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헌터는 퇴근 후에 꿀만 빱니다

2화: 칼퇴의 정석
서울 동부 7구역의 게이트는 지하 주차장 입구처럼 생겼다.
주변에 세워진 철제 펜스에는 노란 경고등이 붙어 있었다. 게이트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 안개가 아스팔트 위를 낮게 기었다.
강무혁은 펜스 옆에 놓인 전광판을 확인했다.
[E급 슬라임 군락]
[예상 공략 시간 120분]
[입장 전 마나 진동 재측정]
“이 정도면 그냥 들어가도 되는 거 아닙니까?”
붉은 조끼를 입은 남자가 측정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일 파티의 파티장인 권태식이었다. 팔뚝에는 오래된 방패 자국이 남아 있었고 허리에는 E급 던전용 도끼가 매달려 있었다.
협회 직원이 측정기의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평균보다 높습니다. 수치가 더 올라가면 입장을 미루는 편이 좋습니다.”
“오늘 미루면 수당도 날아갑니다. 슬라임이 뭘 할 수 있다고요?”
권태식이 코웃음을 쳤다.
다른 파티원들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힐러 최나래는 낡은 장갑을 끼고 있었고 짐을 맡은 오민석은 물통을 두 개나 들고 있었다. 모두 돈을 벌러 온 얼굴이었다.
무혁은 게이트를 바라봤다.
푸른 안개는 바깥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신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한 번씩 되돌아왔다. 물결이 거꾸로 치는 것과 비슷한 움직임이었다.
정상적인 슬라임 군락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최나래가 물었다.
“아뇨.”
무혁은 고개를 저었다.
“안쪽 바닥이 미끄러울 것 같아서요.”
권태식이 무혁의 짧은 검을 힐끗 봤다.
“처음 온 사람은 뒤에서 짐이나 보세요. 앞에 나서면 구해 주느라 시간만 늦어집니다.”
“그럼 뒤에서 걷겠습니다.”
무혁은 순순히 대답했다.
시간을 늦추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입장 전에 싸울 이유도 없었다. 파티장이 선두를 고집한다면 자신은 가장 빠른 길로 따라가면 된다.
게이트 관리 직원이 입장 명단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안전 고지입니다. 이상 진동이 느껴지면 즉시 후퇴하십시오. 코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임의로 벽을 파괴하지 마세요.”
무혁은 그 말을 듣고 오른쪽 벽을 봤다.
벽은 낡은 콘크리트처럼 보였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는 저 벽을 세 번 두드리면 안쪽에 숨은 통로가 열렸다. 파티 대부분은 벽 뒤에 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슬라임을 전부 잡았다.
두 시간이 걸리는 이유였다.
“입장합니다.”
권태식이 방패를 들었다.
사람들이 푸른 안개 안으로 들어갔다.
발밑에 물이 차오르자 슬라임 냄새가 올라왔다.
반투명한 몸체들이 바닥을 덮고 있었다. 작은 슬라임들은 사람의 발목 높이에서 출렁였고 멀리 있는 덩어리들은 천장에 붙어 느리게 움직였다.
권태식이 방패를 내리쳤다.
철판에 부딪힌 슬라임이 사방으로 튀었다. 최나래가 뒤에서 약한 불꽃을 날려 바닥을 말렸다.
“이쪽으로 몰아!”
오민석이 소리쳤다.
그러나 물이 고인 바닥은 생각보다 넓었다. 불꽃에 녹은 슬라임이 물길을 타고 파티 뒤쪽으로 흘렀다. 숫자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다.
권태식의 얼굴이 굳었다.
“이상하네. 원래 이 정도는 아닌데.”
무혁은 한숨을 삼켰다.
이대로 두면 파티는 10분 안에 포위된다. 그 뒤에는 각자 체력을 소모하며 길을 뚫어야 한다. 예상 공략 시간 두 시간도 안전할 때의 이야기였다.
무혁은 물길의 방향을 살폈다.
오른쪽 벽 아래로 얕은 홈이 나 있었다. 홈은 세 갈래로 갈라진 뒤 가장 안쪽의 낮은 계단으로 이어졌다. 전생의 공략법은 간단했다. 슬라임을 잡는 대신 물이 흐르는 길을 이용해 움직임을 묶으면 됐다.
“파티장님.”
“왜요?”
“불꽃을 바닥에 계속 쓰면 안 됩니다.”
권태식이 무혁을 돌아봤다.
“그럼 어떻게 하죠?”
“저쪽 홈으로 물을 보내세요. 슬라임이 따라갑니다.”
“네가 뭘 안다고.”
“이쪽이 덜 미끄럽습니다.”
무혁은 검 끝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권태식은 잠깐 망설였다. 뒤쪽에서 슬라임이 부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라도 방향을 바꿔야 했다.
“오민석. 물통 하나 비워.”
“아깝게 그걸 왜요?”
“시간이 더 아깝다. 하라는 대로 해.”
물이 홈으로 흘러갔다.
무혁은 손가락을 한 번 움직였다. 손끝에 모인 마나가 실처럼 가늘게 뻗어 물의 표면을 눌렀다. 아주 작은 힘이었다. 어린 육체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썼다.
하지만 물은 정확히 방향을 틀었다.
슬라임들이 물길을 따라 움직였다. 하나가 지나가자 뒤에 있던 것들이 서로의 몸을 밀며 좁은 홈으로 몰렸다.
“지금입니다.”
무혁이 말했다.
권태식이 방패로 앞을 막고 최나래가 불꽃을 낮게 깔았다. 오민석은 남은 물통을 홈 끝에 부었다. 세 사람이 움직이자 슬라임은 한꺼번에 굳었다.
파티 앞에 길이 생겼다.
“운이 좋았네요.”
최나래가 숨을 돌리며 말했다.
무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운이 아니라 지형을 읽은 결과였다. 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설명을 시작하면 질문이 늘어난다.
질문이 늘어나면 퇴근이 늦어진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열두 걸음.
낮은 계단을 내려가 물길이 두 번 꺾이는 지점을 지나면 왼쪽에 낡은 벽이 나온다.
무혁은 걸음을 세며 움직였다.
권태식이 선두에서 방패를 들고 있었지만 무혁의 발이 계속 앞섰다. 그는 벽 앞에 도착하자 손등으로 표면을 두드렸다.
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툭.
벽 안쪽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툭.
콘크리트 표면에 가느다란 금이 생겼다. 금은 아래로 내려가며 문 모양이 되었다.
오민석이 입을 벌렸다.
“여기에 길이 있었어요?”
“벽이 약했나 봅니다.”
무혁은 손을 털었다.
권태식이 금이 간 벽을 만져 봤다. 손으로 밀자 벽 일부가 안쪽으로 꺾였다. 그 너머에는 좁은 통로가 있었다.
“이런 공략법을 어떻게 알았지?”
“아까 바닥을 보니까요.”
“처음 온 거 맞아?”
“네.”
무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 몸으로는 처음 온 게 맞았다.
최나래는 무혁을 운이 좋은 신입이라고 생각했다.
통로 끝에는 푸른 빛이 보였다. 던전 코어가 있는 방이었다.
그때 안쪽에서 낮은 진동이 울렸다.
벽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코어 주변의 슬라임들이 바닥에서 솟아나며 길을 막았다.
권태식이 방패를 들어 올렸다.
“이제부터가 진짜 보스전인가 보군!”
“보스는 아닙니다.”
무혁은 코어를 보며 말했다.
“물만 끊으면 돼요.”
“뭘 끊어?”
대답 대신 무혁이 앞으로 나갔다.
슬라임 하나가 몸을 부풀리며 덮쳐 왔다. 무혁은 몸을 반 걸음 옮겼다. 공격은 어깨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노련한 회피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무혁은 넘어지며 바닥의 물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얇은 마나가 물 아래로 퍼졌다. 코어를 감싼 물의 순환이 끊겼다.
되살아나던 슬라임들이 일제히 힘을 잃었다.
가슴 안쪽이 따끔하게 조여 왔다. 마나 회로가 어린 몸을 재촉하는 신호였다. 무혁은 이를 악물지 않고 흐름을 바로 접었다. 더 욕심을 부리면 코어보다 먼저 자신의 몸이 망가진다.
“지금 뒤로 물러나세요.”
파티원들이 한 걸음 물러섰다.
무혁은 허리춤에서 짧은 단검을 뽑았다. 던전 입장 전에 협회 대여점에서 빌린 값싼 물건이었다.
코어에는 얇은 균열이 세 갈래로 나 있었다. 그중 가장 가는 선에 단검 끝을 갖다 댔다.
힘을 많이 줄 필요는 없었다.
툭.
푸른 코어가 깨졌다.
공간을 채우던 슬라임들이 물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코어에서 빛이 터져 나오며 통로와 방을 한꺼번에 밝혔다.
무혁은 시계를 확인했다.
입장 후 3분 12초.
“끝났네요.”
권태식이 방패를 내리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최나래의 손끝에 모인 불꽃도 그대로였다.
“벌써요?”
오민석이 물었다.
“네.”
무혁은 단검을 닦아 허리춤에 넣었다.
“나가죠. 점심 전에 밥 먹으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아무도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이 깨진 코어에 붙어 있었다. 빛이 사라지는 동안 코어의 안쪽에서 검은 실 한 가닥이 튀어나왔다. 실은 허공에서 잠깐 떨리더니 구석의 작은 돌 틈으로 스며들었다.
무혁은 그것을 보았다.
정상적인 코어 파편은 푸른빛을 띤다. 검은색 마나는 던전 바닥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단검을 다시 만졌다.
작은 돌을 깨고 흔적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뒤였다. 이상 원인을 보고하면 관리 직원이 붙고 재측정이 이어진다. 조사가 시작되면 파티 수당 지급도 늦어질 수 있다.
무혁은 구석을 한 번 더 바라본 뒤 몸을 돌렸다.
“무혁 씨. 저거 확인 안 해도 돼요?”
최나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코어는 깨졌잖아요.”
“그래도 진동이 남아 있는데요.”
“밖에서 확인하겠죠.”
무혁은 통로로 걸어갔다.
이 던전이 정말 이상하다면 협회가 알아서 확인할 일이다. 자신이 할 일은 수당을 받고 국밥집에 가는 것뿐이었다.
게이트 바깥으로 나오자 관리 직원이 시간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3분 12초요?”
권태식이 대답했다.
“저 사람 덕분입니다.”
무혁은 손을 내저었다.
“지형이 좋았습니다.”
직원은 무혁의 등록증과 게이트 기록을 번갈아 봤다.
“처음 공략하신 거 맞습니까?”
“네.”
“슬라임 군락은 오늘 오전 내내 평균 두 시간으로 잡혀 있었습니다. 이런 기록은 처음이라서요.”
“그럼 수당도 빨리 나옵니까?”
직원은 잠깐 말을 잃었다.
“정산은 보통 한 시간 뒤에…”
“한 시간이나요?”
무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협회 창구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재측정이니 원인 조사니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직원은 무혁의 얼굴을 보고 급히 태블릿을 조작했다.
“오늘은 특별 정산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혁은 곧바로 계좌 입금 알림을 확인했다. 금액은 많지 않았지만 하루 생활비와 국밥 한 그릇 정도는 충분했다.
그때 관리실 안쪽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직원이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네. 코어가 사라졌는데 잔류 진동이…”
무혁도 모니터를 바라봤다.
자동 기록 화면에는 코어실의 마지막 장면이 남아 있었다. 푸른 코어가 깨진 뒤 구석의 작은 돌이 아주 조금 떠올랐다. 돌 아래에서 검은 실 같은 마나가 번졌다가 사라졌다.
“저건 뭡니까?”
권태식이 물었다.
관리 직원은 화면의 수치를 확대했다.
“코어는 파괴됐습니다. 게이트도 폐쇄 단계에 들어갔고요. 당장 폭주할 상태는 아닙니다.”
직원은 안심하지 못한 얼굴로 기록을 저장했다.
“다만 잔류 진동이 사라지는지 계속 확인해야겠습니다. 안쪽은 재측정팀이 들어갈 때까지 봉쇄하겠습니다.”
“강무혁 헌터님. 잠시만 더 확인을…”
무혁은 등록증을 챙겼다.
“이상하면 다시 들어가서 확인하겠습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다시 들어가야 한다면 가장 빨리 끝내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다만 오늘은 아니었다.
무혁은 게이트 관리실을 나와 휴대전화로 근처 국밥집을 검색했다. 뒤에서 경고음이 한 번 더 울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는 것까지가 오늘의 계획이었다.
계획은 지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