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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우주 첩보원의 평행세계 임무1화

다중우주 첩보원의 평행세계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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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붕괴 예측]

봉인된 명령

잠입 준비실의 시계는 23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준서는 왼쪽 손목에 감긴 위상 잠입기의 결속띠를 한 칸 조였다. 피부 안쪽에서 오래된 흉터가 당겼다. 장비가 살아 있다는 신호였다.

맞은편 벽면에는 출발 관측 기록이 떠 있었다.

출발지. 원지구.
좌표. 국가초상현상대응국 지하 7층.
기록자. 한준서.

준서는 마지막 줄에 손가락을 대고 지문 대신 기억 패턴을 입력했다. 공명 코어가 낮게 울렸다. 이동자는 출발지와 도착지 양쪽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 한쪽이라도 비면 돌아올 길이 사라진다.

“목표 지구의 현지 시간은 원지구보다 11분 느립니다.”

서세린이 봉인 서류를 넘겼다. 문서의 접힌 자국과 잉크 번짐까지 증거로 남기기 위해 감찰관들은 여전히 종이를 썼다.

“도착 예정 시각은 현지 기준 23시 29분. 귀환 창은 도착 후 19시간 뒤 90초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것과 기록하는 것은 다릅니다.”

세린은 준서의 얼굴보다 출발 기록을 보고 있었다.

“이번 명령서의 위험 등급은 4급입니다. 그런데 부록의 시간 순서가 맞지 않아요. 지난 세 건의 작전 기록에도 같은 종류의 1초 공백이 있습니다.”

“장비 보정 오차일 수 있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 본인은 그 1초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으려는 순간 관자놀이가 뻐근해졌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비어 있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질문의 모양 같았다.

공명 코어가 탁하게 떨렸다. 여자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잡음이 이어폰을 스쳤지만 말이라고 부를 만큼 길지는 않았다.

“코어 이상?”

“출발 전 동기화 잡음입니다.”

준서는 코어의 진단창을 닫았다. 작은 이상 하나가 임무 전체를 멈추게 해서는 안 됐다.

천장의 스피커에서 강태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낮고 친절한 음성이었다.

“한준서 요원. 목표는 아르카 대사관 보안 기록관 윤해진이다. 36시간 안에 목표 지구에서 대규모 폭발 사고가 발생한다. 윤해진은 그 사고의 위기 요소로 지정됐다.”

“근거 전문을 열어 주십시오.”

“현장에서는 필요한 만큼만 판단하게.”

“제거입니까?”

“무력화. 저항이 확인되면 제거.”

준서는 봉인 문서를 바라보았다. 윤해진의 사진은 없었다. 이름과 직책 그리고 검은색 위험 표시만 있었다. 사람을 지우라는 명령치고는 너무 깨끗한 서류였다.

“현지인에게 이동 사실을 공개해서는 안 됩니다.” 세린이 말했다. “공개가 필요하다면 동의를 먼저 받으세요.”

“동의할 시간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 기록을 남기고 판단하십시오. 기록이 없으면 당신의 판단도 없었던 일이 됩니다.”

준서는 공명 코어를 가슴 안쪽 고정대에 밀어 넣었다. 위상 잠입기의 내부에는 두 개의 관측창이 있었다. 하나는 출발지를 향하고 다른 하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도착지를 향했다.

그는 세린을 보았다.

“제 기록을 지울 생각이라면 귀환 창까지 기다리십시오.”

“지울 권한은 제게 없습니다.”

세린의 답은 너무 빨랐다. 출발 신호가 그 틈을 덮었다.

대사관의 다른 밤

빛이 꺾였다.

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몸을 설명하던 순서가 잠시 풀렸다. 손가락의 감각이 늦게 돌아왔고 혀끝에는 금속 맛이 남았다. 준서는 낯선 대리석 바닥을 짚었다.

목표 지구의 아르카 대사관 관리 통로였다.

벽면 시계는 23시 29분을 가리켰다. 동기화는 정확했다. 준서는 도착 기록 패널에 손을 올렸다.

도착지. 목표 지구.
좌표. 아르카 대사관 유지관리 통로.
기록자. 한준서.

기록이 저장되는 동안 작은 보안 드론이 천장 레일을 따라 내려왔다. 렌즈가 준서의 얼굴과 임시 신분증을 훑었다.

“보안 감사관 한준서. 출입 사유를 말하십시오.”

“정기 기록 보존 감사.”

“출입 예약이 0.8초 늦습니다.”

렌즈가 붉게 변했다.

준서는 대사관이 사람보다 기록의 순서를 신뢰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읽었다. 그는 임시 신분증을 세로로 돌렸다.

“예약이 늦은 게 아니라 동쪽 통로의 관측값이 늦습니다. 시계가 0.8초 앞서 있습니다.”

드론이 통로 끝을 확인했다.

“감사 대상은 사람의 이동이 아니라 시계의 순서입니다.”

잠시 뒤 렌즈의 붉은 빛이 꺼졌다. 드론은 천장으로 올라갔다. 준서는 손바닥에 밴 땀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관리 통로 밖에는 푸른 조명이 흐르는 중앙 홀이 있었다. 직원들은 투명한 벽면 기록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람의 이름보다 시각과 좌표가 크게 표시됐다.

준서는 감사관 권한으로 지하 보관실 목록을 열었다. 13번 기록 보관실의 접근 순서가 이상했다. 23시 12분에 열린 문이 23시 11분에 닫힌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상세 로그에는 1초 공백이 세 번 반복됐다.

본부 기록에서 보았던 공백과 같은 모양이었다.

윤해진의 이름을 검색하자 보안 기록관 직책 아래 두 겹의 접근 권한이 나타났다. 대사관 직원이면서 관측망의 오류를 직접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13번 기록 보관실에 비인가 접근이 감지됐습니다.”

안내 방송이 바뀌었다. 누군가가 준서의 검색을 본 것이다. 아니면 도착 기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준서는 감사관 신분을 앞세워 계단으로 향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대사관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위기 요소의 손

13번 보관실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틈 사이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준서는 권총을 뽑지 않고 손전등부터 껐다. 보관실 중앙에 검은 외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손에는 납작한 저장판이 들려 있었다.

“윤해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보안 기록관의 접근 키를 가지고 경보 뒤에도 도망치지 않은 사람. 준서는 그가 목표임을 판단했다.

“보안 감사관이라면 출발 기록부터 보여 주십시오.”

“저장판을 내려놓으세요.”

“그 명령은 누구에게서 받았습니까?”

윤해진의 시선이 준서의 가슴으로 내려갔다. 옷 아래 숨긴 공명 코어를 본 듯했다.

준서는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윤해진의 손가락이 저장판 가장자리를 눌렀다. 폭발 장치라면 그렇게 누를 이유가 없었다. 저장판 표면에 관측 순서 그래프가 나타났다.

“36시간 뒤 폭발한다는 예측을 봤습니까?”

“확인했다.”

“그 예측은 여기서 만들어졌습니다.”

“당신이 만들었나?”

“아니요. 바뀐 겁니다. 누군가 실제 관측 순서를 한 칸씩 밀어 올려서 폭발이 이미 예정된 것처럼 만들었어요.”

그래프에는 13번 보관실의 기록이 23시 11분과 23시 12분 사이에서 겹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예측 모델은 그 겹침을 사건의 반복으로 읽고 있었다.

“기록을 훔치고 있군.”

“훔치는 게 아니라 원본을 빼내는 겁니다.”

윤해진이 저장판을 품에 넣었다. 그 순간 보관실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내부 보안팀입니다. 손을 보이십시오.”

준서는 윤해진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윤해진은 몸을 낮추며 회전했고 준서의 팔꿈치를 밀어냈다. 훈련받은 움직임이었다. 두 사람의 어깨가 저장 장치에 부딪혔다. 푸른 빛이 흔들리고 보관실 전체의 기록이 끊겼다.

보안 요원 셋이 전기봉을 들고 들어왔다. 헬멧에는 준서와 윤해진의 얼굴이 동시에 침입자로 떠 있었다.

“둘 다 무릎 꿇어!”

윤해진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저장판을 향해 몸을 던졌다. 준서는 전기봉을 피하며 한 요원의 손목을 꺾었다. 전류가 바닥으로 튀었다. 다른 요원이 압축탄을 쏘자 준서는 기록 선반 뒤로 굴렀다.

탄이 선반을 스치며 기록 원통 하나를 깨뜨렸다. 공중에 떠오른 기억 패턴들이 검은 조각처럼 흩어졌다.

윤해진은 저장판을 움켜쥔 채 비상문으로 달렸다.

“윤해진!”

남자가 돌아보았다.

“당신이 보고받은 사람이 사람을 지키러 왔다고 믿습니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윤해진은 비상문을 밀었다. 문 너머 계단이 대사관 외부 광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준서는 그를 쫓았다. 복도 끝에서 한 발만 쏘면 윤해진은 쓰러질 것이다.

하지만 준서는 방아쇠에 손을 올리지 않았다.

저장판에는 폭발 장치가 없었다. 대신 누군가가 바꾼 기록이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 윤해진은 위기 요소가 아니라 증인이었다.

같은 얼굴

비상문이 열리자 차가운 비가 쏟아졌다.

아르카 대사관은 둥근 광장 한가운데 세워져 있었다. 빗물 위로 도시의 광고 신호가 번졌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운송선이 낮은 굉음을 남겼다.

윤해진은 광장 북쪽의 보행교로 향했다. 준서는 추적 신호를 공명 코어에 저장했다. 사살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했다. 명령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표적을 제압하지 않았습니다.”

준서는 본부 통신을 열었다.

대답 대신 잡음이 돌아왔다. 잠깐 여자의 숨소리처럼 들리는 음성이 섞였다. 한 음절이었다. 준서는 주변을 살폈다.

광장에는 대사관 직원과 시민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중 한 남자가 유리 차양 아래 서 있었다. 검은 외투에 젖은 머리. 오른손으로 저장판이 놓였을 법한 가슴을 누르는 습관.

준서는 그 얼굴을 보았다.

윤해진이었다.

아니었다. 보행교로 달아나는 남자도 윤해진의 얼굴이었다. 유리 차양 아래의 남자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대사관 출입 배지는 달고 있지 않았다. 그는 준서와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두 얼굴이 같은 비 속에 있었다.

준서는 권총을 내리지도 올리지도 못했다.

공명 코어의 화면에 도착 기록이 깜빡였다. 기록자 한준서. 도착 시각 23시 29분. 그 아래에 1초보다 짧은 빈칸이 생겼다.

보행교의 윤해진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유리 차양 아래의 남자는 반대편 지하철 입구로 몸을 돌렸다.

귀환 창까지 18시간 59분.

준서는 이 세계에서 누구를 쫓아야 하는지 선택해야 했다. 본부가 지정한 위기 요소인지 대사관 기록을 바꾼 내부자인지 아니면 같은 얼굴을 가진 또 다른 사람인지.

그가 지하철 입구로 한 발 내딛는 순간 대사관의 모든 감시등이 동시에 켜졌다.

목표 지구가 준서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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