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칸짜리 인벤토리로 탑을 오른다

1화: 버림받은 짐꾼
서울 동부 탑 관리국 제3입장 대합실은 언제나 비릿한 소독약 냄새와 형광등 거리는 소리로 차 있었다.
매달 찾아오는 탑의 강제 소환 기한이 다가올수록 대합실 안의 공기는 무겁게 진흙처럼 가라앉았다. 수백 명의 각성자가 제각기 무기를 정비하고 방어구를 조이는 소리 속에서 도윤은 구석진 벤치에 앉아 낡은 작업 장갑을 고쳐 끼고 있었다.
“어이, 한도윤 씨.”
손가락 마디가 드러난 작업 장갑 위로 묵직한 가죽 장화가 툭 걸렸다. 도윤이 고개를 들자 붉은 코팅 가죽 갑옷을 입은 거구의 남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22공략대의 강 팀장이었다.
“강 팀장님. 입장 20분 전입니다. 보급품 상자 배분은 이미 끝냈습니다.”
도윤이 벤치 옆에 정돈해 둔 세 개의 무거운 천 가방을 가리켰다. 하지만 강 팀장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 뒤에 서 있는 세 명의 대원들도 도윤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계약은 여기서 취소야.”
강 팀장이 품 안에서 얇은 계약서 종이를 꺼내 도윤의 발밑으로 던졌다.
“뭐라고요?”
“말 그대로다. 자네 인벤토리 슬롯이 한 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장비를 나누다 보니 도저히 계산이 안 서. E급 짐꾼이라도 최소한 포션 두 상자와 비상 식량 뭉치는 슬롯에 넣어 둬야 할 거 아닌가.”
“어깨 가방 두 개와 등짐을 제가 직접 짊어지기로 합의했습니다. 보급 담당으로서 제 체력 스탯은 인벤토리 대신 물리적 짐을 들기 위해 구른 겁니다.”
도윤이 일어서며 말했지만 강 팀장은 코웃음을 쳤다.
“몸으로 때우는 건 1층 입구까지야. 전송 중에 혹시라도 짐끈이 터지면 그 물자들은 전부 허공으로 날아가. 다른 보급 담당들은 10칸짜리 기본 슬롯에 포션 상자를 깔끔하게 압축해서 넣는다. 그런데 자네는?”
강 팀장이 검지손가락으로 도윤의 가슴을 툭 찔렀다.
“단 한 칸. 물 한 병 넣으면 붕대 한 묶음도 못 넣는 깡통 슬롯이잖아. 그런 결함품을 들고 1층 폐역 구간을 들어가겠다고? 대원들 목숨 걸린 공략에서 짐꾼 한 명 때문에 보급선이 터지는 꼴은 못 본다.”
대합실 구석에서 몇몇 공략자들이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탑이 각 도시에 내려앉은 지 18년. 각성자들에게 인벤토리 슬롯은 생존의 공간이자 부의 규격이었다. 최하 등급인 F급조차 최소 세 칸의 공간을 받았지만 도윤의 상태창에는 기이하게도 딱 한 줄만 적혀 있었다.
[고유 특성: 단일 규격(E)]
[인벤토리 슬롯: 1 / 1]
수량 증가 불가. 절대 확장 불가. 각성 검진 때 측정관조차 ‘시스템 오류에 가까운 불량품’이라 부르며 고개를 저였던 특성이었다.
도윤은 이빨을 악물었다. 모욕감은 이미 오래전에 마모된 감정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당장 오늘 밤을 버틸 최소한의 수당과 탑 안으로 들어갈 자격뿐이었다.
“일방적인 계약 파기입니다. 계약서 제7조에 따라 전송 직전 파기 시 준비금의 절반은 보상받아야 합니다.”
강 팀장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찌푸려졌다.
“지금 돈을 요구하는 건가?”
“제가 짊어질 예정이었던 공용 보급품 중 제 개인 지분으로 사들인 붕대와 식수 세 묶음 값입니다. 안 주시면 관리국 감독관에게 계약 위반 신고를 넣고 게이트 통과를 블로킹하겠습니다. 팀장님 공략대도 30분 안에 입장하지 못하면 강제 소환 위반 벌금을 물게 될 텐데요.”
강 팀장은 혀를 쯧 차며 주머니에서 빛이 바랜 은화 세 장과 소액 화폐를 도윤의 가슴 팍에 냅다 던졌다.
“거지 같은 놈. 그래, 챙겨라 챙겨. 혼자 1층 들어가서 그 한 칸짜리 주머니에 든 게 없어서 어떻게 뒤지는지 보자고.”
강 팀장과 대원들이 침을 뱉듯 돌아서서 전용 팀 게이트로 향했다.
도윤은 바닥에 떨어진 은화와 화폐를 조용히 拾어 주머니에 넣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지만 그는 곧바로 숨을 가다듬었다. 굴욕에 흔들릴 시간은 없었다.
자신의 옷 안쪽 주머니에는 낡은 가죽 지갑과 함께 3년 전 탑 37층에서 실종된 형 한재민이 남긴 유일한 유품이 들어 있었다. 찢어진 지도 조각. 그 종이 모서리에는 형의 친필로 아주 작게 적힌 구절이 있었다.
‘빈칸은 문이 된다.’
그게 무슨 뜻인지 도윤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형이 증발한 그 탑으로 들어가려면 그리고 남아있는 가문의 빚을 갚으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1층의 문을 넘어야 했다.
“1층 개인 입장 신청자 한도윤 씨, 4번 게이트로 이동하십시오.”
스피커에서 건조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도윤은 대합실 구석의 거대한 보급 가방 세 개를 미련 없이 포기했다. 그가 챙긴 것은 허리춤의 작은 가죽 주머니, 낡은 단검 하나, 손에 쥐어진 반쯤 남은 플라스틱 물병 그리고 형의 지도 조각뿐이었다.
그는 낡은 작업 장갑을 단단히 고쳐 쥐고 푸른빛이 일렁이는 개인 게이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시야가 강렬한 실버빛으로 덮였다가 무겁게 꺼졌다.
지독한 이명과 함께 몸 전체가 아래로 수직 낙하하는 느낌이 덮쳤다. 탑으로의 전송 과정이었다. 귓가에서 바람 소리가 지나가고 억눌린 쇳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쿠웅!
단단한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도윤은 무릎을 꿇으며 바닥을 짚었다. 지독한 습기와 붉은 녹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아…… 하아……”
도윤은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조명 하나 없는 널찍한 지하 공간. 발 밑에는 두 갈래로 길게 뻗은 철로가 바스러진 자갈 사이에 묻혀 있었다. 18년 전 탑이 현실의 서울 일부를 삼켰을 때 통째로 굴착되어 탑 1층으로 변환된 구 서빙고 폐역 구간이었다.
축축한 공기 속에서 멀리 철로 깊은 곳으로부터 쇳가루가 쓸리는 듯한 기분 나쁜 마찰음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도윤은 즉시 주머니를 뒤졌다. 탑으로 들어오면서 현실에서 들고 온 물건들은 시스템의 법칙에 따라 변환되거나 일부 손상된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오른손에 낀 낡은 가죽 작업 장갑.
둘째, 형의 유품인 찢어진 지도 조각.
셋째, 반쯤 남아있는 500ml 플라스틱 생수병.
그리고 도윤의 시야 한구석에 붉은색 경고창이 들어왔다.
[경고: 허용된 인벤토리 슬롯 외의 휴대 물품이 존재합니다.]
[단일 규격 특성에 따라 1개의 항목만 슬롯에 등록할 수 있습니다.]
[등록되지 않은 소지품은 외부 환경에 노출되며 몬스터의 공격이나 환경 오염으로 파손될 수 있습니다.]
탑 내부의 규칙이었다. 인벤토리 슬롯에 넣지 않은 물건은 손에 쥐고 있거나 몸에 둘러야 하며 물리적 충격에 그대로 파괴된다.
슬롯은 단 한 칸.
도윤은 입술을 바짝 태우며 세 가지 물건을 바라보았다.
지도 조각은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되는 유품이었다. 하지만 지도는 얇은 종이여서 옷 안쪽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고 단단히 단추를 잠그면 당장 손에 쥐지 않아도 보관이 가능했다.
작업 장갑은 손에 끼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남은 것은 반 병 남은 물이었다. 식수가 부족한 1층 폐역에서 플라스틱 물병을 들고 다니다가 몬스터의 습격을 받거나 붉은 녹가루에 오염되면 그대로 생존 가능성이 날아가 버린다.
도윤은 플라스틱 물병을 손에 쥐고 의식을 집중했다.
‘인벤토리 저장.’
위잉.
시야에 투명한 사각형 슬롯 창이 하나 떠올랐다. 도윤의 손에 있던 플라스틱 물병이 빛으로 산화하더니 슬롯 안으로 쏙 들어갔다.
[슬롯 1/1: 미량의 생수 (500ml 플라스틱 병 - 잔량 40%)]
그게 끝이었다. 슬롯 창은 곧바로 닫히며 붉은 보관 불가능 표식을 띄웠다.
도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머니의 은화 한 장을 꺼내 슬롯 창에 대 보았지만 거칠게 튕겨 나왔다.
[경고: 인벤토리 용량 초과.]
[슬롯이 이미 차 있습니다. 기존 물품을 비우거나 파기하십시오.]
“……역시나인가.”
도윤은 씁쓸하게 읊조렸다. 혹시 탑 안에 들어오면 숨겨진 슬롯이 늘어난다거나 하는 기적 따위는 없었다. 시스템은 여전히 냉혹했고 그에게 허용된 보관함은 딱 물병 하나 크기의 한 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기이이익-!
철로 저편 어둠 속에서 쇠가 긁히는 소리가 아까보다 한층 가까운 곳에서 울렸다. 붉은 녹이 슨 폐기차 잔해 너머로 무언가 눅눅한 자갈을 밟으며 기어오는 소리였다.
도윤의 등골로 서늘한 소름이 돋아났다.
짐꾼으로 수년간 굴러먹은 직감이 위험 신호를 울렸다.
1층 폐역의 주요 몬스터는 붉은 녹을 먹고 자란 폐역 쥐떼와 변종 철강 지네였다. 조명이 완전히 꺼진 구간에서 녀석들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E급 각성자에게 자살 행위였다.
‘첫 번째 목표는 안전지대다.’
입장 전에 짐꾼용 안내서에서 읽었던 기억을 되살렸다. 1층 폐역 구간은 구조가 복잡하지만 옛 매표소와 환승 통로 부근에는 공략자들을 위해 은색 룬 문자가 새겨진 임시 대기소 결계가 설치되어 있다. 거기까지 가야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도윤은 신발끈을 바짝 조여 매고 벽면에 손을 댔다.
벽을 덮은 붉은 녹가루가 손가락 끝에 서늘하게 묻어났다. 그는 시각 대신 손끝의 감각과 철로의 결을 따라 천천히, 그러나 신속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어둠 속을 걷는 동안 철로 너머에서 들려오는 마찰음은 점점 거칠어졌다. 촤악,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눅눅한 쥐 냄새와 썩은 철 비린내가 공기를 채웠다. 놈들이 그를 냄새로 추적하고 있었다.
도윤은 숨을 죽이고 바닥에 넘어진 철제 이정표를 뛰어넘었다.
‘조금만 더 가면 옛 환승 계단이다.’
그때 발끝에 무언가 턱 걸렸다.
덜컹!
“윽!”
바닥에 떨어져 있던 녹슨 철파이프 조각을 밟은 것이었다. 요란한 금속음이 정적에 싸여 있던 폐역 통로에 울려 퍼졌다.
끼에에에엑-!
즉시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붉은 안광 수십 개가 철로 저편 기차 잔해 사이에서 일제히 켜졌다. 폐역 쥐떼였다.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크기에 붉은 녹가루를 뒤집어쓴 쥐들이 자갈을 튀기며 도윤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쯧!”
도윤은 망설이지 않고 튀어나갔다.
뒤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는 짐꾼 시절 무거운 가방을 매고 산길을 뛰던 기억을 되살려 발을 굴렀다. 어둠 속에서 녹슨 의자와 부서진 승차권 발매기 잔해가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발밑에서 쥐들의 이빨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바짝 추격해 왔다. 도윤은 전방 벽면에 희미하게 빛나는 옅은 은빛 문양을 발견했다.
‘매표소다!’
벽면 콘크리트에 새겨진 은색 룬 문자가 은은한 결계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임시 대기소 표식이었다.
도윤은 부서진 매표소 유리창 틀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당!
그가 낡은 방음벽 차단막을 뚫고 매표소 안쪽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순간, 뒤따라오던 쥐떼가 매표소 입구로 돌진했다.
파지직-!
은색 룬 문자에서 튀어나온 푸른 전류가 쥐떼의 주둥이를 거세게 튕겨 냈다. 쥐들은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매표소 입구 둘레를 배회하다가 천천히 철로 저편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하아…… 하아…… 하아……”
도윤은 룬 결계 안쪽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땀과 붉은 녹가루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무릎과 팔꿈치가 바닥에 긁혀 쓰라렸지만 목숨은 건졌다.
그는 결계 벽면에 기댄 채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지독한 갈증이 목구멍을 죄어 왔다. 전송의 충격과 어둠 속에서의 질주로 몸 안의 수분이 완전히 말라붙은 상태였다.
도윤은 의식을 끌어올려 인벤토리 창을 열었다.
[슬롯 1/1: 미량의 생수 (500ml 플라스틱 병 - 잔량 40%)]
생수병을 꺼내 뚜껑을 열자 바닥에 아주 조금 남아있는 물이 흔들렸다. 겨우 두 모금이나 될까 말까 한 양이었다.
도윤은 입술을 적실 정도로만 아주 작게 한 모금을 삼켰다. 미지근한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지만 갈증을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물병에는 이제 딱 한 모금의 물만 남아 있었다.
“1층을 나갈 때까지 이 한 모금으로 버텨야 한다고?”
도윤이 허탈하게 웃으며 빈손을 바라보았다.
인벤토리 슬롯은 여전히 한 칸. 다른 어떤 물품도 보관할 수 없고 물조차 제대로 담아둘 수 없는 가혹한 조건.
그때였다.
매표소 바닥에 처박힌 찌그러진 가방 잔해 사이로, 오래전에 버려진 굵고 녹슨 대못 세 개와 깨진 유리병 조각이 도윤의 눈에 들어왔다.
기이하게도, 도윤의 작업 장갑 낀 손이 그 녹슨 못과 물병에 동시에 닿은 순간 시야 속의 슬롯 창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도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슬롯 창의 붉은 경고 메시지 아래로, 지금까지 한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묘한 시스템 문장이 아주 작게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