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파 약초꾼이 죽질 않음

7화: 무당파의 도견
화산의 산세는 예로부터 험준하기로 중원 으뜸이라 불렸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은 칼로 베어낸 듯 가팔랐고 발밑으로는 안개가 자욱해 범인이라면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화음현으로 이어지는 하산길 역시 좁다란 암벽 틈새를 타고 내려가는 험로였다.
그 아찔한 벼랑길을 한 청년이 성큼성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낡은 삼베옷 차림에 커다란 목제 약초 배낭을 짊어진 백운휘였다. 한 손에는 손때 묻은 약초 곡괭이를 짚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물을 채운 표주박이 걸려 있었다.
쿵. 쿵.
운휘의 발이 바위를 디딜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협곡을 울렸다.
경공(輕功)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나뭇가지를 스치는 초상비도 아니었고 신형을 띄우는 허공답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순수한 육신의 무게를 턱턱 실어 땅을 밟는 투박한 걸음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끄러운 이끼 바위를 밟으면서도 운휘의 상체는 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처럼 고요했다. 발을 헛디딜 법한 비탈에서도 중심축은 흔들림 없이 유지되었다.
운휘에게 이것은 특별한 무공이 아니었다. 열 살 때 화산파 외문에 들어와 십 년 동안 약초를 찾아 골짜기를 헤집고 다닌 결과였다. 벼랑에서 헛디디면 그대로 황천길을 건너는 약초꾼의 삶이 몸에 각인시킨 생존 감각이었다.
"백령화 생뿌리는 장터 약전 골목에 제일 많이 들어온다고 했지. 해 떠 있을 때 도착해야 싱싱한 놈으로 고를 텐데."
운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볍게 발을 뗐다.
그 무렵 절벽 중턱 낙락장송 가지 위에 한 인영이 서 있었다.
바람에 은은하게 나부끼는 청색 도포. 단정하게 묶은 상투관 아래로 맑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드러나 있었다. 등 뒤에는 은빛 보검을 비스듬히 메고 있어 한눈에 보아도 명문 도가의 직계 제자임을 알 수 있는 풍모였다.
무당파 장문인이 가장 아끼는 직전 제자이자 강호에서 '무당의 도견(道見)'이라 칭송받는 천재 도사 청풍(淸風)이었다.
청풍은 본래 화산파와의 도담을 위해 화산을 방문하려던 길이었다. 산세를 살피며 오르던 중 험준한 벼랑길을 거침없이 내려오는 기이한 인물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 참이었다.
청풍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저 자는 누구인가?'
청풍은 당대 도가 무학의 최고 수재였다. 무당파의 비전 경공인 제운종(梯雲縱)을 대성한 그였지만 눈앞의 광경은 도무지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단전에는 내력의 파동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혈도를 타고 흐르는 진기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흔한 호신강기조차 없었다.
하지만 저 걸음걸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파공음이 없다. 억지로 바람을 가르지도 않고 바위를 부수지도 않는다. 그저 대지가 이끄는 결을 온몸으로 타고 흐르고 있구나.'
청풍은 숨을 죽였다. 일반적인 무림인들은 경공을 펼칠 때 체내의 진기를 끌어올려 몸을 가볍게 띄운다. 하지만 저 사내는 정반대였다. 자신의 무게를 전혀 속이지 않은 채 대지의 중심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벼랑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가고 있었다.
무당파 비전 도서에 적혀 있던 구절이 청풍의 뇌리를 스쳤다.
'무위이화(無爲而化), 무유지경(無有之境)...!'
청풍의 등줄기에 전율이 흘렀다.
'화산파에 저토록 엄청난 은세도인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도가의 궁극이라 불리는 자연합일의 보법을 저토록 태연하게 펼치다니!'
청풍은 주저하지 않고 소나무 가지에서 신형을 날렸다.
스스륵.
청풍의 신형은 벼랑길이 끝나는 협곡 갈림길의 너럭바위 위에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협곡으로 내려서던 운휘는 눈앞에 갑자기 떨어진 사람을 보고 뒤로 물러섰다.
"어이쿠, 깜짝이야! 나무 위에서 사람이 왜 떨어집니까?"
청풍은 옷자락을 정돈한 뒤 포권을 취하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무당파 도인 청풍이라 합니다. 홀연히 앞길을 막아서서 도형을 놀라게 해 드렸다면 용서하십시오."
"무당파요?"
운휘는 눈을 껌뻑이며 청풍을 뜯어보았다. 비단결처럼 고운 도포에 백옥 같은 피부, 등 뒤에 찬 번쩍이는 보검까지 귀티가 줄줄 흘렀다.
"놀라긴 했습니다만 다친 건 아니니 됐습니다. 그런데 도형이라니요. 전 화산파 외문 약방에서 풀 뜯는 약초꾼 백운휘라고 합니다."
청풍은 운휘의 낡은 삼베옷과 짚신을 바라보았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약초꾼이었지만 의심은 오히려 확신으로 굳어졌다.
'전설 속의 지인(至人)들은 세속의 명리를 버리고 가장 낮은 곳에 몸을 숨긴다 들었다. 화산의 약초꾼으로 위장하여 천하의 이치를 관조하고 계셨던 게로구나.'
청풍이 더욱 공손히 허리를 낮추었다.
"백 형, 조금 전 벼랑을 내려오시던 걸음을 보았습니다. 천 길 암벽을 걸어 내려오시면서도 흔들림이 없더군요.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산세와 하나가 되는 그 보법은 어떤 도가의 깊은 뜻을 품고 있는 것입니까?"
간절한 눈빛을 마주한 운휘는 어리둥절했다.
"보법이라뇨? 그냥 조심해서 내려온 건데요."
"예?"
운휘는 답답하다는 듯 닳아 빠진 짚신 코를 가리켰다.
"그 벼랑길이 돌이 뾰족해서 발을 잘못 디디면 짚신 밑창이 금방 찢어집니다. 짚신 한 켤레 삼는 것도 일인데 산길에서 찢어지면 맨발로 걸어야 하잖아요. 게다가 가파른 비탈에서 발끝에 힘을 주면 무릎이 상합니다. 그래서 발뒤꿈치를 바위에 꽉 붙이고 쿵쿵 딛고 내려와야 신발도 덜 닳고 안 미끄러집니다."
운휘는 배낭 끈을 고쳐 쥐었다.
"약초 배낭이 쌀 두 가마니 무게는 되니까 중심 잘못 잡으면 굴러떨어지거든요. 먹고살려고 익힌 요령입니다."
쿠웅-!
청풍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종이 울렸다.
'발뒤꿈치를 바위에 꽉 붙이고 대지를 딛는다...?'
순간 무당파 태극권론(太極拳論)의 핵심 비결이 청풍의 머릿속을 스쳤다.
'기침단전(氣沈丹田), 족답용천(足踏湧泉)! 기운을 단전에 가라앉혀 억지 힘을 비우고 발바닥의 용천혈로 대지의 근원적인 힘을 온전히 받아들여라!'
청풍의 손끝이 떨려왔다.
'그렇다! 천하의 무림인들은 허공을 날고 바람을 가르는 화려한 경공에만 눈이 멀어 대지가 주는 힘을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분은 화려한 초식을 모두 버리고 오직 대지와 몸의 무게를 완벽하게 접지시키는 무유의 경지에 도달하셨구나! 그것을 일개 짚신 밑창과 배낭 무게라는 비유로 이토록 명쾌하게 설파하시다니!'
청풍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과연... 형의 깊은 혜안을 소도가 온전히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억지로 꾸며낸 기운을 버리고 자연의 법칙에 온몸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도의 참모습이거늘. 소도의 좁은 식견을 깨우쳐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운휘는 혀를 찼다.
'이 도사님, 얼굴은 멀쩡한데 머리가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짚신 아끼는 법을 알려줬더니 도의 참모습이라니.'
하지만 상대가 워낙 깍듯하게 대하니 딱히 면박을 줄 수도 없었다. 운휘는 너럭바위 그늘을 가리켰다.
"아무튼 다 내려왔으니 저기 그늘에서 목이나 축이고 가지요. 해가 중천이라 목이 탑니다."
"예, 백 형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너럭바위 그늘에 자리를 잡은 운휘는 표주박 물을 시원하게 들이켠 뒤 내밀었다. 청풍은 물을 조심스럽게 받아 마신 뒤 품속에서 백옥합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그윽하고 맑은 약향이 퍼져 나갔다.
"이것은 무당파 비전 영단인 정심청기단(靜心淸氣丹)입니다. 기혈을 맑게 하고 피로를 씻어내는 환약이니 여정에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운휘는 옥합 속 은빛 환약을 들여다보더니 슬그머니 손을 내저었다.
"향은 좋은데 너무 딱딱하네요. 전 이런 가루 뭉쳐 놓은 건 영 목구멍에 안 넘어갑니다. 이 사이에 끼기만 하고요."
청풍은 멍해졌다. 천금을 싸 들고 와도 구하지 못할 영단을 가루 뭉친 덩어리라 치부하다니.
운휘는 배낭 앞주머니를 뒤적여 거뭇거뭇한 톱니 모양 풀잎 한 묶음을 꺼냈다.
그 순간 청풍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잎사귀에 맺힌 보랏빛 진액과 서늘하고 비릿한 독기. 청풍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다.
"백 형! 그것은 절벽 바위틈에서만 자란다는 비취독랑초(翡翠독狼草)가 아닙니까?!"
"약방 어르신들은 늑대풀이라고 부르던데요."
"그 풀은 극독입니다!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짓무르고 잎 한 장만 삼켜도 오장육부가 녹아내리는 맹독초입니다! 어찌 그런 흉물을 쥐고 계십니까!"
하지만 운휘는 당연하다는 듯 잎사귀 두 장을 뜯어 입에 털어 넣었다.
"에이, 겁이 너무 많으시네. 처음엔 혀가 찌릿하긴 해도 꼭꼭 씹다 보면 떫은맛 뒤로 은근히 달짝지근합니다. 산 타다가 다리 풀리고 졸릴 때 씹으면 눈이 번쩍 뜨이거든요."
와작. 와작.
운휘는 맹독초를 배추 잎이라도 씹듯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청풍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굳어 버렸다. 절정 고수도 기혈을 봉해야 할 극독을 날것으로 씹어 먹다니.
꿀꺽.
운휘는 배를 통통 두드리며 시원하게 트림을 했다.
"꺼억-! 아이고 속 시원하다. 피로가 싹 가시네요."
운휘의 얼굴에는 중독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체내에 축적된 영약의 기운이 독성을 집어삼키며 건강한 혈색마저 돌았다.
운휘는 풀잎 몇 장을 청풍에게 내밀었다.
"도사님도 한 잎 씹어 보실래요?"
청풍은 뒷걸음질을 치며 식은땀을 흘렸다.
'만독불침... 아니, 독을 체내의 기운으로 삼켜 동화시키는 전설의 도가선체(道家仙體)다!'
청풍은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눈앞의 청년은 무학의 경계를 아득히 초월한 괴물이었다. 청풍의 눈빛에는 지극한 존경만이 남았다.
운휘가 풀잎을 챙겨 넣고 일어섰다.
"자, 이제 출발합시다. 늦으면 화음현 장터에 좋은 백령화 뿌리가 다 팔립니다."
청풍이 황급히 포권을 취했다.
"백 형.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도가 화음현 장터까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형의 곁에서 그 고결한 품성과 걸음을 지켜보며 배움을 얻고 싶습니다."
운휘는 어리둥절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울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무튼 혼자 걷기 심심했는데 잘됐습니다. 장터에 도착하면 국밥집에 가서 막걸리나 한 사발 같이 합시다."
두 사람은 화음현 초입으로 이어지는 숲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고요 속에서 음산한 기운이 번져가고 있었다.
길 양옆 덤불 속과 참나무 가지 뒤편에 엎드린 인영들이 있었다. 검은 가죽옷에 호랑이 가죽대를 두른 자들, 바로 악명 높은 사파 무리인 '흑호채(黑虎寨)'의 척후들이었다.
'무당파 도사와 허름한 약초꾼이다.'
'약초꾼 배낭 옆구리의 고급 옥패를 보십시오. 저것 하나면 백 냥은 족히 챙깁니다.'
'본채에 신호를 보내 독화살 진을 치게 해라.'
휘이익- 휘익.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은밀하게 숲 너머로 퍼져 나갔다. 본채에 먹잇감이 걸려들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청풍의 손이 자연스럽게 등 뒤의 보검 자루로 향했다.
"백 형. 숲속의 바람결이 심상치 않습니다. 사방에서 짙은 살기(殺氣)가..."
운휘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하늘을 보았다.
"산새들이 참 시끄럽게 우네요. 비가 오려나 봅니다. 쏟아지기 전에 어서 걸읍시다. 배낭 젖으면 약초에 곰팡이 핍니다."
운휘는 성큼성큼 걸음을 재촉했다.
청풍은 그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탄복했다.
'사방의 매복을 감지하고도 한낱 새소리로 치부하시다니... 과연 대종사의 담력이로다.'
청풍은 검자루에서 손을 떼고 운휘의 뒤를 따랐다.
숲속 깊은 곳에서 맹독을 바른 수십 대의 쇠화살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두 사람은 흑호채의 덫이 깔린 숲길로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