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의 후손이 현대 무림을 씹어먹음

5화: 협찬 도복을 입은 깡패들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진우는 링 구석에서 조용히 숨을 골랐다. 가슴으로 들이마신 공기를 명치를 지나 단전 깊숙이 밀어 넣었다. 거칠게 치솟으려던 열기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차분한 불씨로 갈무리되었다.
무턱대고 내력을 뿜어내면 몸이 버티지 못했다. 비화록에 적힌 정통 무학의 요결은 겉으로 위세를 과시하는 데 있지 않았다.
'혈(穴)은 기운의 샘이자 힘줄의 매듭이다. 큰 힘으로 부술 필요 없이 손끝의 찰나로 매듭을 건드리면 범 같은 장정도 제 힘에 꺾여 고꾸라진다.'
점혈술 [팔문쇄혈(八門鎖穴)]. 그리고 그림자 없이 몸을 회전시키는 보법 [무영회보(無影廻步)].
진우는 매트 바닥을 발바닥 전체로 지그시 쓸어내리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소리를 내며 바닥을 박차는 현대식 스텝과 달리 관절의 각도를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이자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돌아갔다.
"진우야!"
체육관 문이 열리며 유도현이 뛰어들어왔다. 손에는 캔 음료가 들려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너 아직 여기 있었어? 관장님은?"
"잠시 볼일 보러 나가셨어요. 무슨 일인데요?"
서태만은 2주 뒤 KMO 실사를 앞두고 루키전 참가비와 공과금을 빌리러 시장 쪽 지인을 만나러 간 상태였다. 아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며 나선 아버지의 뒷모습이 눈에 밟혀 진우는 체육관을 비울 수 없었다.
도현이 차가운 캔을 건네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지금 폼 잡을 때가 아니야. 백호무도관 상급생들이 도복 챙겨 들고 이쪽으로 출발했단 말이야."
화면 속에는 남색 도복을 입은 남학생의 사진이 떠 있었다. 어깨와 가슴팍에는 'VOLTEX GEAR' 로고와 KMO 공인 패치가 빼곡했다.
"백호무도관 주장 강태석이야. 다음 달 KMO 루키전 32강 시드권자에 전속 협찬까지 받는 놈이지. 덩치 큰 이진만까지 같이 움직였어."
"루키전 시드권자가 여긴 왜 와요?"
"어제 오 관장이 망신당하고 오늘 점검관까지 허탕 쳤잖아. 2주 뒤 실사까지 갈 것도 없이 오늘 체육관을 박살 내서 자진 폐업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지! 문 잠그고 피하자. 강태석은 뒤에 스폰서 끼고 있어서 사고 쳐도 협회에서 덮어준단 말이야."
진우는 차가운 캔을 따서 한 모금 넘겼다. 서늘한 기운이 단전 언저리의 불씨와 맞닿았다.
"피할 이유 없어요. 어차피 루키전에 나가려면 마주쳐야 할 가짜들이잖아요."
진우의 담담한 대답에 도현이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짓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체육관 철문이 거친 발길질에 젖혀지며 요란한 쇠비명을 질렀다.
열린 문틈으로 서늘한 바람과 함께 세 명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선두에 선 남자는 강태석이었다. 화려한 협찬 패치가 붙은 도복을 입은 그는 껌을 질겅거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 뒤에는 키 180에 체중 100킬로그램에 달하는 거구 이진만이 서 있었다. 험상궂은 얼굴의 전형적인 중량급 선수였다.
그 뒤에서 손목에 붕대를 감은 장철호가 눈치를 보며 따라 들어왔다.
"야, 철호야. 네 손목 삐었다는 놈이 저 멸치냐?"
강태석이 낄낄거리자 장철호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형. 저놈이 어제 요상한 꼼수를 썼어요."
"꼼수는 무슨. 가난뱅이 도장 놈들이 쓰는 삼류 잡기술이겠지."
강태석이 신발을 신은 채 매트 위로 걸어 올라왔다. 흙 묻은 운동화 바닥이 깨끗한 매트 위에 짙은 자국을 남겼다. 도현은 기둥 뒤로 숨어 스마트폰 카메라를 켰다.
진우가 수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신발 벗고 올라오세요. 청소 끝난 매트입니다."
"하! 신발? 네 애비 어디 갔냐? 2주 뒤 실사 나오면 어차피 백호무도관 창고로 넘어올 자리인데 미리 짐이나 빼두라고 알려주러 왔다."
이진만이 샌드백을 걷어차더니 책상 위에 놓인 서태만의 낡은 가죽 수첩을 툭 쳐서 떨어뜨렸다. 박 노인과 민지의 건강 상태가 적힌 수첩이었다.
수첩이 흙먼지 바닥을 나뒹굴었다. 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서늘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수첩 주워요."
진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체육관 안의 공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강태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내가 누군지 몰라? KMO 루키전 시드권자 강태석이다. 볼텍스 기어 전속 협찬받는 공인 랭커라고. 네 애비가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명령질이야?"
강태석이 손을 뻗어 진우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거구 이진만도 왼쪽 퇴로를 막아서며 몸을 들이밀었다.
손끝이 닿기 직전이었다.
진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천극신수]의 얕은 호흡을 돌리며 [무영회보]의 기본 보법인 보영보(步影步)를 펼쳤다. 발끝을 틀며 반 발자국 파고들자 상체가 스치듯 반 뼘 기울어졌다.
휙!
강태석의 손아귀가 허공을 갈랐다. 당황한 강태석이 곧바로 왼손 스트레이트를 질러왔다. 번개 같은 직선 펀치였다.
주먹이 안면에 닿기까지 불과 한 뼘.
진우는 주먹을 힘으로 맞받아치지 않았다. 힘에는 힘으로 맞서지 않는다는 태극의 이치였다.
진우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모아지며 바람을 갈랐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가느다란 기운을 손끝에 집중시킨 뒤 강태석의 팔꿈치 안쪽 곡지혈(曲池穴)을 가볍게 찔렀다.
툭.
"컥?!"
강태석의 입에서 해괴한 비명이 터졌다. 타격의 고통이 아니었다. 전류가 팔 신경을 관통하듯 퍼지더니 어깨부터 손끝까지 모든 힘이 풀려 버렸다. 뻗었던 주먹이 축 늘어졌다.
진우는 회전축을 따라 몸을 반 바퀴 돌렸다. 강태석의 발목 뒤쪽에 진우의 뒤꿈치가 걸렸다.
휘청!
"우와악!"
도복 폼을 잡던 강태석이 허우적거리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하필이면 그 방향에는 진우를 덮치려 달려들던 거구 이진만이 있었다.
쿵!
두 사람의 머리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진만이 턱을 감싸 쥐며 비틀거렸다.
"크어억! 태석아, 네가 왜 날 쳐!"
강태석은 축 늘어진 오른팔을 붙들고 파랗게 질려 있었다.
"팔… 팔이 마비됐어!"
"뭐라는 거야!"
이진만이 눈이 뒤집혀 양팔을 벌리며 곰처럼 덮쳐왔다. 100킬로그램의 체중으로 그대로 짓눌러 버릴 기세였다.
진우의 눈에 거구의 돌진은 빈틈투성이였다. 옆으로 비껴선 진우는 거대한 몸집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 오른발 끝으로 이진만의 무릎 뒤 오금 한가운데 위중혈(委中穴)을 톡 건드렸다.
딱.
"어… 어어?"
무릎 힘줄이 굳어버리며 다리에 들어간 힘이 사라졌다. 거구는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매트 위로 미끄러졌다.
콰당탕!
"끄아아악! 내 다리! 다리가 안 펴져!"
이진만이 배를 바닥에 깐 채 비명을 질렀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데도 하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설 수가 없었다.
체육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강태석은 한쪽 팔이 마비된 채 바들바들 떨었고 거구 이진만은 바닥에 엎어져 흙먼지를 마시며 뒹굴었다. 문간에 서 있던 장철호는 넋이 나가 버렸다.
"히, 히익…!"
장철호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치다 청소용 구정물통에 걸려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철퍼덕!
"우웨엑!"
장철호는 구정물을 온몸으로 뒤집어썼고 얼굴에는 낡은 걸레 조각이 얹혀졌다.
"푸하하하!"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유도현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손에 든 휴대폰은 바닥을 기어 다니는 세 사람을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진우는 떨어진 아버지의 가죽 수첩을 주워 먼지를 털어냈다. 수첩을 책상 위에 올려둔 진우가 강태석을 내려다보았다.
"뼈는 안 부러졌습니다. 뭉친 혈도를 풀어드렸을 뿐이니 한 시간쯤 지나면 기운이 돌아올 겁니다."
진우는 열린 문을 턱짓했다.
"신발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으셨으니 바닥은 그 도복으로 닦으면서 기어 나가세요."
"너… 볼텍스 기어 법무팀에 연락할 거야!"
강태석이 악을 썼지만 일어설 힘은 없었다. 진우가 반 걸음 다가가자 강태석은 기겁하며 마비되지 않은 왼팔로 게처럼 기어 도망쳤다.
"진만아, 일어나!"
"형, 나 진짜 다리에 감각이 없어요!"
거구가 엉엉 울며 바닥을 기어 나갔고 구정물을 뒤집어쓴 장철호는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듯 도망쳤다. 소음이 빠져나가자 체육관에는 다시 노을만이 드리웠다.
도현이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이것 봐! 손가락 닿자마자 팔이 꺾이고 다리 한 번 건드렸다고 다이빙을 하잖아!"
"시끄러우니까 지워요. 괜히 시끄러워지면 실사만 복잡해집니다."
"지우긴 뭘 지워! 얼굴이랑 도장 이름은 모자이크할 테니까 걱정 마. 요즘 무림 커뮤니티에 실전 무도 분석 올리는 게 취미란 말이야. 기술 연구용이야!"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서태만이 들어서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에는 루키전 참가비 오십만 원이 든 누런 서류 봉투가 쥐여 있었다.
"진우야, 청소 다 했니?"
서태만은 바닥의 물기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닥에 물을 좀 쏟았나 보네. 매트가 미끄러우니 조심해라."
진우는 묵묵히 걸레를 들었다.
"네, 아버지. 청소 얼른 끝낼게요."
서태만은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봉투를 건넸다.
"진우야, 등록비는 어떻게든 마련했다. 다치지 않는 게 제일이다, 알았지?"
아버지의 거칠고 따뜻한 손이 어깨에 닿았다. 진우는 봉투를 쥐며 다짐했다. 협찬과 랭킹으로 포장된 자들이 다시는 이 체육관을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그날 밤 11시.
유도현의 방은 모니터 불빛으로 가득했다. 도현은 약속대로 진우의 얼굴과 체육관 배경을 꼼꼼하게 블러 처리했다.
오직 드러난 것은 강태석 도복의 볼텍스 기어 패치와 모자이크된 소년의 간결한 손끝 그리고 스텝뿐이었다.
도현은 무림 커뮤니티 '무림온'의 [실전 무도 기술 분석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제목: 동네 체육관에서 KMO 루키전 시드권자가 털리는 영상 (15초 요약)]
[내용: KMO 루키전 시드 배정받고 볼텍스 기어 협찬받는 에이스가 동네 체육관 갔다가 이름 모를 학생한테 손가락 하나로 제압당함. 주작 아님. 관절 신경을 정확히 찍어 누름. 이거 정통 점혈술 같은데 아는 사람?]
게시 버튼을 누른 지 30분도 되지 않아 조회수가 폭발했다.
[조회수: 14,200] [댓글: 512] [실시간 베스트 등록]
- 저거 볼텍스 기어 강태석 맞는데? 강태석이 왜 저기서 굴러다님?
- 손가락으로 팔꿈치 찌르는 거 봐라. 관절이 그냥 풀리네.
- 저 발놀림 뭐냐? 프레임에서 순간적으로 지워지는데?
- 현대 스포츠 무도에 저런 보법이 있다고? 사설 무가 비전 아니냐?
같은 시각.
서울 강남구 남궁그룹 사옥 48층 전용 수련실.
땀에 젖은 백색 도복 차림의 남궁혜린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가문 비전의 창이 들려 있었다.
혜린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무림온 실시간 검색어 1위 알림이 깜빡였다.
[실시간 1위: KMO 시드권자 15초 굴욕 영상]
무심코 영상을 재생한 혜린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모자이크된 소년이 거구를 흘려보내며 매트 바닥을 회전하는 발놀림.
"……!"
혜린은 화면을 멈추고 소년의 발목 각도와 무게중심 이동을 확대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문 비밀 서고에서 읽었던 고대 무림 실전 기록. 남궁세가의 선조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전설의 검가, 태극검가의 보법 도와 완벽히 일치하고 있었다.
혜린의 눈동자에 짙은 전율이 번져 나갔다.
"이 보법은… 대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