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인공의 호위기사로 취직했습니다

4화: 정문 밖의 공작
검은 마차가 돌길 끝으로 사라진 뒤에도 로잘린은 철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마차 바퀴가 남긴 자국은 선명했다. 체스터 공작가의 전령은 답신을 받아 들고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마치 저택의 문 하나쯤은 곧 다시 열릴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베른 경.”
“말해라.”
“정문을 닫고 방문 기록을 새로 만드십시오. 오늘부터 영애님을 찾는 사람은 이름과 용무를 적고 무장한 수행원이 있으면 바깥에서 대기시킵니다.”
베른은 철문 너머를 살폈다.
“대공작가 사람도?”
“특히 대공작가 사람입니다. 신분은 확인 절차를 줄이는 이유가 아니라 강화하는 이유가 됩니다.”
마르센이 난처한 얼굴로 다가왔다.
“로잘린. 너무 급하게 바꾸면 하인들이 혼란스러워할 겁니다. 손님을 문밖에 세워 두는 일도 가문의 체면에는..."
“체면은 영애님의 의사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로잘린은 품에서 계약 증서 사본을 꺼냈다. 붉은 봉인이 찍힌 종이 위에 클라라의 서명이 있었다.
“누군가 영애님의 창을 열어 둘 장치를 넣었습니다. 시험장에는 단검을 든 사내가 침입했습니다. 오늘은 거절 답신도 무시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겹쳤는데도 평소처럼 문을 열면 그것이 더 큰 혼란입니다.”
마르센의 입술이 굳었다. 그도 체스터 공작가의 이름 앞에서 물러서면 책임을 혼자 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황동 쐐기를 담은 작은 천 주머니를 꺼냈다.
“대장장이에게 확인을 맡겼습니다. 이건 시중에서 파는 부품이 아니랍니다. 저택 수리용 황동 못을 잘라 만든 모양입니다.”
로잘린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저택 안의 물건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군요.”
클라라가 두 손을 모은 채 물었다.
“그럼 하인들 중 누군가가 저를...?”
“아직 모릅니다.”
로잘린은 바로 답했다.
“알 수 없는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빈틈은 닫습니다. 오늘 밤부터 영애님의 방 창문은 베른 경의 경비와 시녀 한 명이 함께 확인합니다. 정원 산책은 저와 동행한 시간에만 합니다.”
클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불편하게 느껴도 말씀드리면 되나요?”
“그렇습니다. 불편함은 사소한 투정이 아니라 경계에 필요한 정보입니다.”
그 말에 클라라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그럼 저도 하녀들에게 설명할게요. 누군가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제 방을 지키기 위한 규칙이라고요.”
마르센은 오래도록 클라라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영애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때 정문 망루에서 나팔 소리가 짧게 울렸다.
베른이 담장 쪽으로 뛰어갔다. 잠시 뒤 그의 목소리가 정문 안쪽에 울렸다.
“검은 마차 세 대다. 체스터 공작가 문장 확인!”
로잘린은 계약 증서를 마르센에게 돌려주고 검집을 손에 쥐었다.
“영애님은 현관 안쪽으로.”
클라라는 한 걸음 움직였다가 멈췄다.
“저도 제 뜻을 말하고 싶어요.”
“좋습니다. 다만 철문에서 다섯 걸음 뒤에 서십시오. 제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시고 상대가 손을 뻗으면 즉시 물러나십시오.”
“알겠어요.”
마차 행렬은 정문 앞에서 멈췄다. 한가운데 마차의 문이 열리자 짙은 남색 외투를 입은 남자가 내렸다. 결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금발과 장갑 낀 손. 웃고 있는데도 눈빛은 웃지 않았다.
에드윈 드 체스터였다.
로잘린은 원작 속 문장을 떠올렸다. 다정한 목소리로 문을 잠그고 상대가 울기 시작하면 그제야 사랑을 증명했다고 믿는 남자.
지금은 아직 문밖이었다.
“에린 자작가의 새 기사가 이분이군요.”
에드윈이 철문 앞에 멈췄다.
“저는 영애의 안부를 확인하러 왔습니다. 조금 전 전령이 예를 갖추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지요.”
“전령은 영애님의 거절 답신을 받았습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안부 확인은 답신으로 충분합니다.”
“글쎄요. 편지는 손이 떨려도 쓸 수 있으니까요. 영애가 직접 한 말인지 확인해야겠습니다.”
마르센이 조심스레 앞으로 나섰다.
“공작가의 호의에는 감사드립니다. 다만 영애님께서는 휴식이 필요하셔서..."
“집사님.”
에드윈은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제가 영애를 해칠 사람처럼 취급받는군요. 그저 짧은 접견을 청하는 일에 정문을 잠그다니. 에린 자작가가 체스터 공작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지 궁금해집니다.”
압박은 낮은 목소리로 시작됐다. 마르센의 안색이 흔들렸다. 공작가의 불쾌함은 병든 자작 대신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로잘린은 철문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섰다.
“관계의 방향은 영애님께서 정하십니다. 오늘은 접견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성도 밝히지 못하는 기사라 들었습니다.”
에드윈의 시선이 로잘린의 목덜미와 낡은 코트 위를 천천히 훑었다.
“그런 자의 말이 영애의 말보다 앞서는 겁니까?”
“제 말은 앞서지 않습니다. 영애님의 말을 반복할 뿐입니다.”
로잘린은 현관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클라라가 정해 준 거리 안에 서 있다는 기척은 느껴졌다.
“클라라 폰 에린 영애께서 오늘 접견과 이동을 거절하셨습니다. 전담 호위기사는 그 뜻에 반하는 출입과 접촉을 차단합니다.”
에드윈의 미소가 아주 옅게 굳었다.
“전담 호위기사라.”
그는 철문 틈으로 손을 넣으려 했다. 손가락이 안쪽 걸쇠와 가까워지는 순간 로잘린의 검집이 바닥을 쳤다.
쾅.
검은 돌바닥에 얕은 금이 갔다. 에드윈의 손끝 바로 앞이었다.
“손을 거두십시오.”
로잘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허가 없는 출입 시도는 경고 후 제지합니다.”
체스터 기사들이 일제히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베른의 경비들도 창을 세웠다. 철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기가 단단히 굳었다.
에드윈은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로잘린을 보았다.
“검술이 제법이군요. 아스타 쪽에서 배웠습니까?”
숨이 멎을 뻔했다.
로잘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오래전에 사라진 이름이니까.”
에드윈이 손을 뺐다. 장갑 낀 손등에 문양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은 검보다 얇고 깊게 파고들었다.
그가 아스타를 알고 있다. 단지 소문으로 아는지 멸문에 손을 댄 쪽인지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공작님.”
클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잘린은 옆으로 한 걸음 움직여 그녀가 보이되 철문과는 거리를 유지하게 했다. 클라라는 창백했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저는 오늘 공작님을 뵙지 않겠습니다.”
에드윈의 시선이 클라라에게 향했다. 잠깐 아주 다정한 표정이 얼굴을 스쳤다.
“클라라. 누가 그대를 겁주었습니까?”
“아니에요.”
클라라는 손가락을 꼭 맞잡았다.
“제가 결정했어요. 제 방에 누군가 들어올 길이 만들어져 있었어요. 저를 데려가기 위한 사람이 정원에 숨어 있기도 했어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공작님을 만나러 갈 수는 없어요.”
에드윈의 눈빛이 처음으로 차갑게 식었다.
“그대는 나를 오해하고 있군.”
“그럴 수도 있어요.”
클라라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오해가 풀릴 때까지 제 집 문을 열 의무는 없어요.”
마르센이 놀란 듯 그녀를 보았다. 로잘린은 검집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에드윈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가며 마차의 검은 휘장을 흔들었다.
“좋습니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오늘은 물러나지요. 하지만 창문 하나를 막는다고 모든 것이 안전해지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안에 있는 사람이 더 걱정될 수도 있겠군요.”
그 말이 남긴 기분 나쁜 여운 속에서 에드윈은 마차로 돌아갔다. 세 대의 마차가 천천히 돌길을 벗어났다.
로잘린은 끝까지 그 등을 지켜봤다.
“베른 경. 동쪽 처소와 마구간 뒤 통로를 확인하십시오. 낯선 사람은 한 명도 들이지 마세요.”
“이미 보냈다.”
잠시 뒤 경비 둘이 젊은 하녀를 데리고 왔다. 하녀는 울먹이며 앞치마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냈다.
“제가 쓴 게 아니에요. 마구간 뒤에서 주웠어요. 무서워서 버리려 했어요.”
종이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해 질 무렵 동쪽 창의 등불을 보라.
로잘린은 종이를 손대지 않고 마르센에게 봉투를 가져오게 했다.
“이름은?”
“리아예요. 영애님 방에 차를 올리는 일을 해요.”
“언제 주웠습니까?”
“아침에요. 정원사 보조가 마차 쪽에 다녀오는 걸 봤어요. 그 사람이 떨어뜨린 줄 알았는데... 제가 확실히 본 건 아니에요.”
클라라가 리아 쪽으로 다가가려 하자 로잘린이 손으로 멈췄다. 클라라는 곧 멈춰 섰다.
“리아를 가두나요?”
“증언자로 보호합니다.”
로잘린이 답했다.
“누군가 증언을 들었다면 입을 막으려 들 수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을 벌하지 않으면서 증거도 사라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리아는 눈물을 닦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라는 쪽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하인들에게 제가 직접 말할래요. 이 규칙은 누군가를 몰아내기 위한 게 아니에요. 제 집에서 제가 안전하게 지내기 위한 거라고요.”
“그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로잘린의 대답에 클라라가 그녀를 보았다. 불안한 녹송석 눈동자 안에 아주 작은 빛이 생겼다.
해가 지기 직전 정문 경비가 또 한 번 뛰어왔다. 이번에는 손에 은빛 봉투가 들려 있었다.
“우편함에서 찾았습니다. 황실 우편국 봉인입니다.”
봉투 앞면에는 클라라의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는 체스터 공작가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로잘린은 봉투를 열지 않은 채 클라라를 보았다.
“영애님. 이번에는 함께 읽고 대응책을 고르시겠습니까?”
클라라는 잠시 봉투를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이름으로 온 일이니까요.”
로잘린은 정문 밖으로 어둠이 내려오는 길을 바라봤다.
문은 막았다.
이제는 종이로 들어오려는 손을 꺾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