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 파티 식량 담당관은 버프를 차린다

2화: 칼을 쥐기 전의 식단표
아침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제3보급창 연병장은 무거운 침묵에 짓눌려 있었다.
방패 기사 오르반은 여전히 자신의 왼쪽 어깨를 굵은 손으로 쥐어짠 채 멍하니 이현을 바라보았다.
"보급관 양반. 방금 한 말, 진짜요?"
"내가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득이 없지 않습니까."
이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허리춤의 가죽 배낭을 열었다. 배낭 안쪽은 크기별로 규격화된 수십 개의 가죽 주머니와 나무통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이현은 그중에서 손바닥만 한 옹기 단지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산사 열매 향과 청량한 풀뿌리 냄새가 연병장 공기 중으로 훅 퍼졌다.
"이게 뭡니까?"
"산사 열매 농축액에 마력 소화초를 짓이겨 고아낸 페이스트입니다. 숟가락으로 크게 떠서 씹지 말고 삼키십시오."
"풀뿌리 으깬 즙 따위로 내 속이 편해질 리가……."
"지상용 고농축 비스킷은 수분을 빨아들여 위장 벽에 달라붙는 성질이 있습니다. 위장이 돌처럼 굳어 십이지장을 막았는데 토지 속성의 마력이 온전히 순환될 리 없지요."
이현이 나무 숟가락으로 진득한 적갈색 젤리를 떠서 오르반의 코앞에 내밀었다.
"돌덩이를 짊어지고 방패를 들지 뱃속을 비우고 어깨를 가볍게 할지는 기사님의 선택입니다."
오르반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숟가락을 낚아채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쌉싸름한 산미가 혀를 감도는가 싶더니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젤리가 위장 속에서 번개처럼 뜨거운 열기로 퍼져 나갔다.
"커헉……!"
오르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명치 부근에서 딱딱하게 뭉쳐 있던 냉기와 묵직한 이물감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렸다. 위벽을 쥐어짜던 경련이 순식간에 풀리며 등뼈를 타고 묵직한 피가 내달렸다.
그 순간 이현이 오르반의 왼쪽 쇄골 아래와 갈비뼈 틈새를 꾹 눌렀다.
두둑 하는 파열음과 함께 막혀 있던 마력의 맥동이 뚫렸다.
"어…… 어라?"
오르반이 조심스럽게 왼팔을 돌려 보았다. 쇳덩이를 얹어 놓은 듯 삐걱거리던 어깨가 기름칠한 기계처럼 매끄럽게 회전했다.
"어깨가…… 안 결려! 숨도 훨씬 깊게 쉬어지잖아!"
오르반이 어린아이처럼 방패를 치켜들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법사 칼릭스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칼릭스는 얇은 은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단순한 위장 연동 운동 촉진일 뿐입니다. 소화가 원활해져 일시적으로 혈류가 개선된 것에 불과해요. 대심연의 마력 생태계는 삼류 요리사의 민간요법 따위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학자다운 분석이군요."
이현은 대꾸하며 배낭 안쪽에서 은박으로 감싼 얇은 향편 하나를 꺼냈다.
"하지만 밤새 마나 각성제를 들이붓고 뇌 신경을 태운 학자에게 어울리는 태도는 아닙니다. 이걸 어금니 사이에 물고 지그시 씹어 보십시오. 침은 천천히 삼키며 증기를 비강과 관자놀이로 밀어 올리시고요."
"이게 뭔데요? 난 출처도 모르는 잡풀을 입에 넣지 않습니다."
"북부 고산지대의 설한초 잎을 말려 박하 향유에 살짝 덖은 겁니다. 마력 화덕의 잔열로 불순물을 태워 정제했으니 중독성도 없지요."
칼릭스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붉게 충혈된 눈동자는 이미 극심한 두통으로 떨리고 있었다.
결국 마탑 학자의 탐구열이 자존심을 이겼다. 칼릭스는 마지못해 은박을 벗기고 은빛 잎사귀를 입안에 넣었다.
바작 하는 소리와 함께 서늘하고 순수한 냉기가 입안 전체를 휩쓸었다.
"……?!"
향편에서 뿜어져 나온 서릿발 같은 향기가 코와 관자놀이를 단숨에 관통했다.
머릿속을 찌르던 이명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타오르는 모래를 삼킨 듯 건조하던 기도가 촉촉하게 젖어 들며 폐부 가득 맑은 공기가 차올랐다.
"마나의 순환이…… 왜곡 없이 안정되었다고? 고작 풀잎 하나로 뇌 신경의 과열을 잡았단 말입니까?"
칼릭스의 목소리가 당혹감으로 가늘게 떨렸다. 눈앞의 남자는 취사병이 아니라 인체의 마력 구조를 해부하듯 꿰뚫어 보는 정밀한 조율사였다.
그 옆에서 조용히 성경을 쥐고 있던 성녀 세라 벨린이 불안한 기색으로 은발을 쓸어넘겼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은도금된 신전의 성수병이 매달려 있었다.
이현의 시선이 그 차가운 성수병에 멎었다.
"성녀님. 그 물병 겉면에 맺힌 이슬이 보입니까?"
"예? 이건 새벽 제단에서 축복을 내린 신성한 정화수입니다."
"지나치게 차갑습니다. 공복에 얼음장 같은 냉수를 들이켜면 복부 온도가 떨어집니다. 체온이 식으면 신성력의 회로가 굳어 명치 아래로 울혈이 생기지요. 손끝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세라는 놀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현의 말대로 섬세한 손가락 끝이 푸르스름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이현은 배낭 옆에 결속된 마력 화덕 '잔불'의 측면 통풍구를 열었다. 붉은 녹이 슨 낡은 화덕 안쪽에서 희미하고 은은한 주홍빛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덕 상단에 얹어 둔 작은 구리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치익 소리와 함께 이현이 따뜻한 물을 목제 컵에 따라 세라에게 건넸다.
고소하게 볶아낸 메밀 냄새와 함께 알싸하고 달콤한 향온근의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말린 향온근과 메밀을 잔불의 약불로 우려낸 온화수입니다. 마셔 보십시오. 얼어붙은 뱃속을 녹여야 신성력도 제 길을 찾습니다."
세라는 주저했으나 코끝을 스치는 구수한 온기는 거부하기 힘들 만큼 따스했다.
세라가 컵을 입에 대고 온화수를 조심스럽게 들이켰다.
따뜻한 물줄기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굳어 있던 위장을 감싸 안았다. 차갑게 응어리져 있던 하복부의 마력이 풀리며 봄볕 같은 온기가 전신 혈관을 타고 손끝까지 뻗어 나갔다.
"아……."
세라의 뺨에 발그레한 생기가 돌았다. 피부 아래에서 거칠게 맴돌던 백색 광륜이 잔잔하게 가라앉으며 호흡이 한결 편안해졌다.
"신성력이…… 억지로 밀어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요. 신전의 기도문 없이도 이런 평온함이 찾아오다니."
세라의 녹색 눈동자에 감출 수 없는 경이로움이 번졌다.
"와아, 대단하네. 십 분도 안 돼서 우리 파티의 괴물 세 명을 조용하게 길들였잖아?"
정찰자 미라 칼센이 허리춤에 양손을 얹은 채 키득거리며 다가왔다.
"저기 요리사 양반. 그럼 내 몫은 없어? 나도 은근히 어깨가 쑤시는데."
이현은 힐끗 미라를 훑어보더니 작은 가죽 쌈지 하나를 툭 던져 주었다.
미라가 쌈지를 낚아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얇게 썰어 말린 소금에 절인 감귤 껍질과 붉은 산열매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바람의 냄새를 읽느라 호흡을 자주 멈추는 버릇이 있더군요. 척후 중에 혀가 마르면 후각과 미각의 반응 속도가 둔해집니다. 이동할 때 한 조각씩 혀 밑에 물고 침을 모으십시오. 냄새의 미세한 변화를 훨씬 빠르게 감지할 겁니다."
미라의 입꼬리가 굳었다. 자신이 냄새를 맡을 때 호흡을 멈추는 습관은 도적 길드의 베테랑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버릇이었다.
"……진짜 귀신이네, 이 보급관 양반."
미라는 감귤 조각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씩 웃었다. 새콤하고 짭짤한 즙이 침샘을 자극하며 말라붙었던 입안에 즉각적으로 감각을 되살려 주었다.
파티원들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짐꾼 취사병을 떠맡았다는 불만은 사라지고 보급관 이현을 향한 경계 섞인 인정과 실질적인 기대감이 연병장을 메웠다.
"출발하지."
줄곧 침묵을 지키며 이 광경을 눈에 담고 있던 용사 라엘 아르디스가 낮게 입을 열었다.
여섯 명의 원정대는 연병장을 빠져나와 대심연의 거대한 관문 기지를 향해 완만한 산비탈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협곡 도로는 거친 암석과 메마른 자갈로 뒤덮여 있었다.
대열의 맨 앞에서 걷던 라엘이 문득 보폭을 늦추더니 이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현 담당관."
"말씀하십시오, 용사님."
라엘은 앞을 바라본 채 다른 대원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연병장에서 내 호흡을 두고 잿빛 탄내가 난다고 했지. 정확히 무엇을 본 건가?"
"보았다기보다는 맡았습니다. 성검의 광휘는 눈부시지만 심장에서 폐로 이어지는 숨결의 끝자락이 메말라 있었습니다. 기름이 바닥난 등잔에 심지만 타들어 갈 때 나는 냄새였지요."
라엘의 턱 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비밀이었다. 성검 루미나스는 사용자의 생명력을 연료 삼아 파괴력을 발휘하는 무기였다. 검을 쥘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불타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지만 결코 티를 낼 수 없었다.
"……그게 성검의 대가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세부적인 원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그런 숨소리를 내는 병사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무기를 쥐고 버티는 자들의 숨소리였지요."
이현은 주머니에서 얇은 양철통 하나를 꺼내 라엘에게 건넸다. 안에는 짙은 갈색의 꿀에 절인 야생 진정근 편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성검이 마시는 피를 내가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슴이 타들어 가고 목구멍이 모래처럼 바스러질 때 이걸 한 조각씩 혀 아래에 녹여 드십시오. 폐의 열기를 식히고 기도의 수분을 지켜줄 겁니다."
라엘은 양철통을 내려다보았다. 동정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그저 눈앞의 동료가 쓰러지지 않고 칼을 휘두를 수 있도록 묵묵히 돕겠다는 보급관의 단단한 눈빛만이 있었다.
라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고맙군. 유용하게 쓰도록 하지."
라엘이 양철통을 가슴팍 안주머니 깊숙이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정오 무렵 원정대는 마침내 대심연의 입구인 제1관문 요새에 당도했다.
거대한 흑청색 암석을 깎아 만든 수십 길 높이의 아치형 관문 너머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지하 세계의 암흑이 웅장하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대심연.
마왕성으로 이어지는 저주받은 수직 던전이었다.
관문 안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지상의 상쾌한 공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기름지고 끈적하며 희미하게 썩은 꽃 향기와 유황 냄새가 엉킨 이질적인 마력의 돌풍이 뺨을 때렸다.
"우욱…… 공기가 왜 이리 무거워?"
오르반이 코를 감싸 쥐었다.
그때 관문 앞에 정차해 있던 왕국 보급 수송대의 마차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어, 어라? 이 상자 왜 이래!"
수송병들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이현이 다가가 마차 위에 실린 참나무 보급 상자를 살폈다. 왕도에서 직송된 특급 휴대용 흑빵과 치즈 그리고 염장육 상자였다. 상자 표면에 칠해져 있던 은빛 보존 마법진이 칙칙한 회색으로 바래더니 밀랍 틈새로 검붉은 거품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마력 침식입니다."
이현이 냉정하게 상자 뚜껑을 열었다.
단단하던 흑빵은 이미 솜뭉치처럼 물러터져 푸르스름한 포자를 뿜어내고 있었고 훈제 치즈는 쉰 냄새를 풍기며 진흙처럼 녹아내려 있었다.
"말도 안 돼! 왕도 최고의 보존 결계를 둘렀는데…… 관문 입구에 닿자마자 썩기 시작한다고?"
칼릭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대심연의 농밀한 마력은 지상의 유통 상식을 통째로 부정합니다. 지상의 보존식은 여기서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독 덩어리로 변질되지요."
이현이 썩어버린 빵을 바닥에 던졌다. 바닥에 닿은 빵에서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잿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파티원들의 얼굴이 일제히 창백해졌다. 지상의 보급이 끊긴다는 것은 곧 굶주림과 죽음을 의미했다.
공포와 혼란이 엄습하려는 찰나 이현이 낡은 마력 화덕 '잔불'을 어깨에 단단히 고쳐 멨다.
"당황할 것 없습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니까요."
이현의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동료들의 귀를 울렸다.
"지상의 식량이 썩는다면 이 던전이 키워낸 것들을 사냥해 먹으면 됩니다. 몬스터의 살점, 동굴의 버섯, 지하 암반수까지. 독을 걸러내고 마력을 정화해 당신들의 칼날을 벼릴 한 끼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이현이 어둠이 도사린 대심연의 입구를 향해 첫 발을 내딛었다.
"칼을 쥐십시오. 이제부터는 던전의 식탁을 빼앗을 시간입니다."
보급관의 등 뒤로 용사 파티의 다섯 자루 무기가 비로소 하나의 호흡으로 망설임 없이 암흑 속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