 프로파일러로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의 유형이었다.

“납치범은 교단 내부 구조에 매우 능숙한 자입니다.”

릴리아가 계단 모서리에 묻은 검은 흙 자국을 가리키며 분석을 이어갔다.

“성녀의 방에서 엘라를 빼돌린 시간, 베르트를 매수하거나 속여 거짓 동선을 만들게 한 치밀함 그리고 기사단의 순찰 교대 시간을 피해 화물 통로로 숨어든 판단력까지.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에요. 아주 오랫동안 이 궁의 움직임을 관찰해 온 사람의 동선입니다.”

“목적이 뭐라고 보나.”

“입막음이거나 기억의 거세입니다.”

계단 끝에 다다르자 묵직한 참나무 문이 나타났다. 서고 하층으로 통하는 화물 분류소의 입구였다. 바닥에는 물기가 흥건했고 차가운 지하수가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엘라는 성녀의 침소에 놓였던 향로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향에 무엇이 섞였는지 누가 그것을 전해주었는지 알고 있었죠. 범인은 엘라가 기사단이나 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 전에 그 기억을 영구히 지우거나 없애려 하는 겁니다.”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군.”

“앞으로 한 시간 안입니다. 기억 조작이든 살해든, 완전히 은폐할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끝내려 할 테니까요.”

이안은 릴리아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벽을 짚고 선 릴리아의 다리가 가늘게 떨렸지만 그녀는 곧바로 균형을 잡았다.

이안의 손이 허리춤의 검자루로 향했다.

“뒤에 있어.”

참나무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빗장은 밖에서 부순 것이 아니라 안쪽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들어 올려져 있었다. 문틈 사이로 흩뿌려진 서류 더미와 뒤엎어진 목재 상자들이 보였다.

서고 하층은 거대한 지하 동굴 같았다. 천장까지 닿은 수백 개의 서가 사이로 희뿌연 먼지가 안개처럼 떠돌았다. 성도 루미나의 건국 초기 기록부터 이단 심문 기록까지 수만 권의 장서가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인기척은 없다.”

이안이 검을 반쯤 뽑은 채 서가 사이를 살폈다.

릴리아는 바닥의 흔적을 훑었다. 젖은 진흙이 묻은 남성용 장화 자국이 서가 안쪽으로 깊게 이어져 있었다. 발자국의 보폭은 좁았고 깊이는 깊었다. 성인 남성이 한쪽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졌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하중 불균형 흔적이었다.

“발자국 깊이를 보세요. 왼쪽 발등이 흙 속에 더 깊게 파였습니다. 오른손으로는 횃불이나 도구를 쥐고 왼쪽에 엘라를 멨다는 증거예요.”

“군용 보법이다. 발을 바깥쪽으로 차지 않고 일직선으로 딛고 있어.”

이안이 즉각 보충했다. 수사관의 분석과 무인의 실전 감각이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졌다.

“단장님, 저쪽입니다.”

릴리아가 가리킨 곳은 양피지 문서함이 무너져 내린 구석진 통로였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뒤로 손이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푸른 사제복을 입은 청년이었다. 관자놀이에는 둔기에 맞은 듯 붉은 피멍이 들어 있었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엘리오.”

이안이 다가가 청년의 뺨을 가볍게 쳤다.

“정신 차려라, 엘리오.”

청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서서히 열렸다. 초점이 풀린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다 이안의 얼굴을 마주했다.

“기, 기사단장님...?”

“무슨 일이 있었지? 서고 열쇠는 어떻게 된 건가.”

엘리오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그의 시선은 극도로 불안정했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며 헛손질을 했다.

“새벽에요... 네 번째 종이 울렸을 때... 열쇠를 반납하러 갔습니다...”

“누구에게 반납했지?”

엘리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턱이 굳어지며 눈동자가 왼쪽 위로 굴러갔다. 무언가를 진실되게 회상하려는 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었다. 억지로 주입된 이미지를 더듬어 읽어 내리려는 기괴한 안구 운동이었다.

“총무사제관님의... 비서관님께서... 직접 서고를 확인하신다고... 열쇠를 달라고 하셨습니다...”

쿵.

그 순간, 릴리아의 가슴 안쪽에서 묵직한 망치가 내리치는 듯한 충격이 터졌다.

“큭...!”

릴리아는 입을 틀어막고 무릎을 꿇었다. 늑골 사이가 뒤틀리며 목구멍을 타고 뜨거운 피가 치밀어 올랐다. 손수건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릴리아!”

이안이 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말하지 마라. 숨을 쉬어.”

릴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엘리오를 똑바로 응시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맹렬한 통증 속에서도 한세아의 프로파일러 뇌세포는 얼음처럼 차갑게 회로를 돌렸다.

“거짓이에요.”

릴리아의 쉰 목소리가 서고 안을 서늘하게 울렸다.

“저 사람은 지금 자기가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어요. 뇌에 다른 기억이 강제로 덮어씌워진 겁니다.”

이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총무사제관의 비서관이 아니라는 건가.”

“네. 저 사람의 뇌는 지금 조작된 허상을 사실로 인지하고 있어요. 엘리오의 의식은 진실이라고 믿고 있지만 이 몸의 거부 반응은 그 인지의 근본이 거짓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릴리아는 엘리오의 곁에 놓인 작은 철제 보관함을 가리켰다.

보관함의 자물쇠는 정밀한 마법 도구로 깔끔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안쪽에는 성화를 그릴 때 쓰는 고급 안료와 성석 가루를 보관하던 벨벳 홈이 파여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보관병 세 개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성석 가루를 챙겨 갔어요.”

릴리아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순결의 방 향로에 넣었던 것과 같은 고순도 성석 가루입니다. 범인은 엘라를 데리고 도망치는 도중에도 즉각적으로 기억을 지우거나 추출하기 위해 이 가루를 확보한 거예요.”

“도주 경로는?”

“서고 뒤편, 대성당 지하 배수로로 통하는 수문입니다.”

릴리아는 바닥을 가리켰다.

책장 사이로 이어진 발자국 끝에는 은빛 가루가 희미하게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궤적은 서고 가장 깊은 곳, 지하수로의 쇠창살 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철창 문은 이미 빗장이 풀린 채 삐걱거리고 있었다. 문살 틈에는 찢겨 나간 엘라의 회색 앞치마 조각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바닥에는 아직 채 꺼지지 않은 손가락 크기의 검은 향 조각이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달콤하면서도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가 좁은 통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기억을 마비시키는 향입니다.”

릴리아가 입술의 핏자국을 훔치며 일어섰다.

“엘라를 기절시킨 채 끌고 가고 있어요. 짐이 무겁고 통로가 좁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이안은 칼집에서 검을 완전히 뽑아 들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강철 검날이 어두운 지하 통로의 공기를 갈랐다.

“지금부터는 내 뒤에서 한 걸음도 떨어지지 마라.”

그의 단호한 선언에 릴리아의 심장은 다시 한번 맑은 고요를 유지했다.

거짓이 없는 기사의 등 뒤로, 릴리아는 차가운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는 지하 배수로를 향해 첫 발을 내딛었다.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