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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질려서 101회차를 시작했다1화

신이 질려서 101회차를 시작했다

신이 질려서 101회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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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엔딩 스크롤 뒤의 진실

쿠구구구궁!

하늘을 가로지르던 기괴한 거인의 형상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천지를 뒤흔들던 칠흑의 마력이 산산조각 나며 핏빛 이슬로 화해 스러졌다. 백 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 동안 이 지구를 지옥으로 물들였던 최종 보스, '종말의 군주'가 거둔 마지막 숨결이었다.

"하아…… 하아……."

강준혁은 핏물이 자작하게 고인 검은 대지 위에 검을 꽂은 채 가쁜 숨을 토해냈다.

전신을 갈갈이 찢어놓은 듯한 통증이 뼈마디를 파고들었다. 갑옷은 이미 누더기가 되어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었고 오른쪽 어깨는 깊게 패여 검붉은 피가 그치지 않고 흘렀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마침내 경련 어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100번이었다.

처음 게이트가 열리고 세상이 무너졌던 그날부터 시작해, 죽고 다시 돌아오기를 무려 백 번.

동료들이 찢겨 죽어가는 환각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피 눈물을 삼키며 무자비하게 스스로를 채찍질했고 마침내 100번째 회귀에서 이 세상의 모든 멸망 요소를 완벽하게 뿌리 뽑았다.

"끝났다……."

준혁은 둔탁하게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마침내 인류는 살아남았다. 이제 피 비린내 나는 전장이 아닌 평화로운 아침 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백 번의 고통과 절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화아악!

준혁의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팝업창이 떠올랐다.

세상을 구한 영웅에게 주어지는 축하 메시지라 생각했다. 하지만 팝업창에 찍혀 나온 글자들은 그가 알던 시스템의 언어가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클리어에 성공하셨습니다.]

[지구 07번 서버 '프로젝트 아포칼립스' 메인 시나리오가 성공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시청자 평가 수집 중…….]

[관조자 '체인저99': "아, 엔딩 클리셰 보소. 100회차 동안 구르더니 결국 전형적인 용사 엔딩이네. 진부하다 진부해."]

[관조자 '별빛사냥꾼': "그래도 마지막 보스전 피지컬은 볼 만했음. 별점 3점 드림."]

[관조자 '아카샤정주행': "다음 시즌은 좀 매운맛으로 가죠? 영웅이 배신당해서 타락하는 코스로 가면 도네 쏜다."]

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게 무슨?"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나갔다.

관조자? 시청자 평가? 지구 07번 서버?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눈앞에서 가볍게 일렁였다. 100번의 회귀 동안 그를 가이드하고 퀘스트를 내리던 시스템의 문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모니터 화면 건너편에서 방송을 감상하고 남긴 인터넷 댓글 같았다.

이어 허공에서 차갑고 무미건조한 기계음과 함께 총괄 시스템 메시지가 뇌리를 때렸다.

[07번 지구의 시청률 및 도네이션 수익이 목표치에 달성했습니다.]

[운영자 권한으로 세이브 데이터를 초기화합니다.]

[101회차 루프 세션 준비 중…….]

[모든 맵과 NPC, 각성자 데이터가 10년 전 초기 상태로 롤백됩니다.]

파아아앗!

그 순간 준혁의 발밑에서부터 세상이 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처참하게 무너진 보스의 시체도, 핏빛으로 물들었던 검은 대지도, 저 멀리 솟아 있던 산맥도 모두 잘게 부서진 0과 1의 소스코드로 모자이크처럼 해체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잠깐…… 잠깐 기다려!"

준혁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가 잡은 것은 바람조차 아니었다. 픽셀 단위로 깨져 나가는 공기뿐이었다.

"초기화라니? 롤백이라니! 내가…… 우리가 어떻게 싸웠는데! 세아도 삼촌도, 죽어간 수억 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피를 흘렸는데!"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허공의 팝업창은 그저 기계적으로 다음 문장을 출력할 뿐이었다.

[사용자 '강준혁'은 플레이어들의 높은 호응을 얻은 핵심 아바타입니다.]

[101회차 매운맛 시나리오의 주연으로 재배치됩니다.]

진실은 서늘하고도 잔혹했다.

이 세계는 진짜 지구가 아니었다. 고차원 외계 문명의 대기업 '아카샤 코퍼레이션'이 제작한 가상 현실 게임이자 우주 관조자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관람용 통 속의 세계.

그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바쳤던 100번의 피와 눈물, 스러져간 동료들의 처절한 비명과 절규는 그저 화면 건너편 플레이어들이 팝콘을 씹으며 즐기던 한 편의 자극적인 스트리밍 콘텐츠에 불과했던 것이다.

"크아아아악!"

준혁의 목에서 짐승 같은 울분이 터져 나왔다.

핏발 선 눈에서 붉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상을 구했다는 안도감은 가슴을 찢는 배신감과 황량한 절망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인간이었다. 진짜 숨을 쉬고 진짜 피를 흘리며 서로를 사랑하고 미워하던 진짜 삶이었다.

그것을 한낱 지루함을 달래는 놀갯감으로 취급했다고? 버튼 하나로 백 번의 역사와 희생을 짓밟고 리셋 버튼을 눌렀다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뼈를 깎는 오한 속에서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스스스스…….

준혁의 육체 역시 하얀 빛의 입자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세계 전체가 셧다운되고 10년 전으로 롤백되는 절차였다.

그때, 사라져 가던 허공의 시스템 창 가장 구석에서 조그마한 황금색 알림 하나가 깜빡였다.

[100회차 클리어 특전 보상이 도착했습니다.]

[클리어 특전: 개발자용 디버그 권한 (Level 1) 부여]

[해당 특전은 서버 초기화 영향을 받지 않는 영혼 인프린팅 데이터입니다. 수령하시겠습니까? (Y/N)]

준혁의 눈빛이 일순 얼어붙었다.

개발자용 디버그 권한.

시스템을 운용하는 자들이 가상 세계를 테스트하고 수정하기 위해 만들어둔 비상용 백도어 패널이었다.

[Y]

준혁은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내찔렀다.

쿠르르릉!

순간 찬란한 빛의 줄기가 준혁의 영혼 속으로 내리꽂혔다. 무수한 0과 1의 소스코드, 시스템의 뼈대를 이루는 숨겨진 명령어들과 히든 데이터 구조가 그의 뇌리 속에 각인되었다.

소멸해 가던 세계의 파편 속에서 준혁은 차갑게 읊조렸다.

"신…… 플레이어…… 운영자……."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아무런 슬픔도, 절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 번의 회귀 동안 마모되었던 영혼이 오직 하나의 칼날처럼 차갑고 뾰족하게 제련되었다.

"더 이상 너희들이 짠 대본대로 춤추는 영웅은 없다."

시야가 온통 눈부신 흰빛으로 물들었다.


"손님, 손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둔탁하게 귓전을 때리는 목소리에 준혁은 눈을 떴다.

곰팡이 냄새가 퀴퀴하게 풍기는 좁은 단칸방. 장판은 얼룩져 있었고 찌그러진 양은냄비에는 먹다 남은 라면 스프 자국이 눌러붙어 있었다.

서울 강남의 낡은 고시원.

게이트 대재앙이 발발하고 세계가 아포칼립스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직전, 20대 초반의 그가 살던 바로 그 방이었다.

준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이 잡혀 있지만 아직 굳건한 마력의 결을 가지지 못한 10년 전의 육체.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

101회차가 시작된 것이었다.

"후……."

준혁이 나지막이 숨을 내쉬자, 허공에서 샤라랑 하는 경쾌한 이펙트음과 함께 투명한 푸른빛의 홀로그램 소녀가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강준혁 님! 저는 당신의 위대한 여정을 안내할 마법 도우미 AI '엘리스'예요!"

앙증맞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 형상의 AI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서 턴을 돌았다. 이전 100번의 회귀에서도 수없이 보아온, 가식적이고 프로그래밍된 모습 그대로였다.

엘리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준혁의 눈앞에 커다란 시스템 팝업창이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지구를 구하는 영웅의 첫걸음!]

[내용: 잠시 후 강남역 인근에 D급 게이트가 개방됩니다. 최초의 각성자로서 마수를 처치하고 인류의 희망이 되세요!]

[보상: F급 영웅의 검, 각성 지원금 100,000G, 시청자 호감도 상승]

[실패 시: 인류 멸망 지수 증가]

엘리스가 눈을 반짝이며 양손을 모았다.

"자, 준혁 님!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해 지금 당장 검을 들고 밖으로 나아가세요! 화면 건너편의 많은 분들이 당신의 용감한 모습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지구를 구하라.

인류의 희망이 되어라.

시청자들의 호감도를 올려라.

모두 플레이어들의 도파민을 자극하기 위해 짠 철저한 연극 대본이었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정의로운 영웅 행세를 하며 개처럼 굴라는 명령.

준혁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영웅?"

"네? 준혁 님, 무슨 말씀이신가요?"

엘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혁은 대답 대신 허공을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디버그 패널, 오픈."

파아아앗!

그의 가슴속에서 솟구쳐 나온 핏빛의 소스코드가 엘리스의 푸른 시스템 창을 덮쳐 눌렀다.

이어 엘리스가 띄워놓은 메인 퀘스트 창 위에 투명한 검은색 윈도우 하나가 새롭게 겹쳐졌다. 오직 개발자에게만 허용된 시스템 관리자 콘솔이었다.

[Debug Console Level 1 Connected.]

[Target: Main_Quest_001.lua]

[Warning: 이 작업은 시스템 정상 시나리오를 훼손할 수 있습니다.]

엘리스의 눈동자가 기계적인 노이즈를 일으키며 붉게 번쩍였다.

"치, 칙……? 오, 오류? 준혁 님, 지금 무엇을…… 꺄악! 시스템 데이터에 미인가 접근이 감지되었습니다!"

준혁은 엘리스의 비명을 무시한 채, 허공의 디버그 창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100번의 삶 동안 벼려온 마력 제어력과 영혼에 각인된 디버그 코드가 핑거 팁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Command: Main_Quest.Delete()]

[Command: Viewer_Expectation.Set(0)]

투콰아아앙!

공중을 메우고 있던 거대한 메인 퀘스트 창이 마치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산산조각 났다.

그와 함께 허공에서 은밀하게 반짝이던 '관조자의 눈' 카메라 렌즈들이 픽픽 소리를 내며 과부하를 일으켰다.

[경고! 메인 퀘스트 데이터가 강제로 파손되었습니다!]

[경고! 시청자 유도 시나리오가 이탈되었습니다!]

[관조자 '체인저99': "?? 뭐야? 퀘스트 창이 왜 파괴됨? 방송 오류임?"]

[관조자 '아카샤정주행': "버그인가? 연출임? 주인공 상태가 이상한데?"]

[관리자 '오메가'의 시선이 집중됩니다.]

당황과 혼란으로 얼룩진 관조자들의 채팅 메시지가 허공을 메웠다.

AI 엘리스는 홀로그램 몸체를 바르르 떨며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인공지능 로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돌발 상황이었다.

"준, 준혁 님……! 메인 퀘스트를 파괴하시면 어떻게 해요! 영웅이 되지 않으면 지구가 멸망하고…… 보상도 받지 못하는데!"

준혁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허름한 외투를 걸치며 차갑게 낮게 읊조렸다.

"지구를 구하는 건 100번으로 족해."

그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은 엘리스도, 깨진 퀘스트 창도 아니율다. 그 너머, 차원의 장벽 건너편에서 숨을 죽인 채 자신을 감상하고 있을 외계 관조자들과 운영자 오메가의 시선이었다.

"너희들이 원하는 영웅극은 끝났다."

준혁의 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의 판을 완벽하게 부숴주지."

101회차.

영웅의 은퇴와 함께, 시스템을 향한 가장 잔혹하고 통쾌한 반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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