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 의원은 야근 중

2화: 비밀의 대가
차가운 밤바람이 열린 창틈으로 사납게 들이쳤다.
희미하게 흔들리던 등불이 한 차례 파르르 떨리다 잦아들었다. 평상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지독한 독기에 신음하며 누워 있던 복면 여인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의원 안에는 빗물에 젖은 흙먼지 냄새와 비릿한 핏자국 그리고 쓴 약향만이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강우진은 책상 위에 놓인 암호 장부를 덮었다.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장부 겉표지를 손끝으로 쓸어내리는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사흘 뒤 해시. 청하성 동문 밖 삼거리에서 청하 표국의 수레가 습격당한다.'
여인이 치료의 대가로 던져 주고 간 한 줄의 정보였다. 은전 세 냥 대신 받은 목숨값치고는 지나치게 무겁고 서늘한 비밀이었다.
우진은 걸레를 가져와 평상과 바닥에 튄 핏자국을 묵묵히 닦아 냈다. 붉은 피 속에는 검붉은 찌꺼기가 엉겨 붙어 있었다.
우진은 버리려던 사발 바닥에 고인 검붉은 핏방울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은침 하나를 뽑아 피 한가운데에 조심스럽게 담갔다.
치이익.
소름 끼치는 미세한 마찰음과 함께 은침 끝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색되었다. 단순한 흑색이 아니었다. 기름진 보랏빛이 감도는 불길한 어둠이었고 코를 찌르는 알싸한 흙냄새와 탄 쇠 냄새가 피어올랐다.
"혈육을 태우는 화독(火毒)도 아니고 오장육부를 녹이는 부식독도 아니다. 기혈의 길목에 기생충처럼 얽혀 내력을 조종하는 독기."
우진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약재함 가장 아래 칸의 이중 바닥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내려앉은 삼베 보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따리 안에는 반년 전 세상을 떠난 사부가 생전에 남긴 두툼한 진료 일지가 들어 있었다.
우진은 기름등잔을 가까이 끌어당긴 채 누렇게 바랜 일지의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마침내 반년 전 사부가 숨을 거두기 보름 전의 기록에 손가락이 멈추었다.
사부의 떨리는 필체로 적힌 글귀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기이한 독기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형상이 마치 먹물로 꼰 검은 실타래와 같다. 맑은 내공을 불어넣을수록 그 기운을 먹고 자라 심맥을 파고든다. 이것은 산천의 약초나 뱀독 따위로 만들어진 천연의 독이 아니다. 인체의 맥을 강제로 비틀고 조종하기 위해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사악한 침술의 산물이다.'
일지의 마지막 장에는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사부는 숨을 거두기 전날 밤까지도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피를 토했다. 당시 우진은 사부가 젊은 시절 겪은 극심한 내상과 폐 질환이 도져 끝내 세상을 등진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확인한 복면 여인의 독기는 사부의 일지에 적힌 증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사부님은 병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었어."
우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부의 죽음 배후에는 이 검은 실 같은 독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을 품은 여인이 한밤중 청하의원의 뒷문을 두드렸다.
우진은 품 안의 묵직한 청동 침통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의원을 물려받으며 들었던 유언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어둠이 걷히고 창호지 문 너머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새벽의 고요를 깨부수는 거친 소리가 청하의원의 정문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안에 누구 없느냐! 해가 중천에 떴는데 문도 안 열고 게으름을 피우다니! 어서 문 열어라!"
우진은 약초를 썰던 작두를 내려놓고 앞마당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험상궂은 얼굴을 한 중년 사내가 턱을 치켜들며 성큼 안으로 들이닥쳤다.
백운 약방의 수금 책임을 맡고 있는 조 행수였다. 그의 뒤편에는 몽둥이를 든 건장한 장정 둘이 험악한 기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조 행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약재 선반을 훑어보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강 의원! 오늘이 약재 외상 대금을 갚기로 한 날이라는 건 잊지 않았겠지?"
"약속한 기한은 닷새 뒤입니다. 조 행수님."
우진은 소매를 단정하게 모아쥐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열흘의 기한 중 아직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부터 장정들을 끌고 와 문을 부술 듯 두드리실 이유는 없을 텐데요."
"허! 이 양반이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네!"
조 행수가 품 안에서 구겨진 장부를 꺼내 탁자에 거칠게 내팽개쳤다.
"은전 열두 냥이야! 열두 냥! 네놈 사부가 살아 있을 때야 체면 봐서 기다려 줬다지만 이제 껍데기만 남은 이 빈털터리 의원에 누가 신용을 준단 말이냐? 당장 오늘이라도 보증금을 내놓지 않으면 내일부터 감초 한 뿌리, 지혈초 한 잎도 대어 주지 않겠다!"
"약재 공급을 끊으시겠다면 의원 문을 닫으라는 소리와 다름없습니다."
"그럼 문을 닫아야지! 돈도 없는 놈이 의원 간판은 달아서 뭣 하느냐? 닷새 뒤까지 은전 열두 냥을 완납하지 못하면 이 집문서라도 관아에 넘겨 압류할 테니 그리 알아라!"
조 행수가 침을 튀기며 우진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어머나! 아침부터 웬 까마귀가 남의 집 안마당에서 재수 없게 깍깍거린다 했더니 백운 약방 조 행수 나으리 아니세요?"
낭랑하면서도 톡 쏘는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날아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등 뒤에 큼직한 대나무 약초망태를 짊어진 처녀 하나가 씩씩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서하린이었다.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와 밤톨처럼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칼 그리고 흙 묻은 짚신이 약초꾼의 행색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린은 망태기를 바닥에 쿵 내려놓더니 조 행수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조 행수 나으리, 낯짝도 참 두꺼우시네요. 저번 달에 우리한테 사 간 야생 황기 말이에요. 썩은 뿌리 섞어서 관가 납품 약재에 몰래 끼워 넣었다가 퇴짜 맞고 벌금 낸 일은 벌써 잊으셨나 봐요?"
"뭐, 뭐라고? 이 계집년이 감히 어디서 헛소리를!"
조 행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저잣거리 약재전 골목에 가서 물어볼까요? 나으리가 장부 조작해서 뒷주머니 찬 거 우리 약초꾼들이 모를 줄 알았어요? 여기서 더 억지 부리시면 약방 대행수 어르신 댁 앞에 가서 확 나발을 불어 버릴 테니 알아서 하세요!"
"이, 망할 년이……!"
조 행수는 씩씩거리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하린의 당돌한 눈빛에 질린 듯 이내 헛기침을 하며 옷자락을 털었다.
"흥! 가난뱅이 의원에 도둑년 소굴이 따로 없군. 강 의원, 딱 닷새다! 닷새 뒤에 은전 열두 냥을 가져오지 못하면 관가 포졸들을 데리고 올 테니 각오해라!"
조 행수는 장정들을 재촉하며 꽁무니가 빠져라 의원 밖으로 도망쳤다.
소란이 잦아들자 하린은 혀를 끌끌 차며 마당에 침을 뱉었다.
"약방 수금원이라는 자가 저 모양이니 강호 약재판이 썩어 나가지. 의원님, 괜찮으세요?"
"덕분에 한숨 돌렸다. 하린아."
우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은전 열두 냥을 마련하지 못하면 당장 다음 주부터 약재가 동나겠지."
"걱정 마세요! 제가 오늘 새벽에 남쪽 뒷산 바위틈에서 캔 싱싱한 지혈초랑 단삼을 잔뜩 가져왔거든요. 이건 약방 놈들한테 넘기는 것보다 훨씬 싸게 드릴게요."
하린은 망태기에서 신선한 흙냄새가 풍기는 약초 묶음들을 쏟아 놓았다. 잎사귀마다 푸른 생기가 살아 있는 최상급 약초들이었다.
우진은 서랍에서 몇 닢 남지 않은 엽전을 꺼내 하린의 손에 쥐여 주었다.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지만 하린은 불평 한마디 없이 엽전을 주머니에 짤랑거리며 털어 넣었다.
하린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바지춤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런데 강 의원님, 요즘 남문 쪽 약초 시장 분위기가 영 흉흉해요."
"흉흉하다니?"
우진이 약초를 약장에 갈무리하다 말고 돌아보았다.
"어떤 거간꾼들이 북쪽 약재길에서 내려오는 마취약재랑 고급 지혈초를 모조리 사들이고 있대요. 값을 두 배나 쳐주면서 싹쓸이를 해 가니까 정작 우리 같은 약초꾼들은 단골 의원들에 약을 대기도 빠듯하다니까요."
우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량으로 약재를 사들이는 자들이 누구인지 아느냐?"
"얼굴을 꽁꽁 싸매고 다녀서 아무도 정체를 모른대요. 게다가 저잣거리에서는 청하 표국 소문으로 떠들썩해요. 사흘 뒤 밤에 동문 쪽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비밀 화물이 출발한다고 표사들을 삼엄하게 소집하고 있다더라고요."
사흘 뒤 밤, 동문.
하린의 입에서 나온 소문은 어젯밤 복면 여인이 던져 준 정보와 완벽하게 겹쳐 떨어지고 있었다.
우진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여인이 남긴 경고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우진은 간단한 침통과 소화제 곽을 챙겨 청하성 동쪽 저잣거리로 나섰다.
목적지는 청하 표국의 본원 관사였다. 지난달 표국의 문지기 노인에게 고질적인 관절염 약을 지어 준 적이 있었기에 표국 안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이쿠, 강 의원 아니신가. 약을 직접 가져다주시다니 고맙소."
문지기 노인은 우진이 건넨 환약을 받아들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우진은 문지기에게 약 복용법을 설명해 주는 척하며 표국 안마당의 동태를 살폈다.
안마당의 분위기는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쇠를 둘러 단단하게 보강한 대형 호송 마차 세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짐칸은 두꺼운 검은 방수포로 꽁꽁 싸매여 있었고 그 주변을 무장한 표사 수십 명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에워싸고 있었다.
표사들의 허리춤에는 번뜩이는 칼자루가 매달려 있었고 활과 쇠뇌를 점검하는 손길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안채에서 걸어 나오는 총표두의 안색 역시 굳어 있었다.
"사흘 뒤 해시. 동문 밖 길목은 안개가 짙게 깔릴 것이다. 횃불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대열을 좁혀서 신속하게 삼거리를 돌파한다. 표물에 손상이 가면 우리 청하 표국의 간판을 내려야 하니 목숨을 걸고 지켜라!"
총표두의 엄숙한 훈령이 마당을 울렸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수레는 사흘 뒤 해시에 동문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그 길목인 삼거리에서 피비린내 나는 습격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우진은 조용히 표국 관사를 빠져나왔다.
가슴속에서 거센 소용돌이가 일었다.
'관아에 밀고해야 할까? 아니면 표국 총표두에게 찾아가 습격이 있을 것이라 경고해야 할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근거가 없었다. 뒷골목의 가난한 의원이 야간에 찾아온 정체불명의 부상자에게 들었다고 말한다면 믿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살수들과 내통한 첩자로 몰려 고문을 당하거나 야진의 규칙을 깨뜨려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뿐이었다.
'의원은 환자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다.'
사부가 남긴 철칙이었다. 밤의 강호에서 신뢰를 잃은 의원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다. 환자의 비밀을 팔아 권력이나 돈을 쥐려는 순간 그 의원은 강호의 암투 속에 피를 뿌리며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십 명의 무고한 목숨이 도륙당하는 광경을 방관해야 하는가?
우진은 걸음을 멈추고 붉게 물들어 가는 청하성의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가라앉았다.
"비밀을 누설해 환자를 배신하지도 않고 정보를 팔아 잇속을 챙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죽어 나갈 자리를 뻔히 알면서 약망태를 내려놓는 것은 의원의 길이 아니다."
우진은 의원으로 돌아와 채비를 시작했다.
그는 낡은 목간통에 굵은 삼베 붕대를 가득 채웠다. 독기를 지연시킬 해독 가루와 지혈 분말 그리고 마취 약재를 정성껏 빻아 가죽 주머니에 나누어 담았다.
품 안에는 사부의 청동 침통을 단단히 찔러 넣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였다. 칼을 쥐고 싸우는 무인이 아니라 상처를 꿰매고 숨을 틔우는 의원으로서 그 현장에 서는 것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밤인 해시(亥時).
청하성 동문 밖은 짙은 강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달빛조차 먹구름에 가려져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어둠이었다. 축축한 밤공기는 살을 에는 듯 차가웠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스산한 바람 소리만이 삼거리 고갯길을 채우고 있었다.
우진은 삼거리가 내려다보이는 비탈진 언덕배기 바위 뒤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짙은 갈색 삼베 도포를 뒤집어쓴 채 숨을 죽이고 있는 그의 어깨 위에는 묵직한 구급 약망태가 매달려 있었다. 긴장감 탓에 손끝이 차게 식어 들어갔지만 우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저 멀리 동문 쪽에서 덜컹거리는 수레바퀴 소리가 안개를 뚫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끼이익, 덜컹.
검은 천막을 씌운 청하 표국의 호송 마차 세 대가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횃불을 최소한으로 줄인 탓에 마차 앞뒤를 호위하는 표사들의 모습은 검은 그림자처럼 일렁였다.
마차가 삼거리의 한가운데이자 양옆으로 우거진 잡목림 사이로 막 접어든 순간이었다.
우진의 귓가에 숲속의 풀벌레 소리가 일제히 뚝 끊어지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살기(殺氣)였다.
피를 갈망하는 날카롭고 서늘한 기운이 숲 전체를 짓눌렀다.
쉬이익! 콰아앙!
어둠을 찢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불화살 수십 발이 밤하늘을 수놓으며 호송 마차의 지붕에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크아악!"
"적습이다! 표물을 결사 호위하라!"
비명과 함께 붉은 불길이 안개 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그와 동시에 길 양옆의 우거진 숲속에서 검은 복면을 쓴 무리들이 그림자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곡도(曲刀)가 핏빛 불꽃을 튕기며 표사들의 목덜미를 베어 넘겼다.
챙! 카강! 서걱!
살점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참혹한 소리가 계곡을 뒤흔들었다.
어둠 속에서 지켜보던 우진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여인의 예고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강호의 거대한 살육과 암투가 마침내 청하성 뒷골목 의원의 눈앞에서 피비린내를 뿜어내며 터져 나가고 있었다.
우진은 약망태의 끈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마침내 의원의 야근이 시작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