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상담 간 천마님이 유통망을 독점함

13화: 끊긴 물건줄 밖의 장터
낙도 만물상 안쪽 탁자 위에는 휴대전화가 여섯 대 놓여 있었다.
화면마다 거의 같은 문장이 떠 있었다.
[거래처 재정비에 따라 다음 주부터 납품이 어렵습니다. 천마 플랫폼 관련 입점 사업장은 신규 주문을 받지 않습니다.]
반찬가게 이복자는 전원을 꺼 버린 휴대전화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말이 재정비지. 우리더러 앱에서 나가라는 거예요. 무말랭이도 고춧가루도 오늘 주문을 못 넣었어요. 내일이면 반찬통이 비어요."
건어물 가게를 하는 오한석이 빈 종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멸치 두 상자만 달라고 했는데 담당자가 전화를 끊었습니다. 우리 집 단골이 천마 플랫폼으로 주문하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한테 물건이 없다고 할 수도 없잖습니까."
구석에 앉아 있던 과일가게 주인은 종이 주문서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저녁에 제사상 과일을 보내 달라는 주문도 받았어요. 취소하면 손님은 내가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겠죠. 길드가 아니라 우리 가게 이름이 욕을 먹을 겁니다."
현은 상자와 휴대전화를 차례로 보았다. 어느 곳에도 큰 폭력은 없었다. 대신 내일의 장사와 오늘의 약속을 조용히 잘라 내는 문장만 있었다.
"탈퇴하면 다시 물건 준답니까?"
누군가 묻자 만물상 안이 더 조용해졌다.
이복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냥 가게 하나 살리자고 나가야 하나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나가면 다음에는 또 누구를 찍을까요."
현이 카운터 안에서 큰 장부를 꺼냈다.
"탈퇴를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선 무엇이 끊겼는지부터 적어라. 품목과 남은 재고를 적어라. 물건이 반드시 필요한 시각도 적어라. 겁은 장부 끝에 적어도 된다. 다만 물건보다 앞에 적지는 말거라."
상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김철수는 노트북을 켜고 주문 현황을 띄웠다. 화면에는 채소와 건어물, 포장 용기 주문이 빠르게 쌓이고 있었다.
"대표님, 이거 도매상 하나 문제가 아니에요. 차단한 품목이 너무 넓어요. 채소 쪽은 동부식자재, 건어물은 해담유통, 포장재는 새롬패키지예요. 회사 이름은 다 다른데 문자 발송 양식이 똑같습니다."
"상대는 우리 가게의 물건을 끊는 것이 아니다. 상인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손님이 등을 돌리면 너희가 먼저 플랫폼을 떠날 거라고 계산했겠지."
현은 장부를 덮었다.
"그러니 우리는 물건을 구하는 데서 끝내지 않는다. 약속을 지킬 길을 만들겠다."
철수는 한참 화면을 훑다가 의자에서 몸을 돌렸다.
"산지 직거래 게시판을 봤는데 경기 북부에 겨울무를 내놓은 농가가 있어요. 골드 크레센트 물류 쪽에서 수거를 취소했대요. 그런데 현장 확인도 안 됐고 차도 없고 새벽까지 내려오려면 비용이……."
"수요는 이미 여기 있다."
현은 상인들이 적어 낸 종이를 펼쳤다.
무 스무 상자. 배추 열 상자. 포장 용기 천 개. 필요한 시간은 모두 내일 아침이었다.
"이복자 사장은 반찬가게 주문을 묶어 내고 오 사장은 건어물 손님에게 채소 꾸러미를 함께 알리게. 서로 다른 가게라도 배달길은 하나면 된다. 철수는 공동 발주 금액을 나눠 계산해라."
철수가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래도 농가가 물건을 안 보내면요? 상인분들이 먼저 돈을 냈다가 못 받으면 더 큰일인데요."
"대금은 플랫폼이 맡는다. 생산자가 상차 전에 사진과 수량을 올리고 상인은 도착 뒤 검품한다. 기준 미달 물량은 정산에서 뺀다. 운송 중 생긴 손실은 한 가게에 떠넘기지 말고 공동 발주한 만큼 나눈다."
현은 장부에 네 줄을 적었다. 선결제 보관, 상차 확인, 도착 검품, 손실 분담.
"메뉴는 손가락으로 만들고 신용은 발로 만든다. 우선 문자로 받거라."
철수는 황당한 얼굴로 웃다가 곧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복자도 자기 휴대전화를 들어 단골들에게 보낼 문장을 고쳤다.
[내일 아침 반찬 재료가 들어옵니다. 주문 취소하지 마세요. 제가 약속 지킬게요.]
공개 게시판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자 쉰 목소리의 남자가 받았다.
"박순태입니다. 무는 아직 있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오늘은 누구하고도 계약 안 합니다. 취소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요."
현이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얼마에 넘길 생각입니까?"
"도매상이 만오천 원을 불렀습니다. 수거 취소하고 나서부터는 칠천 원에도 가져가겠다는 사람뿐입니다."
"만오천 원에 사겠다. 단 물건을 보고 상한 것이 있으면 빼고 계산한다. 오늘 계약금의 절반을 보내고 내일 상차 전 나머지를 치르지. 납품처는 낙도구 상인들이다."
수화기 너머가 한참 조용했다.
"그 가격이면 거짓말이 더 쉽습니다."
"거짓말로 장사하는 자는 오래 못 간다. 주소를 보내라. 본인이 가서 장부와 무를 보겠다."
현은 전화를 끊고 코트를 걸쳤다.
최두식이 서둘러 차 키를 들었다.
"대표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저쪽이 낙도구까지 물건 못 들어오게 막았는데 길에서 뭐 하려는 거 아닙니까?"
"길이 막히면 통과할 방법을 찾고 사람이 막히면 법을 찾는다. 오늘은 무를 사러 가는 길이다. 괜한 싸움은 장부만 더럽힐 뿐이다."
선별장은 밤공기보다 더 차가웠다.
하얀 무 상자들이 천장 가까이 쌓여 있었고 한쪽 환풍기는 얼어붙은 날개를 끼익거리며 겨우 돌고 있었다. 마른 체격의 박순태가 장갑 낀 손으로 상자 하나를 두드렸다.
"여기까지 왔다고 믿지는 마십시오. 물건 보고 가격 깎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현은 대답 대신 무 하나를 들어 들었다. 흙을 털어 내고 단단한 무청과 껍질을 살폈다. 손끝으로 무의 속까지 스민 찬 기운을 가늠했다.
"상한 것은 열두 상자다. 이건 시장에 내면 신용만 깎는다. 나머지는 좋구나."
박순태의 눈이 커졌다.
"열두 상자를 어떻게 바로 아십니까?"
"상인은 물건의 얼굴을 본다."
현은 철수에게 받은 송금 화면을 내밀었다. 계약금이 입금됐다는 알림이 박순태의 휴대전화에 울렸다.
"상한 열두 상자는 내가 사지 않는다. 대신 버리지 말고 따로 두어라. 낙도구의 국밥집과 협의해 손질 가능한지 묻겠다. 물건이 나빠서가 아니라 제값을 못 받을 때도 길은 남긴다."
박순태는 한동안 화면과 현을 번갈아 보았다.
"수거 취소한 쪽에서는 하자 물량까지 전부 떠넘기고는 반값만 줬습니다. 사장님은 왜 그렇게 안 합니까?"
"네가 잘못한 물건의 값은 네가 책임져야 한다. 남이 끊은 약속의 값까지 네게 씌우는 것은 장사가 아니라 약탈이다."
박순태의 굳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그때 환풍기 소리가 뚝 끊겼다. 선별장 안의 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아이고. 이러면 무청부터 얼어요."
박순태가 기계 쪽으로 달려갔다. 두식도 뒤따랐지만 얼어붙은 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현은 주변을 살핀 뒤 손바닥을 환풍기 덮개에 가볍게 댔다. 차가운 진기가 아니라 아주 얇은 온기가 쇠축 안으로 스며들었다.
끼이익.
멎었던 날개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두식이 입을 벌렸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이 기계를 좀 아시네요."
"겨울 장사를 하려면 바람의 성질도 알아야 한다. 상차를 시작해라."
박순태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작업자들을 불러 무 상자를 차에 실었다.
상자 사이에서 구겨진 통보서 한 장이 떨어졌다. 현이 주워 보니 상단에는 동부식자재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고 아래에는 낯선 운송 지시 코드가 적혀 있었다.
[GC-LD-71]
현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철수가 낙도구에서 받은 차단 문자를 확대했다. 문자 끝에도 같은 코드가 아주 작게 붙어 있었다.
"대표님. 이거 같은 데서 보낸 거예요?"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같은 손이 쓴 장부일 가능성은 있구나."
새벽의 낙도구 골목은 물류차의 후진 경고음으로 깨어났다.
최두식과 조태식 일당은 무 상자를 나르며 숨을 헐떡였다. 조태식은 새벽부터 왜 자기가 무를 옮겨야 하느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현과 눈이 마주치자 묵묵히 상자를 들었다.
이복자는 도착한 무를 쪼개 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진짜 왔네요. 이 시간에."
그녀는 곧바로 반찬가게 냉장고 문을 열고 무채를 썰기 시작했다. 손님들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차례로 답장이 돌아왔다.
[그럼 점심 전에 들를게요.]
[사장님 믿고 기다렸어요.]
이복자는 젖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저 안 나갈래요. 앱에서도 안 나가고 장터에서도 안 나갈래요. 다음에도 물건이 끊기면 같이 방법을 찾겠습니다."
오한석이 건어물 상자를 옮기며 낮게 웃었다.
"그 말은 내 쪽 장부에도 적어 두죠. 혼자 버티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오늘만 온 것이 아니다."
현이 말했다.
"각자 필요한 물건과 수량을 앱에 올려라. 생산자에게는 납품 전에 정산한다. 상인은 손님에게 약속한 시간에 물건을 준다. 배송비는 여러 가게가 함께 나눈다. 누가 손해를 볼지는 장부에 먼저 적고 모두가 확인한다. 이것이 오늘 만든 규칙이다."
철수가 태블릿을 들어 보였다. 천마 플랫폼 첫 화면에 임시 메뉴가 떠 있었다.
[낙도구 공동 발주]
이복자가 떨리는 손으로 가입 버튼을 눌렀다. 오한석도 뒤따라 주문 수량을 올렸다. 다른 상인들 역시 자기 가게의 부족한 품목을 적기 시작했다.
"대표님, 저희가 여기 남아도 되겠습니까?"
현은 상인들 앞에 놓인 장부를 가리켰다.
"남는 것은 내가 허락하는 일이 아니다. 서로가 약속을 지키면 누구도 너희를 장부 밖으로 밀어낼 수 없다."
만물상 안에서 주문 알림이 하나씩 울렸다.
현은 통보서의 코드와 차단 문자를 나란히 놓았다.
"철수야. 이 코드가 찍힌 거래처와 세금계산서 발행 주체를 공개 자료 안에서 찾아라. 이름을 나눈다고 장부까지 나뉘는 것은 아니다."
철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네. 이번에는 누가 물건을 끊었는지부터 끝까지 맞춰 볼게요."
골드 크레센트가 닫아 버린 문 밖에서 작은 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터의 첫 영수증은 언젠가 금빛 초승달의 목을 조를 칼날이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