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사람들의 수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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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00:03:12
지하철 환풍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지근한 쇳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퇴근 시간의 서울 지하철 2호선 강현역 승강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했다. 덜컹거리는 열차의 진동과 끝없이 쏟아지는 안내 방송, 스마트폰 화면만 응시하는 수백 명의 인파가 뿜어내는 열기로 공기가 텁텁했다.
민도하는 어깨에 멘 묵직한 검은색 배낭을 고쳐 멨다.
가방 안에는 개인용 압박 붕대, 지혈대, 포켓 마스크, 의료용 가위와 라텍스 장갑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119 구급대를 그만둔 지 1년이 지났지만 현장을 떠나 사설 응급처치 교육 강사로 일하는 지금도 이 가방을 내려놓지 못했다.
'습관이 아니라 강박이지.'
도하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1년 전 여름, 붕괴 사고 현장에서 동료 강유현을 먼저 떠나보낸 뒤부터였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조금만 더 정확하게 판단했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 거라는 자책은 가슴 깊숙한 곳에 녹슨 닻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도 한 기업체 강당에서 여덟 시간 동안 마네킹을 상대로 흉부 압박을 가르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손바닥 굳은살이 뻐근했고 관자놀이 부근이 지끈거렸다.
도하는 4-2번 스크린도어 앞에 줄을 섰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시야 한구석에서 낯선 빛이 번쩍였다.
"……?"
도하는 헛것을 보았나 싶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의 바로 앞, 남색 정장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든 40대 남성의 머리 위였다. 정수리에서 정확히 20센티미터쯤 떨어진 허공에 선명한 붉은색 글자가 떠 있었다.
[ 00:03:12 ]
디지털시계의 액정처럼 깜빡이는 숫자였다.
도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털었다. 시신경 피로로 인한 잔상이나 일시적인 섬광 현상이라 생각했다. 어두운 강당에서 프로젝터 빔을 오래 본 탓에 눈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러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어둑한 승강장 조명을 밀어내듯 붉은 빛이 더욱 또렷해졌다.
[ 00:03:11 ]
[ 00:03:10 ]
[ 00:03:09 ]
숫자는 1초에 한 칸씩 정확하고 차분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도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시계? 홀로그램 스티커인가?'
남자의 머리칼이나 목덜미 어디에도 프로젝터 같은 소형 전자기기는 붙어 있지 않았다. 글자는 완전히 허공에 독립된 상태로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화면에 뜬 주식 그래프를 넘겨보던 남자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 00:02:45 ]
불길한 한기가 도하의 척추를 타고 내려앉았다.
단순한 착시라기에는 숫자의 흐름이 지나치게 정교했다. 심장 박동처럼 일정한 주기로 줄어드는 붉은 초침. 그 시간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구급대원 시절 수백 번의 현장에서 느꼈던 본능적인 경고음이 귓가를 때렸다.
도하가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려던 찰나였다.
"크윽……!"
남자가 짧은 비명을 토해내며 손에 쥐고 있던 서류 가방을 떨어뜨렸다.
가방이 바닥에 나뒹굴며 서류 몇 장이 승강장 타일 위로 흩어졌다. 남자는 왼손으로 가슴팍을 쥐어뜯듯 움켜쥐더니 무릎을 꺾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소리와 함께 남자의 이마가 스크린도어 유리창을 찧고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어, 어머!"
"사람 쓰러졌다!"
순식간에 주변 승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퇴근길의 웅성거림이 삽시간에 날카로운 공포로 바뀌었다.
[ 00:02:20 ]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의 정수리 위에서 숫자는 여전히 1초씩 줄어들고 있었다.
도하의 몸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비키세요! 물러나 주십시오!"
도하는 군중을 헤치며 남자의 곁으로 미끄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어깨에서 배낭을 벗어던지고 지퍼를 열어젖히는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선생님, 제 말 들리십니까? 눈 떠보세요!"
도하는 남자의 양어깨를 강하게 두드리며 의식을 확인했다. 반응이 없었다.
즉시 검지와 중지를 모아 남자의 목덜미 경동맥을 짚었다. 동시에 시선은 가슴의 오르내림을 확인했다.
맥박 무. 흉부 움직임 없음.
불규칙하게 턱을 헐떡이는 임종 호흡(Agonal gasp)조차 멎어가고 있었다.
'급성 심정지.'
도하는 고개를 들어 가장 가까이에 멍하니 서 있던 남성 승객과 눈을 맞췄다.
"거기 파란 셔츠 입으신 분! 지금 즉시 119에 신고해 주십시오! 여기 강현역 2호선 4-2번 승강장이고 40대 남성 심정지 환자 발생했다고 말씀하세요!"
"네, 네!"
승객이 허둥지둥 전화를 꺼내 들자 도하는 반대편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역무원님! 승강장 비상벨 옆에 있는 자동심장충격기 가져다주세요! 빨리요!"
지시를 마친 도하는 즉시 양손을 깍지 끼고 남자의 흉골 아래쪽 중앙에 손바닥 뒤꿈치를 얹었다. 팔꿈치를 수직으로 펴고 체중을 실어 압박을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분당 110회의 속도, 5센티미터 이상의 깊이. 갈비뼈가 삐걱거리는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도하의 이마에서 순식간에 굵은 땀방울이 솟아올라 턱 끝으로 흘러내렸다.
[ 00:01:45 ]
압박을 가하는 동안에도 남자의 머리 위에 뜬 붉은 숫자는 멈추지 않았다.
40, 39, 38…….
'저 숫자가 대체 뭔데?'
도하는 턱을 악물었다. 환자의 심장을 강제로 뛰게 만들고 인공순환을 돌리고 있는데도 숫자는 줄어들기만 할 뿐 늘어나지 않았다.
"제세동기 가져왔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역무원이 녹색 보관함에서 꺼낸 자동심장충격기(AED)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전원 켜세요! 패드 꺼내 주십시오!"
도하는 압박을 멈추지 않은 채 소리쳤다. 역무원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원 버튼을 누르자 기계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 패드를 환자의 흉부에 부착하십시오.
도하는 남자의 와이셔츠 단추를 뜯어내듯 풀어헤쳤다. 가방에서 가위를 꺼내 안쪽의 러닝셔츠를 찢었다. 땀으로 젖은 피부를 마른 거즈로 거칠게 닦아낸 뒤 AED 패드 두 장을 빠르게 부착했다. 오른쪽 쇄골 아래 하나, 왼쪽 젖꼭지 아래 옆구리에 하나.
커넥터를 연결하자 기계가 즉시 환자의 생체 신호를 읽어 들였다.
― 심전도를 분석 중입니다. 환자에게서 손을 떼십시오.
"모두 물러서세요! 손 뗍니다!"
도하가 양손을 들어 올리며 승객들을 제지했다.
[ 00:00:58 ]
남자의 머리 위 숫자가 1분 아래로 떨어졌다. 피처럼 붉은 빛이 승강장 바닥의 타일에 비칠 정도로 선명하게 일렁였다.
기계에서 날카로운 비프음이 울렸다.
― 제세동이 필요합니다. 충전 중입니다.
심실세동. 심장이 제 기능을 잃고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 환자에게서 떨어지십시오. 주황색 깜빡이는 버튼을 누르십시오.
"물러서세요!"
도하는 주변의 접촉을 확인하고 주황색 방전 버튼을 힘껏 눌렀다.
탁!
강한 전류가 남자의 상체를 관통하며 흉부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제세동을 완료했습니다. 즉시 심폐소생술을 시작하십시오.
도하는 지체 없이 다시 남자의 가슴에 손을 얹고 흉부 압박을 재개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손바닥이 찢어질 듯 아팠고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가방에서 꺼낸 포켓 마스크를 남자의 입에 밀착시키고 코를 막은 뒤 두 번의 인공호흡을 불어넣었다. 남자의 흉부가 부풀어 올랐다가 꺼졌다. 다시 흉부 압박 30회.
하지만 아무런 자발 순환의 기척이 없었다.
[ 00:00:21 ]
[ 00:00:15 ]
[ 00:00:10 ]
"제발…… 뛰어라, 뛰어!"
도하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온 힘을 다해 가슴을 짓눌렀다.
숫자가 5초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 00:00:04 ]
[ 00:00:03 ]
[ 00:00:02 ]
[ 00:00:01 ]
그리고.
[ 00:00:00 ]
숫자가 0에 도달하는 그 찰나였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에서 마지막 긴장감이 툭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AED가 다시 심전도를 분석하며 차가운 음성을 내보냈다.
― 심전도를 분석 중입니다. 환자에게서 손을 떼십시오.
도하는 떨리는 손을 떼고 기계의 화면을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불규칙하게 요동치던 심전도 그래프가 힘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더니 완벽한 직선을 그렸다.
무수축(Asystole).
― 제세동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심폐소생술을 계속하십시오.
기계음이 울렸지만 도하는 더 이상 손을 얹지 못했다.
남자의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검은 동공은 이미 빛을 잃고 최대로 풀려 있었다.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서늘한 공기만이 새어 나왔다.
생명의 불꽃이 완전히 꺼진 육체의 정적.
머리 위에 떠 있던 [ 00:00:00 ]이라는 붉은 글자가 스르륵 흩어지기 시작했다. 타오르다 남은 검은 재처럼 공중에서 잘게 바스러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
도하의 목구멍에서 메마른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확히 3분 12초.
남자가 쓰러지기 전부터 허공에 떠 있던 그 기괴한 숫자는 남자의 심장이 멈추고 뇌가 사멸하기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구급대 왔습니다! 길 좀 비켜주세요!"
승강장 계단 쪽에서 형광 주황색 기동복을 입은 119 구급대원 세 명이 들것과 전문 구급 장비를 들고 달려왔다.
도하가 잘 알고 있는 강현소방서 구급대원들이었다.
"환자 상태 어떱니까?"
구급대원이 무릎을 꿇으며 물었다.
도하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차분하게 보고했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40대 추정 남성. 목격된 급성 심정지입니다. 심폐소생술 3분간 시행했고 현장 AED로 1회 제세동 했습니다. 방금 전 심전도 무수축 확인했고 양측 동공 산대되었습니다."
구급대원이 도하의 얼굴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민도하 반장님?"
"……인계할게요. 기도 확보하고 에피네프린 준비하세요."
도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현역 구급대원들이 전문 소생술을 이어받아 후두경을 넣고 약물을 투여하기 시작했지만 도하는 알고 있었다.
이미 늦었다.
그 남자는 00:00:00이 되는 그 순간에 이 세상에서 완전히 떠났다.
도하는 승강장 기둥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순간 뇌수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맹렬한 편두통이 엄습했다.
삐이이― 하는 날카로운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시야가 흑백으로 뒤흔들리며 속이 울렁거렸다. 도하는 머리를 감싸 쥐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그것은 환각이나 뇌 질환의 징후가 아니었다.
자신의 눈에만 보였던 숫자는 한 인간의 목숨이 끊어지는 정확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신이 들것에 실려 승강장을 벗어나는 동안 도하는 바닥에 흩어진 남자의 소지품을 바라보았다.
깨진 액정의 스마트폰 화면에 푸시 알림 하나가 떠 있었다.
[ 라이프케어 프리미엄 ]
- 위험도 급상승 경고: 가입자 배진우 님의 급격한 생체 리듬 이상이 감지되었습니다.
라이프케어.
최근 건강관리와 보험 연동 서비스로 유명세를 탄 대형 헬스케어 플랫폼 앱이었다.
도하의 시선이 남자가 쓰러졌던 4-2번 스크린도어 바닥 타일로 향했다.
노란색 안전선 바로 밑, 타일의 미세한 이음매 틈새에 유성 매직으로 덧칠한 듯한 얇고 짙은 검은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길이 5센티미터 남짓의 정교한 실선 문양.
'……!'
도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1년 전, 유현이 순직하기 직전 남겨 두었던 유품 수첩의 귀퉁이. 거기에도 똑같은 형태의 검은 실선 스케치가 그려져 있었다.
우연일 리 없었다.
도하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실선을 응시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사건 현장을 에워싸고 수군거리던 승강장의 수많은 승객들.
그들의 머리 위로 희미한 회색빛 글자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 48년 07개월 ]
[ 23년 02개월 ]
[ 61년 11개월 ]
[ 15년 04개월 ]
도하의 두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어지러운 군중의 머리 위에서 저마다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오직 그에게만 보이는 잔혹한 생의 카운트다운이 비로소 눈을 뜬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