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멸망시키지 않기 위해 만렙을 숨김

5화: 직감 뛰어난 검사
끼이익!
거친 제동음과 함께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폐섬유공장 정문 앞에 급정거했다.
차 문이 열리며 단정한 감청색 정장 차림의 여성이 내렸다. 허리춤에 길고 날렵한 세검 형태의 마검을 찬 그녀는 구겨짐 없는 옷매무새만큼이나 서늘하고 예리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국내 굴지의 소형 정예 길드 '아우라'의 길드장이자 A급 헌터인 윤서아였다.
"길드장님, 오셨습니까!"
노란색 방호 조끼를 입은 협회 현장 수습반장 김진우가 식은땀을 흘리며 달려왔다.
"상황은요."
윤서아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김진우가 상황판 태블릿을 들어 올리며 다급하게 보고했다.
"10분 전 D급 갱도 던전에서 국지적 차원 침식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보스룸 공간 축이 찢어지며 혼돈 마력이 역류해 반경 500미터 이내 전원 대피령을 내렸습니다. 본부에서는 공간 붕괴 임계치 도달을 경고했는데……."
김진우는 말끝을 흐렸다.
윤서아는 공장 마당 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현장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도로를 달려올 때만 해도 서쪽 하늘을 검붉게 물들이던 보랏빛 마력 아지랑이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차원 침식 특유의 불쾌한 공간 마찰음이나 파괴적인 돌풍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간 붕괴 임계치라고 했습니까?"
"예, 분명 협회 관제탑의 공간 왜곡 수치가 한계선까지 치솟았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죠? 공장 안쪽의 대기 파동이 완전히 멎어 있습니다."
윤서아의 날카로운 지적에 김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희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진입했던 D급 공격대가 빠져나온 뒤 갑자기 마력 수치가 곤두박질쳤습니다."
때마침 구급차 들것에 앉아 있던 거구의 사내가 붕대를 감은 팔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오늘 아침 공략대를 이끌었던 D급 공격대장 최창석이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진짜로 안에서 지옥이 열렸다고요! 보스룸 바닥이 솟구치고 허공에 검은 구멍이 뚫리면서 마수들이 산 채로 갈려 나갔습니다! 10초만 늦게 나왔어도 다 시체가 됐을 겁니다!"
공포에 질린 최창석의 눈빛에는 거짓이 없었다.
윤서아는 시선을 돌려 지하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한 계단 입구는 흉흉한 파괴 흔적 대신 서늘하고 잔잔한 푸른 마력만을 품고 있었다.
"공략대가 나온 뒤 저 안에 들어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저희가 곧바로 바리케이드를 쳤고 상위 기동대가 올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않았습니다."
"단 한 명도요?"
"예, 확실합니다."
윤서아는 대답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길드장님, 아직 위험합니다!"
"차원 침식 현장이라면 바깥 대기가 이렇게 가라앉아 있을 리 없습니다. 뭔가 다른 일이 벌어졌어요."
윤서아는 만류를 뒤로하고 검자루를 쥔 채 지하 계단으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어두운 콘크리트 계단을 지나 게이트 포털을 통과하자 퀴퀴한 흙냄새와 함께 던전 내부 갱도가 나타났다.
윤서아는 숨을 죽이며 정밀 마력 감응을 사방으로 펼쳤다.
갱도 바닥과 암벽에는 참혹한 재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뒤틀린 지반, 부서진 바위 파편, 차원 폭풍에 으깨진 바위도마뱀들의 사체. D급 공격대장의 말대로 이곳에서 차원벽이 찢어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보스룸 공터에 발을 들이는 순간 윤서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게 대체 뭐야?"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공터 한가운데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 균열이 찢겼던 자리였다. 상식적인 던전 붕괴 현장이라면 거대한 분화구처럼 패여 있거나 공간이 누더기처럼 헤져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 있는 것은 유리판처럼 매끄럽게 봉합된 공간의 단면뿐이었다.
윤서아는 천천히 다가가 칼집 끝으로 허공의 경계면을 톡 건드렸다.
맑은 공명음이 갱도 전체에 퍼졌다.
충격파를 흡수하며 결을 틀어막는 결계가 아니었다. 찢어졌던 차원벽의 테두리들이 마치 정교한 바느질로 꿰매어진 것처럼 원래 형태로 맞물려 있었다.
'외부에서 강한 마력으로 때려부순 흔적이 없어.'
보통 협회의 고위 결계술사나 S급 마법사들이 차원 폭주를 막을 때는 압도적인 화력을 쏟아부어 균열을 짓누른다. 그 과정에서 주변 지형은 초토화되고 시커멓게 탄 마나 찌꺼기가 남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탄 흔적도, 마나 파열흔도 없었다. 오직 미세하고 순수한 마력 실선만이 기하학적인 룬의 형태로 공간의 경계를 못박아 두고 있었다.
"개념 고정……?"
윤서아의 입술 사이로 경악에 찬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공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존재 정의' 자체를 원래 상태로 억류하고 고정하는 신화급 기술. 현대 헌터 사회에서 이런 정밀 제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은 잔류 마력의 밀도였다.
'이 정도 미세 마력으로 거대한 균열을 봉합했다고? 말도 안 돼.'
수치를 재기조차 민망할 만큼 희미한 방출량이었다. 자신의 힘을 터뜨린 것이 아니라 던전에 날뛰던 거친 환경 마력의 흐름을 지렛대 삼아 룬을 엮어낸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누군가 들어왔었어."
D급 공격대가 도망치고 협회 지원팀이 도착하기 전, 고작 몇 분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에. 미지의 인물이 홀로 던전에 들어와 수천 명을 집어삼킬 뻔한 차원 침식을 수습하고 사라진 것이다.
윤서아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던전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당으로 뛰쳐나온 윤서아를 보며 김진우가 눈을 크게 떴다.
"길드장님! 괜찮으십니까?"
"김 반장님, 다시 묻겠습니다. 공략대가 나온 직후 이 공장 주변을 지나간 사람이 정말 없었습니까?"
"예? 아까 말씀드렸듯이……."
"인근 주민이나 공사장 인부라도 상관없습니다. 지나쳐 간 사람이 없었냐는 뜻입니다!"
윤서아의 서슬 퍼런 추궁에 김진우가 당황하여 답했다.
"공장 뒤편 골목길 쪽으로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인부가 지나갔다는 보고는 얼핏 들었습니다. 그냥 근처 인부 같아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만."
"인부?"
윤서아는 지체 없이 공장 담벼락 뒤편으로 향했다.
화물 컨테이너가 늘어선 뒷골목이었다. 비포장 흙길 위에 깨진 유리 조각과 건축 폐자재들이 널려 있었다.
윤서아는 허리를 숙여 흙바닥을 훑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컨테이너 모퉁이 그늘진 흙바닥 위에 선명하게 찍힌 한 쌍의 발자국을.
값싼 헌터용 작업화 밑창 무늬였다. 짐꾼들이 주로 신는 흔한 신발이었다.
하지만 윤서아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발자국 주변의 흙먼지가 조금도 흐트러져 있지 않았다. 급하게 뛴 흔적도, 미끄러진 자국도 없었다. 차원 폭풍이 휘몰아치던 현장을 코앞에 두고도 마치 평온한 산책로를 걷듯 일정한 보폭과 완벽한 무게 중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찰열이 전혀 없어. 발을 디딜 때 마력을 티끌만큼도 바닥으로 흘리지 않는 극한의 은신 보법이야.'
뿐만이 아니었다. 부서진 철조망 틈새를 살피던 윤서아의 손가락 끝에 붉은색 면 실오라기 하나가 걸려들었다. 작업용 목장갑 올이 풀려 뜯겨 나간 조각이었다.
"F급 짐꾼의 장비로 위장한 은둔자……."
윤서아는 붉은 실오라기를 쥔 채 주먹을 꽉 쥐었다.
화려한 간판을 단 S급 헌터들 중에는 이런 기예를 부릴 자가 없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파괴력과 화려한 출력에만 집착할 뿐이다.
이 사람은 정반대였다. 자신의 힘을 완벽히 숨긴 채 재앙을 장난처럼 수습하고 유유히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대체 누구지?"
윤서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소형 길드를 이끌며 대형 길드의 오만을 뼈저리게 겪어온 그녀였다. 그녀의 뛰어난 직감은 이 기이한 사건의 배후에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김 반장님."
윤서아가 골목에서 걸어 나오며 명령했다.
"공식 보고서에는 던전 내부 마력이 자연 안정화되어 소멸했다고 기재하세요."
"예? 길드장님, 그게 정말입니까?"
"협회 윗선에 불필요한 혼란을 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윤서아는 자신의 검은 세단을 가리켰다.
"서부 제4구역 인근 골목길들을 천천히 순찰하며 복귀하겠습니다."
"딸랑."
유리문에 달린 작은 종소리와 함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강민우를 맞이했다. 제4구역 폐섬유공장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주택가 골목길의 한적한 편의점이었다.
민우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진열대 사이를 걸었다.
"휴, 목말라 죽는 줄 알았네."
국밥을 번개처럼 들이켜고 차원 균열까지 꿰매고 왔더니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그는 음료수 냉장고에서 큼직한 이온 음료 한 병을 꺼냈다. 이어서 컵라면 하나와 참치마요 삼각김밥 두 개를 집어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계산해 주세요."
"삼천오백 원입니다."
모자를 눌러쓴 알바생이 바코드를 찍는 동안 민우는 조용히 눈앞에 상태창을 띄웠다.
[지구 차원 과부하율: 99.01%]
[현재 상태: 차원 안정성 유지 중]
[비인가 출력 감지: 없음]
붉은 경고 창이 사라지고 평온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과부하율은 다행히 99.01%에서 멈추어 있었다.
'그나저나 아까 그 던전,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단 말이지.'
민우는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일반적인 D급 던전의 공간 지지벽은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찢어지지 않는다. 마수들이 날뛰어도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질 뿐, 공간 자체가 뒤집혀 침식이 일어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환경 마력을 엮을 때 균열 절단면에서 느껴졌던 이질적인 감각이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 날카로운 칼날로 차원벽의 약한 틈새를 정밀하게 그어놓은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이었다.
'마치 억지로 공간을 터뜨리려고 촉매를 찔러 넣은 것 같았어.'
제때 막지 않았다면 서부 일대의 공간 축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편의점에 앉아 컵라면 뚜껑을 덮어둘 여유 따위는 없었을 터였다.
"후우,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말자."
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자신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F급 짐꾼일 뿐이다. 거대한 음모니 길드 간의 암투니 하는 것들은 높은 연봉을 받는 고위 헌터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지구가 터지지 않고 오늘처럼 무사히 퇴근해서 밥을 먹는 평범한 하루.
3분이 지나자 민우는 뚜껑을 뜯고 젓가락을 들었다. 짭조름한 국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면발을 입안 가득 넣자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크으, 역시 라면은 퇴근하고 먹어야 제맛이야."
삼각김밥을 베어 물며 우물거리던 그때였다. 벽걸이 텔레비전에서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다음 소식입니다. 오늘 오후 서울 서부 제4구역 D급 던전에서 발생했던 마력 이상 징후는 각성자협회의 신속한 대처와 기적적인 자연 안정화 현상으로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협회 측은 던전 내 마력 포화도가 일시적 역류를 겪은 뒤 자연스럽게 균형을 되찾은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으며…….]
뉴스를 보던 편의점 알바생이 중얼거렸다.
"거봐, 별일 아니었네. 괜히 긴급 문자 보내서 쫄게 만들고 난리야."
민우는 실소를 간신히 삼켰다.
'자연 안정화는 무슨. 내가 마력 0.004%로 공간 꿰매느라 진땀을 뺐는데.'
하지만 협회가 그렇게 발표해 주는 편이 민우에게는 훨씬 안전했다. 정체불명의 존재가 개입했다는 소문이 돌면 피곤한 일에 휘말릴 테니까.
스스스스.
그때 편의점 앞 골목길로 묵직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유리창 너머로 천천히 서행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차량 보닛에는 은색 날개 형상의 엠블럼이 새겨져 있었다. 소형 정예 길드 '아우라'의 마크였다.
민우의 시선이 세단의 조수석 창가를 향했다.
열린 차창 너머로 조수석에 앉은 여성의 옆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감청색 정장을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여자였다.
그녀의 서늘하고 예리한 눈빛이 먹잇감을 찾는 매처럼 골목길과 행인들의 모습을 훑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는 어디서 주웠는지 붉은색 목장갑 실오라기 하나가 들려 있었다.
민우는 젓가락을 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어깨를 둥글게 말고 지극히 둔하고 피로에 찌든 삼류 짐꾼의 자세로 국물을 후루룩 들이켰다.
마력은 0.0001%조차 흘리지 않았다.
세단은 편의점 앞을 지나쳐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붉은 미등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에야 민우는 국물 그릇을 내려놓았다.
"……눈빛 한번 매섭네."
민우는 차가운 이온 음료를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아까 던전에 남겨둔 기하학적 봉합 흔적을 보고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룬의 잔향을 최대한 지웠지만 상위 헌터의 뛰어난 직감까지 완벽하게 속이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F급 짐꾼한테 볼일은 없겠지."
민우는 빈 용기를 챙겨 쓰레기통에 깔끔하게 버렸다. 점퍼를 툭툭 털며 편의점 문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 뒤로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길게 늘어난 그림자가 옥탑방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