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법 도서관의 심야 사서

1화: 반납함에 들어온 제목 없는 책
해온시 공공도서관의 폐관 방송이 1층 천장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이용자 여러분께 안내드립니다. 도서관은 곧 문을 닫습니다. 대출과 반납을 마치지 못한 분께서는 안내 데스크로 와 주십시오.”
한이든은 방송이 끝난 뒤에도 반납함 앞을 떠나지 않았다.
창밖의 비가 유리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가로등은 물웅덩이 위에서 길게 흔들렸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이용자들은 우산을 펴며 현관을 빠져나갔다.
이든은 그들이 모두 나간 것을 확인한 뒤 반납함의 잠금 레버를 내렸다. 금속판이 내려가자 안쪽에 쌓인 책들이 둔탁하게 부딪혔다.
“오늘은 많지 않네.”
그는 혼잣말을 하며 책을 한 권씩 꺼냈다.
젖은 표지에는 마른 수건을 대고 긁힌 바코드는 수기 대장에 따로 적었다. 장서 번호가 맞지 않는 책은 오른쪽 카트에 세웠다. 다음 날 누군가 다시 확인해야 하는 책들이었다.
이든의 손은 피곤할수록 정확해졌다. 반납 상태를 확인하고 대출 기록을 지우고 분류표에 맞춰 카트를 나누는 일은 몇 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한서윤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응. 아직 도서관이야.”
“또 늦어? 오늘은 일찍 온다며.”
“반납 정리만 끝내고 갈게. 십 분이면 돼.”
“오빠가 말하는 십 분은 늘 한 시간인 거 알지?”
서윤의 핀잔 끝에는 웃음이 묻어 있었다. 이든은 텅 빈 로비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오늘은 진짜야. 집에 가서 네가 사 온 만두도 먹을게.”
“그럼 우산 챙겨. 현관 옆에 낡은 책갈피 하나 있던데 오빠 물건 맞아?”
“책갈피?”
“검은 종이에 은색 선이 그어진 거. 어릴 때부터 네 책상 서랍에 있던 거랑 비슷해.”
이든은 안내 데스크 위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쓰던 서랍에는 오래된 책갈피가 하나 있었다. 서윤이 어릴 때 주워 온 물건이었다. 얇은 검은 종이 위에 은빛 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지만 글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내 거 맞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집에 가져갈 거면 잊지 마. 그리고 오늘은 꼭 전화해.”
“알았어. 십 분 뒤에—”
통화가 끊겼다.
이든은 한숨을 삼키고 남은 책을 꺼냈다. 계약 만료까지 열하루가 남아 있었다. 연장 여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야간 정리를 아무리 맡아도 정규직이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미등록 도서를 다음 근무자에게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반납함 가장 안쪽에서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이든은 손을 멈췄다.
검은 책 한 권이 다른 책들 아래 눌려 있었다. 비에 젖은 책도 아닌데 표지는 물기를 머금은 것처럼 빛을 삼켰다. 제목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자명도 출판사 표기도 없었다.
책을 뒤집어도 바코드는 나오지 않았다.
“이런 책이 도서관에 있었나?”
이든은 책을 카트에 올리지 않고 안내 데스크로 가져갔다. 장서관리 단말을 켜고 표지의 특징을 입력했다. 검은색 표지. 가로 이십이 센티미터. 세로 삼십 센티미터. 페이지 수 확인 불가.
검색 결과는 0건이었다.
“당연히 없겠지.”
그는 임시 등록번호를 만들려다 멈췄다. 책등이 지나치게 매끈했다. 여러 번 펼친 책이라면 남아야 할 접힌 자국이 없었다. 가장자리를 만져도 종이와 가죽 중 어느 쪽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규정대로라면 유실물 보관함에 넣고 다음 날 담당자에게 보고하면 된다.
이든은 책을 덮었다.
책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천천히 표지를 열었다. 첫 장은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 글자도 선도 없었다.
그런데 빈 여백 한가운데에 검은 얼룩이 번졌다.
한이든.
자신의 이름이었다.
이든은 손가락을 떼었다. 이름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사라졌다. 흔적조차 남지 않은 빈 페이지가 그 자리에 있었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그는 안경을 벗어 렌즈를 닦았다. 다시 책장을 펼쳤지만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페이지 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아주 먼 곳에서 누군가 책을 넘기는 소리였다.
이든은 책을 닫고 유실물 보관함으로 향했다.
그 순간 도서관 깊숙한 곳에서 반납함의 금속판이 다시 들렸다.
철컥.
도서관 안에는 자신밖에 없었다.
이든은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경비실 호출 버튼을 누르려던 손이 멈췄다. 안내 데스크 뒤의 전등 하나가 깜빡였다. 꺼진 서가 쪽 통로에 가느다란 검은 선이 생겨 있었다.
검은 선은 서가와 서가 사이의 틈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든은 그곳의 구조를 알고 있었다. 벽과 고정 서가 사이에는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는 책을 품에 끌어안았다.
“누가 들어온 거라면 먼저 확인해야 해.”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텅 빈 로비에서 낯설게 울렸다.
이든은 비상 손전등을 켜고 통로로 걸어갔다. 서가 옆면의 번호를 비췄다. 3열 14번. 3열 15번. 두 서가 사이의 간격은 고작 손바닥 하나였다.
검은 선은 그 틈 안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 걸음 다가가자 책 표지가 품 안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책장이 저절로 펼쳐졌다.
이번에는 이름 대신 짧은 문장이 나타났다.
반납할 책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이든은 숨을 삼켰다.
뒤에서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서윤의 메시지였다.
오빠? 아직이야? 비 더 세졌어.
이든은 잠시 망설이다 답장을 남겼다.
곧 갈게. 책 하나 확인하고 있어. 집에 가면 바로 전화할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무전기를 켜고 경비실 호출 채널을 열었다.
“1층 사서 한이든입니다. 서가 쪽에 이상—”
무전기에서 잡음이 터졌다.
치직.
곧이어 낯선 종소리가 들렸다. 실제 도서관의 호출음과 달랐다. 맑고 깊은 음이 벽 너머에서 울리며 서가의 책들을 한 권씩 떨게 했다.
검은 선이 벌어졌다.
틈 사이로 어둠 대신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별빛처럼 작은 점들이 떠 있었고 그 아래로 책등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늘도 바닥도 보이지 않았다. 책장들이 서로 다른 높이에서 겹쳐지고 있었다.
이든은 뒤로 물러섰다.
눈앞의 풍경은 해온시 공공도서관의 어떤 설계도에도 존재할 수 없었다.
그는 경비실에 다시 연락하려고 했다. 손에 쥔 무전기의 화면에는 아무 글자도 표시되지 않았다. 휴대전화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 잡히던 신호가 사라졌다.
검은 책의 첫 장에 검은 잉크가 다시 번졌다.
한이든.
이번에는 이름 아래에 네모난 빈칸이 생겼다. 빈칸 옆에는 누군가 도장을 찍을 자리처럼 작은 원이 그려졌다.
책장 안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종이 냄새가 났다. 오래된 책의 먼지 냄새와 새 책의 풀 냄새가 동시에 섞여 있었다.
이든은 서윤의 메시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곧 갈게.
그 약속을 지키려면 지금 문을 닫고 경비실에 연락해야 했다. 하지만 검은 책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증거가 필요했다. 위험한 물건이라면 더더욱 손에서 놓아서는 안 됐다.
그는 책을 품에 안은 채 문턱 앞에 섰다.
바닥에는 자신이 본 적 없는 반납 도장이 찍혀 있었다. 동그란 테두리 안에 글자 대신 비어 있는 사각형이 새겨져 있었다.
이든은 손전등을 문 안쪽으로 비췄다. 빛이 닿은 곳에 좁고 긴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 끝에는 작은 안내 데스크가 있었고 그 위에는 켜지지 않은 램프가 놓여 있었다.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들자 발이 더 무거워졌다.
“한 번만 확인하고 돌아온다.”
이든은 문틀을 잡았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책 표지를 만졌을 때와 같은 온도였다.
그가 발을 내딛는 순간 뒤쪽에서 서가가 크게 울렸다.
문이 닫히려 하고 있었다.
이든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현실의 로비가 보였다. 젖은 유리문과 꺼진 안내 데스크가 보였다. 서윤에게 보낸 메시지가 아직 화면에 남아 있는 휴대전화도 보였다.
그는 손을 뻗었지만 문은 이미 절반 이상 닫혀 있었다.
검은 책이 품 안에서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든은 책을 놓지 않았다. 한 손으로 책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문틈을 붙잡았다.
“잠깐만. 아직 반납 처리가 안 됐어.”
문 너머에서 종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닫히던 문이 멈췄다.
이든은 그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발밑의 복도가 갑자기 사라졌다.
비명은 목구멍에서 나오기도 전에 바람에 흩어졌다. 그는 끝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양옆으로 수많은 책장이 스쳐 지나갔다. 책등의 글자들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보였다가 낯선 기호로 뒤집혔다. 어떤 책에서는 바다 냄새가 났고 어떤 책에서는 불에 탄 풀 냄새가 났다.
이든은 검은 책을 놓치지 않으려고 팔을 조였다.
휴대전화가 손에서 빠져나갔다. 화면에 서윤의 새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빠?
그 한 글자를 마지막으로 화면이 어두워졌다.
쿵!
등이 단단한 바닥에 부딪혔다.
이든은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손전등은 깨져 있었고 무전기는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에는 천장이 없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원형 서고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책장들은 달과 별처럼 둥글게 이어져 위로 솟아 있었다. 멀리서 다른 통로들이 공중을 가로질렀고 그 사이로 작은 종이 새들이 날아다녔다.
도서관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컸다.
이든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주웠다. 화면에는 시간이 표시되지 않았다. 통화도 메시지도 모두 먹통이었다.
그때 손등이 뜨거워졌다.
피부 위로 붉은 선이 번지더니 작은 도장 모양을 이루었다. 선 안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가 떠올랐다. 검은 책의 첫 장에서도 잉크가 번졌다.
빈칸 안에 글자가 채워졌다.
심야 사서.
이든은 그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 채 책을 덮었다.
원형 서고 어딘가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위로 자정의 종이 울렸다. 현실에서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깊은 울림이었다.
수천 개의 책장이 동시에 깨어나는 소리 같았다.
이든은 검은 책을 가슴에 붙들었다. 집에 가겠다는 약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서 있는 곳에는 집으로 이어지는 문 대신 끝없는 서가와 낯선 발소리만 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손등의 인장이 한 번 더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