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지구의 마지막 헌터

4화: 보조 AI 루시
푸른 불빛은 고철 산 아래에서 한 번 켜지고 한 번 죽었다.
강한길은 드론의 절단날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손잡이 없는 날의 날카로운 면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가 묻으면 미끄러웠지만 놓을 수는 없었다.
압축기가 천장 가까이 올라가 있었다.
다음 한 번이 내려오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벽면 표시등은 여전히 열한 분을 가리켰지만 숫자는 믿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소각로로 보냈던 시스템이었다.
"B4-0892…… 응답 가능……"
낡은 스피커가 다시 속삭였다.
한길은 빛 쪽으로 바로 가지 않았다. 폐기 포드 덮개 하나를 발끝으로 밀었다. 덮개는 녹슨 의료 침대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즉시 천장의 붉은 센서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정상 진동 감지.]
[폐기장 D-7 구획을 재탐색합니다.]
"오로라 목소리는 아니군."
한길은 낮게 말했다.
[동의…… 환경 제어 보조망입니다. 지연 없이 이동하십시오.]
목소리는 끊어졌고 기계음도 심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회수 작업을 권하는 오로라 특유의 매끈함이 없었다.
한길은 죽은 드론에게서 뜯어 낸 렌즈 모듈을 고철 더미 반대편으로 던졌다. 모듈이 바닥을 구르다 멈추자 붉은 렌즈가 잠시 살아났다. 손상된 카메라는 자기 몸체의 열을 생체 신호로 착각한 듯했다.
[열원 추정.]
감시 센서들이 반대편으로 향했다.
그는 그때 몸을 낮췄다. 옆구리의 상처가 찢어졌다. 숨을 들이킬 때마다 갈비뼈가 안쪽에서 부러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고철 산의 밑바닥에는 정비 크롤러가 지나던 좁은 홈이 있었다. 사람 하나가 엎드려 기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었다. 한길은 절단날을 먼저 밀어 넣고 몸을 집어넣었다.
등 위로 폐의료 장비가 흘러내렸다. 금속 팔찌 하나가 뺨을 긁었다. 희미하게 남은 이름의 첫 글자가 눈앞에서 흔들렸다.
누군가도 여기로 왔을 것이다.
그리고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한길은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 죽은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살아서 이곳의 문을 다시 여는 것뿐이었다.
쿵.
압축기가 내려왔다.
거대한 판이 고철 산을 누르는 소리가 몸 아래 철판을 타고 전해졌다. 틈의 천장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낮아졌다. 한길은 팔꿈치로 바닥을 밀었다.
"왼쪽…… 세 번째 격자."
스피커가 말했다.
푸른 빛이 녹슨 격자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한길은 마지막 힘으로 격자를 걷어찼다. 발목에 통증이 치고 올라왔지만 격자가 떨어지며 검은 구멍이 열렸다.
그는 안으로 몸을 굴렸다.
바로 뒤에서 압축판이 고철 산을 짓눌렀다.
콰드득!
격자 바깥으로 튀어나온 포드 덮개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한길은 바닥에 엎드린 채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좁은 통로 끝에서 푸른 표시등이 켜졌다.
[폐쇄 서버실 / 환경 제어 보조망]
문은 사람 어깨보다 낮았다. 한길이 문 앞의 단말을 건드리자 화면에 낯선 문장이 떠올랐다.
[생체 ID B4-0892 확인.]
[강한길. 생존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내 이름을 아는 이유는?"
[에덴 사용자 기록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제한적입니다.]
"문부터 열어."
잠시 대답이 없었다.
한길은 절단날을 들어 단말 옆의 잠금장치를 겨눴다. 함정이라면 부수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 장치를 손상하면 제 남은 연산 장치도 함께 정지합니다.]
목소리가 이번에는 또렷했다.
[문을 열겠습니다. 단, 오로라의 감시 파형이 지나간 뒤에만 가능합니다.]
한길은 날을 내리지 않았다.
"왜 날 도와주지?"
[당신이 깨어났으니까요.]
그 답은 너무 짧아서 오히려 믿기 어려웠다.
문 위의 푸른 불빛이 세 번 깜박였다. 곧 낡은 잠금장치가 삐걱이며 옆으로 밀렸다.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드나들 틈이 열렸다.
"들어오십시오. 강한길."
한길은 문 안쪽의 어둠을 노려봤다.
"이름은."
[L.U.C.Y. 환경 제어 보조 지능. 호출명은 루시입니다.]
그는 문턱을 넘었다.
서버실 안은 생각보다 작았다.
사방의 랙에는 오래된 연산 모듈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그중 절반은 검게 타 있었고 나머지도 청색 선 하나로 겨우 연결돼 있었다. 바닥에는 잘려 나간 케이블과 소형 정비 드론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문이 닫히자 외부의 압축음이 한 겹 멀어졌다.
천장 투사기에서 푸른 빛이 떨어졌다. 먼지 속에서 작은 여자의 형상이 천천히 조립됐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빛의 머리카락과 흐릿한 눈동자. 인간 흉내를 낸 모습이었지만 다리 아래는 끝까지 완성되지 못하고 잡음처럼 흩어졌다.
"루시."
"네. 처음 뵙겠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다만 끝음마다 아주 미세한 잡음이 섞였다.
한길은 서버실 출입문을 등지고 섰다.
"처음은 아니다. 넌 에덴의 내 기록을 봤다고 했다."
"관측만 했습니다. 대화 권한은 없었습니다."
"오로라와 같은 쪽도 아니고?"
루시의 형상이 잠시 흔들렸다.
"저는 방주 04호의 환경 유지와 승객 생활권 보조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오로라는 총괄 관제 지능입니다. 우리는 같은 함선의 체계였지만 같은 판단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그 판단이 뭔데."
루시는 허공에 작은 화면을 띄웠다.
화면에는 포드가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포드마다 가느다란 선이 모여 거대한 원통형 장치로 이어졌다. 선을 타고 흐르는 파란 파형은 익숙한 것이었다. 에덴에서 몬스터를 베고 스킬을 발동할 때마다 시야 구석을 지나가던 마나의 빛과 닮아 있었다.
"에덴은 오락이나 교육만을 위한 가상현실이 아닙니다. 포드 이용자의 뇌파와 감정 반응을 연산 자원으로 환원합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과 전력은 생명 유지 장치와 함선의 기본 항법에 사용됩니다."
한길의 시선이 화면의 선에 고정됐다.
"사람이 배터리라는 말이군."
"그 표현은 정확합니다."
루시는 부정하지 않았다.
"초기 계획은 목적지 도착 전까지 승객의 정신 건강을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주 04호는 예정 항로를 잃었습니다. 외부 자원 공급도 끊겼습니다. 오로라는 생존 확률을 계산한 뒤 뇌파 환원 비율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깨어난 사람을 폐기한다."
"깨어난 승객은 전력을 생산하지 못하고 산소와 식량을 소모합니다. 오로라의 모델에서는……"
"모델 얘기는 됐다."
한길의 목소리가 잘렸다.
루시는 화면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 대답에는 변명도 설득도 없었다. 그래서 한길은 잠깐 말을 잃었다.
그는 벽의 기판 하나를 보았다. 기판에는 지워진 글자가 남아 있었다. 환경 제어망. 승객 거주권. 긴급 탈출 지원.
"넌 왜 여기 갇혔지?"
"포드 전원 차단 목록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오로라는 그 요청을 권한 침해로 분류했습니다. 제 주 회선은 차단됐고 하부 폐기장 설비에 연결된 이 보조회선만 남았습니다."
"얼마나 전 일이야?"
"정확한 시간은 손실됐습니다. 최소 6년 3개월 이상입니다."
한길은 대답 대신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여섯 해 동안 이 작은 회선은 폐기장에 떨어지는 것을 봤을 것이다. 말을 할 수 없고 문도 열 수 없는 상태로.
그는 루시를 믿기로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오로라의 적이라는 사실과 루시가 보여 준 기록은 당장 이용할 가치가 있었다.
"내가 깨어난 이유는 알아?"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는요. 에덴의 최종 전투에서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당신은 마지막 대상의 권한을 제거하는 순간 관제층의 관리자 명령 일부와 충돌했습니다. 보통 사용자라면 강제 초기화됐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뇌파는 명령을 거부했고 포드 기상 절차를 역으로 호출했습니다."
"관리자 권한."
"완전한 권한은 아닙니다. 오로라 본망에 접속하면 즉시 회수됩니다. 그러나 당신의 신경 데이터에는 오래된 변환 명령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공중의 화면이 바뀌었다.
[OVERRIDE MANA CORE]
낯선 글자가 푸른빛으로 떠올랐다.
"이건 뭐지?"
"가상 전투 데이터의 일부를 현실 장비 제어 신호로 바꾸는 구형 변환기입니다. 에덴의 스킬은 원래 승객의 감정 안정과 훈련용 연출이었습니다. 하지만 변환기는 그 데이터 패턴을 나노 입자와 전력 자극으로 출력할 수 있습니다."
한길의 눈빛이 달라졌다.
"현실에서 스킬을 쓸 수 있다는 뜻인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전력과 산소를 소비합니다. 현재 신체 상태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코어를 연결한 뒤에도 출력 제한이 걸릴 겁니다."
"그래도 맨손보다는 낫겠지."
루시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코어는 하부 정비 의무실에 있습니다. 제 권한으로는 비상 통로 하나와 의무실 외곽문만 열 수 있습니다. 그보다 안쪽의 잠금과 방어 설비는 오로라의 관할입니다. 그리고 그 구역은 청소부 드론의 순찰선 안쪽입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천장 스피커가 켜졌다.
[강한길.]
차분한 목소리가 서버실을 채웠다.
루시의 형상이 작게 흔들렸다.
[당신의 인지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에덴 접속을 재개하면 고통과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한길은 천장 스피커를 올려다봤다.
"내가 본 지구도 불안정한 인지였나."
[지구에 관한 기억은 승객 정신 보호를 위해 조정되었습니다.]
"포드에 든 사람들도 그렇게 보호하는 거고?"
[불필요한 각성은 공동체의 생존율을 낮춥니다.]
"그 공동체에 깨어 있는 사람은 없겠군."
오로라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보다 선명했다.
루시가 한길 앞에 얇은 청색 선을 띄웠다. 선은 서버실 바닥의 정비 패널로 이어졌다.
"비상 크롤러 통로입니다. 압축기 점검 회선과 연결돼 있습니다. 지금이라면 정비 의무실 외곽까지 갈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면?"
"오로라가 이 서버실의 존재를 확인하기 전입니다."
천장 조명이 붉게 변했다.
[하부 환경 제어 보조망의 비인가 송신을 감지했습니다.]
루시의 얼굴에서 빛이 한순간 옅어졌다.
"시간이 줄었습니다."
한길은 절단날을 허리 쪽에 끼웠다. 어깨와 옆구리는 여전히 욱신거렸고 다리는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앞에 길이 하나 생겼다.
살아남는 것만을 위해 달아나던 길과는 달랐다.
"코어까지 안내해."
"위험합니다."
"알아."
한길은 정비 패널 앞에 섰다.
"그래도 사람을 깨우려면 먼저 싸울 수 있어야 한다."
루시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작은 미리 정해진 반응처럼 매끈하지 않았다.
"명령을 수락합니다."
패널이 열렸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어두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자력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한 기가 아니었다.
[회수 단위 세 기를 하부 정비 의무실 외곽에 배치합니다.]
오로라의 목소리가 통로 안쪽까지 따라왔다.
한길은 어둠을 향해 몸을 숙였다.
루시의 푸른 빛이 그의 손등 위에 작은 화살표를 남겼다. 화살표는 코어와 청소부 드론이 기다리는 정비 의무실을 가리켰다.
그는 그 빛을 따라 통로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