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지구를 멸망시키지 않기 위해 만렙을 숨김3화

지구를 멸망시키지 않기 위해 만렙을 숨김

지구를 멸망시키지 않기 위해 만렙을 숨김

AD
스폰서 광고

3화: 안전한 짐꾼의 삶

새벽 안개는 서울 서부의 낡은 골목길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강민우는 옥탑방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문고리를 두 번 걸어 잠갔다. 삐걱거리는 문틈 사이로 찬 바람이 스며들었지만 그보다 먼저 낡은 운동화부터 벗었다.

그는 부엌 서랍에서 꺼낸 커터칼 끝으로 신발 밑창을 긁어냈다.

볼링장 게이트 바닥에서 묻혀 온 검은 금속 가루가 얇은 종이 위로 사각거리며 떨어졌다. 가루는 작은 비닐 지퍼백에 담겼고 주머니 속에 있던 검은 코어 파편과 함께 철제 과자통 깊숙이 들어갔다.

과자통 뚜껑을 닫고 옷장 구석 이불 밑에 밀어 넣자마자 시야 한가운데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미확인 접속이 사용자 생체 신호를 탐색 중입니다]

[탐색 신호 감쇠 중: 마력 방출원 부재로 특정 실패]

[현재 지구 차원 과부하율: 99.01%]

글자의 붉은빛이 차츰 옅어지더니 시야 구석으로 물러났다.

다행히 추적은 빗나갔다.

애초에 몸 안의 마력을 단 한 줌도 외부로 뿜어내지 않았으니 아무리 정밀한 탐지망이라도 평범한 인간과 구별할 방법이 없을 터였다.

"차라리 다행이네."

민우는 좁은 화장실 수돗가에 섰다.

찬물을 틀어 손등에 엉겨 붙은 핏자국을 씻어냈다. 쓰라린 통증과 함께 찢겨 나간 살갗이 드러났다.

만렙 상태창이 동기화된 이후로 그의 몸속에서는 상처를 순식간에 메우려는 초월적인 생명력이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가 치유조차 외부 마력 흐름을 자극할 수 있었다.

민우는 억지로 그 기운을 억누르고 구급상자에서 꺼낸 빨간 소독약과 대일밴드를 붙였다.

평범한 인간처럼 아파하고 평범한 인간처럼 낫는 것. 지금은 그게 가장 안전한 방패였다.

방 안의 낡은 전자시계는 오전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전날 밤부터 삼각김밥 반 조각으로 버틴 터라 위장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하지만 방구석에 틀어박혀 숨어 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협회 전산망에는 일용직 헌터들의 출석과 공략 이력이 실시간으로 기록된다. 매일같이 짐을 나르던 F급 짐꾼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면 오히려 불필요한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돈이 떨어지면 위험을 무릅쓰고 게이트로 나가야 하는 게 하위 헌터의 숙명이었다. 그 평범하고 구질구질한 생활 반응을 유지해야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민우는 스마트폰을 켜고 협회 공인 일용직 구인 앱을 열었다.

위험수당이 수십만 원씩 붙은 긴급 돌발 게이트 공고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스크롤을 맨 아래로 내렸다.

[서울 서부 제7 지하 배수로형 F급 게이트]
[작업 내용: 하급 슬라임 및 뿔쥐 구제 후 잔여 부산물 수거]
[일당: 80,000원 (식대 별도)]
[비고: 초보 각성자 실습 파티 / 인솔자 동행 / F급 짐꾼 1명 모집]

"배수로 청소."

더없이 평화롭고 시시한 작업이었다.

이런 최하위 게이트에는 차원 균열이나 인위적인 붕괴진 따위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마수라고 해 봐야 장화로 밟아도 터지는 슬라임과 팔뚝만 한 뿔쥐가 고작이었다.

민우는 젖은 옷을 벗고 마른 작업복 셔츠로 갈아입었다.

어깨에 낡은 배낭을 둘러멘 뒤 옥탑방 계단을 내려왔다.

집결지는 인근 지하철역 환풍구 옆에 자리한 간이 관리소 앞이었다.

아침 햇살이 건물 사이로 비쳐 들 무렵 관리소 앞에는 세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민우 씨 맞으시죠?"

형광 초록색 안전조끼를 걸친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푸근한 인상을 지닌 F급 인솔자 배혁진이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낡은 손전등과 짧은 다용도 단검이 매달려 있었다.

"네. 강민우입니다."

"반가워요. 오늘 작업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기 두 친구가 이번에 E급 자격증 따고 실습 나온 초보들이거든요. 앞에서 몬스터 잡으면 민우 씨는 뒤에서 마대자루에 담아 주시기만 하면 돼요."

배혁진이 가리킨 곳에는 잔뜩 상기된 표정의 남녀가 서 있었다.

새것 티가 팍팍 나는 가죽 갑옷을 차려입은 송지훈과 분홍빛 나무 지팡이를 꼭 쥐고 있는 박진아였다. 두 사람은 긴장 반 기대 반으로 연신 발을 동동 굴렀다.

"저, 짐꾼 아저씨. 안에 쥐가 진짜 손바닥보다 큰가요?"

박진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팔뚝만 한 놈들도 가끔 나오는데 불화살 한 방이면 도망갑니다."

민우가 덤덤하게 대꾸하자 송지훈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씩 웃었다.

"들었지, 진아 누나? 불화살이면 한 방이래. 우리 오늘 깔끔하게 쓸어 담고 점심에 삼겹살 먹으러 가자."

"지훈아, 너무 방심하지 마. 그래도 던전이잖아."

초보들의 전형적인 대화였다.

민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배혁진이 건네는 두꺼운 고무장갑과 빈 마대자루 세 개를 받아 들었다.

"자, 다들 장화 끈 단단히 묶으시고요. 슬라임 점액이 바닥에 깔리면 미끄러우니까 발밑 잘 보고 걸으세요."

배혁진이 철제 방화문을 열어젖혔다.

지하 배수로 게이트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눅눅한 하수구 냄새와 함께 차가운 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콘크리트 통로 벽면에는 푸른빛을 희미하게 뿜어내는 발광 곰팡이가 듬성듬성 자라나 있었다. 게이트 특유의 옅은 마력 반응이었지만 전날 보았던 핏빛 균열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 수준이었다.

민우는 세 사람의 뒤를 세 걸음쯤 떨어져 따랐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방거리는 물소리가 둥근 배수관 안을 울렸다.

"저기 슬라임 나왔다!"

송지훈이 기합을 내지르며 앞장서 달려나갔다.

그의 발차기가 수면 위에 떠 있던 청록색 슬라임 덩어리를 걷어찼다.

퍽 하는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슬라임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흩어진 점액질 사이에서 손톱만 한 투명 핵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뒤편 배수 파이프에서 튀어나온 뿔쥐 한 마리가 찍찍거리며 도망치려 했다.

"불꽃이여, 화살이 되어라!"

박진아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손가락만 한 불꽃 한 줄기가 날아가 뿔쥐의 등을 정확하게 태웠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뿔쥐가 뒤집어졌다.

"나이스!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진아 누나 솜씨 좋은데? 이 정도면 오늘 한 시간 만에 다 잡겠어!"

두 사람은 서로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신이 났다.

배혁진도 흐뭇하게 웃으며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췄다.

민우는 묵묵히 다가가 집게로 타버린 뿔쥐의 사체와 슬라임 핵을 주워 마대자루에 담았다. 자루 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역시 이게 맞아.'

지구가 멸망하네 마네 하는 살얼음판 경고를 보다가 이런 시시한 현장에 오니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남들이 무시하든 말든 적당히 짐을 나르고 적당히 땀을 흘리며 일이 끝나면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사 먹고 잠드는 삶.

그 소박한 일상이 민우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했다.

하지만 배수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공기의 결이 미세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민우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단순히 썩은 물 냄새가 아니었다. 옅은 유황 타는 냄새와 함께 차가운 금속 냄새가 섞여 흘러나왔다.

벽면에 들러붙은 발광 곰팡이들이 일정하지 않은 주기로 깜빡였다.

'이건…….'

새벽 볼링장 게이트에서 보았던 그 불길한 진동이었다.

그때처럼 거대한 차원 균열이 터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부 일대 지하에 누적된 마력 과부하의 여파가 이쪽 하위 게이트 배수관까지 스며들어 주변 마수들의 생체 흐름을 자극하고 있었다.

"배 반장님."

민우가 걸음을 멈추고 낮게 불렀다.

"응? 왜 그래요, 민우 씨?"

배혁진이 손전등을 돌려 민우를 쳐다보았다.

"여기서부터는 물 깊이가 무릎을 넘어가고 물살도 거셉니다. 오늘 목표치는 대충 채운 것 같은데 입구 쪽으로 돌아가는 게 안전할 것 같습니다."

배혁진이 앞쪽 수로를 살폈다.

확실히 통로가 좁아지면서 흘러가는 탁한 물의 수위가 올라가고 있었다.

"에이, 짐꾼 아저씨. 저 안쪽에 슬라임 서너 마리가 뭉쳐 있는 게 훤히 보이는데 왜 돌아가요? 저것만 잡으면 추가 수당인데."

송지훈이 장화로 물을 튀기며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지훈 씨! 혼자 불쑥 들어가면 안 됩니다!"

배혁진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말리려던 순간이었다.

쿵!

천장 배기 덕트의 낡은 철판이 찌그러지며 거대한 그림자가 흙탕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촤아아악!

거센 물보라와 함께 솟구쳐 오른 것은 일반적인 뿔쥐가 아니었다.

몸길이가 2미터를 훌쩍 넘는 거대한 멧돼지 형상의 괴수였다. 등 전체에 시커먼 쇠붙이 같은 철갑 가시가 빽빽하게 돋아나 있었고 피처럼 붉게 물든 두 눈이 번뜩였다.

"크샤아아악!"

배수관 전체를 뒤흔드는 포효에 고막이 찢어질 듯 울렸다.

"히익! 뭐, 뭐야 이거?!"

송지훈이 혼비백산하여 뒤로 나자빠졌다.

"변종 가시두더지다! E급 상위 개체야! 진아 씨, 당장 불화살 쏴요!"

배혁진이 소리치며 단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박진아는 사색이 된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탓에 마력의 영창이 엉망으로 엉켜 버렸다.

"불, 불꽃이여…… 꺄아악!"

지팡이 끝에서 검은 연기만 퍽 터져 나왔고 마수는 송지훈을 향해 맹렬하게 쇄도했다.

무쇠칼처럼 날카로운 앞발톱이 콘크리트 바닥을 파헤치며 돌진하는 기세는 당장이라도 송지훈의 상체를 짓이겨 버릴 듯했다.

배혁진의 짧은 단검으로는 놈의 단단한 철갑 가죽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송지훈은 흙탕물 속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하여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네.'

민우는 속으로 혀를 차며 손에 쥐고 있던 마대자루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으와앗! 살려주세요!"

민우는 발이 미끄러진 척 꼴사납게 앞으로 엎어졌다.

그의 몸이 물속으로 처박히는 찰나, 수면 아래로 늘어뜨린 오른손 검지손가락이 흙탕물 속을 가볍게 튕겼다.

직접 마력 출력: 0.0008%.

민우의 손끝에서 쏘아진 것은 눈에 보이는 마력 탄환이 아니었다.

배수로 바닥에 고여 있던 썩은 물의 잔류 수속성 마력을 가느다란 실처럼 엮어 가시두더지의 디딤발 아래로 보낸 초미세 개념 진동파였다.

톡.

수면 위로 물방울 하나가 가볍게 튀어 오르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미세한 진동은 돌진하던 가시두더지의 오른쪽 앞발 관절 속 마력 핵을 정확하게 흩트려 놓았다.

체내 마력 순환이 끊긴 마수의 발목이 순간적으로 꺾였다.

"크륵?!"

괴수가 허공을 헛디뎠다.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던 거대한 몸체가 송지훈의 코앞 반 뼘 거리에서 중심을 잃고 90도로 뒤틀렸다.

마수는 그대로 배수관 콘크리트 벽면을 향해 처박혔다.

콰아아앙!

벽면이 부서져 나가며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녹슨 철근 파편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날카롭게 꺾인 굵은 철근 하나가 마침 벽에 머리를 박고 기절한 가시두더지의 정수리를 수직으로 꿰뚫었다.

푸우욱!

검은 피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며 거대한 마수는 단 한 번의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흙탕물 위로 풀썩 늘어졌다.

정적.

배수관 안에는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송지훈은 온몸을 덜덜 떨며 흙탕물 속에서 제 양팔과 가슴을 더듬었다.

"나…… 나 살아 있는 건가?"

"지훈아! 흐으윽, 다친 데 없어?!"

박진아가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와 송지훈의 어깨를 붙잡았다.

배혁진은 손에 단검을 쥔 채 멍하니 벽에 처박혀 죽은 괴수와 천장의 부서진 철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상에…… 노후된 천장 철근이 머리에 직격했어. 이런 기적 같은 천운이 다 있나."

"내가…… 내가 넘어지면서 본능적으로 발을 걸었나? 내 너클에 스치고 벽으로 날아간 건가?"

송지훈이 멍한 얼굴로 흙탕물 묻은 제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맞아! 지훈이가 피하면서 궤도를 바꾼 거야! 지훈아, 너 진짜 대단하다!"

박진아가 눈물을 닦으며 송지훈의 등을 두드렸다.

민우는 흙탕물에 젖은 바지 무릎을 털며 엉금엉금 기어 일어났다.

"아이고 허리야…… 쥐새끼가 왜 저렇게 큽니까……."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겁에 질린 무능한 F급 짐꾼이었다.

배혁진이 얼른 다가와 민우의 겨드랑이를 부축해 주었다.

"민우 씨, 괜찮아요? 어디 부러진 데는 없어요?"

"네, 넘어지면서 물만 좀 먹었습니다."

"휴, 천만다행입니다. 하마터면 오늘 다 같이 저세상 갈 뻔했어요.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배혁진은 식은땀을 닦아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민우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시야를 스쳐 가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미세 개념 진동 간섭 성공]

[직접 방출 마력: 0.0008%]

[지구 차원 과부하율 변동 없음: 99.01%]

[주변 하위 게이트 차원벽 안정도: 주의 단계 지속]

과부하율은 단 0.001%도 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파괴적인 마력을 꺼내지 않고 마수 자체의 육중한 돌진력과 주변 환경을 살짝 꺾어 놓았을 뿐이라 세계의 차원 축에는 아무런 충격도 가지 않았다.

"자, 다들 진정하고 이 녀석 사체 수습합시다. E급 변종이라 철갑 가죽과 마나석이 꽤 쏠쏠할 겁니다. 민우 씨, 큰 자루 이리 줘요."

"네, 여기 있습니다."

민우는 집게와 마대자루를 챙겨 가시두더지 앞으로 다가갔다.

배혁진이 능숙하게 가죽을 벗겨내는 동안 민우는 마수의 머리통에 박힌 마나석을 은밀히 살폈다.

표면에 미세하게 뒤틀린 공간 잔류 마력이 스며들어 있었다.

'서부 일대 게이트들의 지지벽이 전반적으로 얇아지고 있어.'

이대로라면 일반 하위 던전에서도 이런 변종 마수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올 터였다.

그렇다고 민우 혼자 온 동네 게이트를 들쑤시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힘을 쓰면 지구가 깨지고 가만히 두면 균열이 번지는 딜레마였다.

오후가 되어서야 배수로 정화 작업이 완전히 끝났다.

게이트 밖으로 걸어 나오자 따스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눅눅한 하수구 악취를 날려 보내는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관리소 앞 정산대에서 배혁진이 두툼한 현금 봉투를 건넸다.

"민우 씨, 오늘 고생 많았어요. 가시두더지 보너스로 2만 원 더 챙겨 넣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장님."

봉투 속에는 만 원짜리 지폐 열 장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피 묻지 않은 온전한 하루치 노동의 대가였다.

송지훈과 박진아는 삼겹살집으로 향하며 신나게 무용담을 떠들어댔다. 송지훈의 무용담 속에서 멧돼지 마수는 어느새 그의 번개 같은 카운터 펀치를 맞고 날아간 것으로 둔갑해 있었다.

민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관리소 옆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 어귀에 자리한 허름한 순대국밥집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늦은 점심시간이라 가게 안은 한산했다.

"이모님, 순대국밥 하나 주세요. 양념장은 따로 주시고요."

"네, 총각. 금방 갖다줄게."

잠시 후 뚝배기 안에서 뽀얀 국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순대국밥이 나왔다.

민우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 입 떠먹었다.

뜨겁고 구수한 육수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차갑게 식어 있던 뱃속을 훈훈하게 덥혀 주었다.

새벽부터 이어졌던 긴장과 피로가 눈 녹듯 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거면 됐어.'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되는 것도, 남들의 찬사를 받는 것도 민우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저 오늘처럼 십만 원을 벌어서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배불리 먹고 내일도 무탈하게 눈을 뜰 수 있는 세상. 민우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 사소한 평화뿐이었다.

밥 한 공기를 뚝배기에 말아 넣고 깍두기를 얹으려던 민우의 눈앞에 다시 한번 붉은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서울 서부 제4구역 D급 던전 공간 왜곡 수치 급상승 감지]

[지구 차원 과부하율 임계점 근접 경고 대기 중]

민우는 깍두기를 집던 젓가락을 허공에 멈췄다.

"……국밥 한 그릇 편하게 먹을 틈을 안 주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밥을 푹 떠서 입안에 밀어 넣었다.

세상이 또다시 그의 소박한 은퇴 계획을 방해하려 하고 있었다.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

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표지소설
연재중 16%
#현대판타지#연예계물#매니저물

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배우들의 숨은 재능과 한계, 작품의 흥행 가능성을 스탯으로 볼 수 있게 된 전직 로드 매니저 강시우가 1인 기획사 루미너스를 세운다. 편의점 알바 유나린, 무너진 연기파 최지환, 이미지에 갇힌 신우진을 발굴하고 신성 엔터의 방해와 금융·제작 전쟁을 뚫고 연예계의 판을 다시 짜는 현대판타지 매니저물.

31화2026.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