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의 오컬트 요괴 탐정

4화: 특수본 팀장의 노크
비 내리는 강남의 새벽은 차가운 네온사인의 붉은 잔영만을 축축한 길바닥에 게워 내고 있었다.
빌딩 숲 구석진 3층 무진 탐정 사무소의 조명은 낮은 수묵화처럼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한도진은 납판 감식대 위에 놓인 타다 남은 종이 조각을 차분하게 내려다보았다. 강변 물류창고의 불길 속에서 아린의 환술 덕분에 겨우 건져 낸 유일한 물증이었다.
종이 바닥에는 짙은 검은색 먹물처럼 번진 익명 결재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 표면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보랏빛 마기는 도진의 붉은 자외선 렌즈에 스칠 때마다 미세하게 요동쳤다.
[오컬트 루미놀 반응 A 가동.]
[익명 결재 인장 표면 파장 정밀 분석 중.]
[희토류 촉매 마기와 동조율 94.2%.]
도진은 식어 버린 캔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씁쓸한 카페인이 혀끝을 적시는 순간 계단 쪽에서 둔탁한 발소리가 울렸다. 세 번의 짧은 두드림과 두 번의 묵직한 노크. 미리 약속된 특수본의 비공식 신호였다.
문이 열리며 젖은 코트 자락을 털어 내는 서아린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붉은 봉인인과 특수본 5팀의 직인이 이중으로 눌린 검은 가죽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특수본 전용 통신기는 아지트 입구의 전파 차단함에 넣었어요. 이제 한 시간 동안은 상부에서 제 위치를 추적할 수 없을 거예요.”
아린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와 함께 억눌린 분노가 진하게 묻어났다. 그녀는 가방을 감식대 위에 내려놓고 특수 기호로 조합된 쇠 잠금장치를 풀었다.
도진은 서류 가방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마학적 압박감을 즉각 감지했다.
“공식 보고서를 제출하자마자 상부에서 기안을 덮었나?”
“덮는 수준이 아니에요. 5팀에서 관리하던 미제 실종 사건 파일 12건이 전부 '보안 등급 재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열람 불가 처리가 됐어요. 담당 수사관이었던 제 접근 권한까지 빼앗으면서요.”
아린이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 펼쳤다. 종이 가장자리마다 붉은색 결재 거부 도장과 '영구 미제'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도진은 서류 제일 위에 붙은 사진들을 하나씩 훑어 내려갔다. 강남 일대의 IT 업체 계약직 청년들, 늦은 밤 홀로 퇴근하던 물류 창고 직원들 그리고 신원 불상의 젊은 인부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정식 오컬트 기구에 등록되지 않은 '미량 마력 적응자'라는 사실이었다.
“이 사람들이 전부 타다 남은 장부 조각에 적혀 있던 실종자 이름들인가?”
“맞아요. 경찰 기록에는 단순 가출이나 자진 잠적으로 처리된 사건들이죠. 하지만 그들이 사라진 직후 강남 지하 암시장에 고순도 정수 앰풀과 청정 심장 코어가 출품됐어요.”
아린의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번뜩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사건 파일 중 하나를 강하게 눌렀다.
“특수본 상부는 이 사건들의 공통점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수사를 진행하려 할 때마다 '국익과 요괴 자치령과의 외교적 마찰'을 핑계로 서류를 찢었습니다. 백설하 같은 자금 조달책이 마음 놓고 인간들을 사냥할 수 있었던 건 뒤에서 판을 깔아 준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도진은 말없이 캔커피 캔을 구겨 놓았다. 차가운 알루미늄이 일그러지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고위직 귀족 요괴들이겠지. 수명을 연장하고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인간의 정수를 정제해 마시는 놈들.”
“그 놈들의 입에 음식을 대어 주는 식당이 바로 클럽 헤븐이에요.”
아린이 파일 중간에서 검은색 재질의 카드 키 하나를 꺼내 올려놓았다. 카드 키 전면에는 보랏빛으로 칠해진 뱀과 여우의 얽힌 문양이 각인되어 있었다.
“클럽 헤븐 지하 3층 VVIP 경매장 출입 키예요. 3년 전 특수본 비밀 공작으로 확보했던 건데 상부의 압력으로 현장 급습이 취소되고 봉인되어 있던 걸 제가 오늘 몰래 들고 나왔어요.”
도진은 카드 키와 타다 남은 장부 조각을 가까이 붙였다. 그러자 카드 키의 뱀 문양 눈동자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며 장부의 익명 인장과 완벽히 겹쳐졌다.
[격자선 동조 확인.]
[클럽 헤븐 지하 3층 멸균 보관실 마기 파장과 일치.]
아린이 굳은 표정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이 파일을 특수본 밖으로 유출한 시점에서 저는 항명죄로 직위 해제될 수 있어요. 관리청 사법 경찰이 절 쫓아올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되돌아갈 생각은 없겠군.”
“없어요. 혼혈이라는 이유로 특수본 내에서 숱한 경멸을 견뎌 왔지만 인간의 장기와 정수를 고기처럼 거래하는 놈들을 방관하려고 뱃지를 단 게 아니니까요.”
도진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특수 서체 펜을 꺼냈다. 그는 서류 가방의 붉은 봉인인 위에 펜 끝을 대고 미세하게 마력을 주입했다.
“그럼 시작하지. 네가 들고 온 짐이 얼마나 묵직한지 계산해 볼 테니까.”
[프로파일링 시뮬레이션 P 가동.]
감식실 중앙의 공기가 일렁이며 허공에 3차원 입체 지도가 펼쳐졌다.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에 솟아오른 50층짜리 유리 빌딩의 단면도가 뼈대만 남아 투명하게 드러났다.
빌딩의 지하 깊은 곳, 일반 엘리베이터로는 내려갈 수 없는 지하 3층 공간에 보랏빛 안개가 빽빽하게 차 있었다. 지도 위로 붉은 점들이 유기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클럽 헤븐의 지상층은 단순한 고급 디스코텍이야. 하지만 지하 1층은 마약 유통로, 지하 2층은 요괴 전용 카지노 그리고 지하 3층은 인간의 정수와 코어를 경매하는 도살장이지.”
도진의 지적에 아린이 입체 지도의 지하 3층 입구를 확대했다.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통로는 화물 전용 승강기 하나뿐이에요. 거기를 지키는 건 300년 묵은 흡혈귀 경비원들과 백여우 계열의 환술사들입니다. 일반 마력 탐지기로는 내부의 비명조차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차음 결계가 겹겹이 쳐져 있어요.”
도진은 손목시계의 초침을 눌렀다. 시뮬레이션의 시간이 가속되더니 허공에 숫자가 찍혔다.
03:30.
지하 3층 화물 승강기 앞으로 검은 밴 한 대가 들어서는 장면이 가상 홀로그램으로 재생되었다. 밴의 뒷문이 열리고 쇠사슬에 묶인 채 마력 억제 캡슐에 갇힌 인간 희생자들이 끌려 나왔다.
“오늘 새벽 세 시 삼십 분. 강변 물류창고에서 백설하가 태우려 했던 바로 그 마지막 인력 배송물이다.”
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백설하를 잡았는데도 배송이 멈추지 않았다고요?”
“백설하는 중간 책에 불과하니까. 공급책이 끊기면 상위 유통망이 직접 움직인다. 그 말은 오늘 밤 클럽 헤븐 지하에 놈들의 진짜 윗선이 나타난다는 뜻이지.”
도진은 입체 지도를 닫았다. 허공을 채우던 푸른 격자선이 꺼지고 감식실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는 무진 사무소 벽면에 짠 특수 무기함을 열었다. 기름 냄새와 차가운 은빛 마력 냄새가 공기 중에 번졌다.
도진은 내피에 마력 상쇄 주법이 각인된 블랙 바바리코트를 집어 들었다. 코트 깃 안쪽에는 외부 마학 스캔을 튕겨 내는 3중 은실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이어 그는 케이스에서 특수 제작된 마도 권총을 꺼냈다. 잡식성 마력을 은 빛깔의 뇌전으로 전환해 발사하는 탄환, 은빛 뇌전 탄환 12발이 탄창에 착칵 소리를 내며 차올랐다.
“클럽 헤븐 내부에서는 특수본의 법적 권한이 미치지 않는다. 총을 쏘든 검을 휘두르든 온전히 우리의 책임이야.”
아린은 허리 뒤의 특수 아다만티움 검집을 고쳐 메며 서늘하게 웃었다.
“제 검은 처음부터 특수본의 법을 위해 갈아 둔 게 아니었어요. 억울하게 지워진 사람들의 핏값을 받아내기 위한 거였죠.”
그녀는 손가락 사이에 금빛 마력을 감아 은폐 렌즈 두 개를 만들어 냈다.
“클럽 헤븐의 안구 스캐너를 속일 환술 렌즈예요. 이걸 끼면 1시간 동안은 완벽한 요괴 VVIP의 마력 파장으로 위장할 수 있어요.”
도진은 렌즈를 받아 눈에 끼웠다. 시야가 순간 보랏빛으로 꺾이더니 공기 중의 미세한 마기 궤적이 더 선명하게 3차원 격자로 입혀졌다.
그는 권총을 코트 안쪽에 차 넣고 무진 사무소의 불을 껐다.
“새벽 세 시 삼십 분까지 남은 시간은 40분. 클럽 헤븐의 벨벳 커튼을 찢으러 간다.”
두 사람은 빗줄기가 여전히 거세게 쏟아지는 강남의 밤거리로 걸어 나갔다.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 아래, 욕망과 피로 젖은 심야의 오컬트 수사망이 비로소 완전히 가동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