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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인 척하고 도망쳤습니다3화

시한부인 척하고 도망쳤습니다

시한부인 척하고 도망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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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낯선 손끝의 기억

저녁 여섯 시 반이 되자 1층 식당에는 바지락을 넣고 맑게 끓인 조개탕과 구운 단호박의 달착지근한 향이 번졌다.

세드릭 아스텔은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 만족스러운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이거 정말 남부 해변 여관의 식단이 맞습니까? 기름기 없이 속을 편안하게 달래 주는 음식이군요.”

테오가 물잔을 채우며 능숙하게 맞장구를 쳤다.

“저희 주방장 마리의 솜씨입니다. 장거리 마차를 탄 귀족분들은 위장이 굳어 있어 첫날에는 부드럽고 열을 내리는 음식이 가장 좋습니다.”

“훌륭하군요. 왕실 감사단이라는 이유로 첫날부터 기름진 고기를 내놓아 배앓이를 겪게 하던 곳들이 태반이었는데 말입니다.”

서기관들도 긴장을 풀고 낮은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즐겼다.

그러나 식당 안쪽 창가 자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레이먼드 카시안은 홀로 긴 탁자 끝에 앉아 있었다. 제복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운 그의 앞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조개탕과 해산물 죽이 온전한 모양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숟가락을 쥐지도 않은 채 어두워지는 창밖의 바다만 응시했다.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패여 있었다. 12호실의 서늘한 공기가 찌르는 듯한 두통을 가라앉혀 주었지만 오랜 시간 그를 갉아먹은 만성 불면과 피로는 가시지 않았다.

음식 냄새조차 메스껍게 느껴지는 상태였다.

리나는 주방 앞 카운터에 서서 식당 안의 마력 잔향을 살폈다. 세드릭의 주변에는 경쾌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구석의 레이먼드 주변은 팽팽하게 곤두선 메마른 파동으로 가득했다.

저대로 두면 밤새 헛구역질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리나는 쟁반 위에 갓 덖은 보리차 주전자와 찻잔을 올렸다. 손님을 피하는 기색을 보이면 그것이야말로 빌미가 된다. 도망칠 이유가 없는 사람은 평범한 여관 주인처럼 당당해야 했다.

리나는 차분히 걸음을 옮겨 레이먼드의 탁자 곁으로 다가갔다.

“공작 전하. 식사가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레이먼드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왔다. 푸른 눈동자 속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속이 메스꺼워서 넘어가지 않는군.”

메말라 바스락거리는 목소리였다.

“남부 바닷바람을 갑자기 쐬면 찬 기운이 위장을 굳게 만듭니다. 따뜻한 보리차로 속을 먼저 데우시는 편이 좋습니다.”

리나는 쟁반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랐다. 구수한 곡물 향이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차를 다 따른 리나는 찻잔을 들어 레이먼드의 앞에 놓으려 했다.

그 순간 리나의 손가락이 무의식중에 고유의 궤적을 그렸다.

오른손 검지로 손잡이를 감싸 쥐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오므려 잔 받침 밑바닥의 무게중심을 받쳤다. 찻물이 흔들리지 않도록 소매 끝자락을 왼손 끝으로 가볍게 누르는 정갈한 동작이었다.

남부 평민 여관에서는 누구도 쓰지 않는 손버릇이었다.

북부 발렌 백작가에서 엄격하게 배웠던 예법이자 차가운 카시안 공작저에서 남편에게 차를 건넬 때마다 손을 떨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익혔던 엘리나만의 독특한 습관이었다.

달칵.

찻잔이 탁자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레이먼드의 시선이 찻잔에서 리나의 손끝으로 단숨에 치솟았다.

그의 숨이 멎었다. 머릿속에서 벼락이 내리치는 듯했다.

북부의 혹독한 겨울날. 얼어붙은 집무실로 조용히 들어와 차를 내려놓던 아내. 언제나 남편의 차가운 눈치를 보며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던 엘리나는 늘 저런 방식으로 찻잔을 받쳤다.

약지로 받침의 중심을 받치고 긴장한 탓에 소매를 왼손으로 가만히 누르던 바로 그 버릇이었다.

레이먼드는 자신도 모르게 의자 팔걸이를 으스러져라 쥐었다.

“너…….”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목구멍을 찢고 흘러나왔다.

리나는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피가 식고 손끝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즉각 깨달았다. 열여덟 달 동안 단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오래된 버릇이 이 남자의 앞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리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는 레이먼드의 부릅뜬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공작 전하, 필요하신 다른 것이 있으십니까.”

마레아 특유의 부드럽고 말꼬리를 살짝 올리는 억양이었다.

레이먼드는 말을 잇지 못하고 리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눈앞의 여관 주인은 조금의 당황도 없이 단정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려 건강한 혈색이 도는 뺨과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쳐다보는 맑은 회녹색 눈동자.

자신이 기억하는 엘리나는 이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떨구었고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창백한 아내였다.

게다가 눈앞의 손은 매끄럽고 희던 귀족 부인의 손이 아니었다. 행주를 빨고 쟁반을 나르느라 손가락 마디가 단단해지고 굳은살이 박인 노동하는 손이었다.

레이먼드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니다. 잠깐 헛것을 보았다. 물러가도 좋다.”

“차를 식기 전에 드십시오. 속이 한결 편안해지실 겁니다.”

리나는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목례한 뒤 주방으로 돌아섰다.

뒤돌아서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앞치마 속에 감춘 주먹이 떨렸지만 발걸음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식당 한구석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벨라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밤 열한 시가 지나자 파도의 집은 깊은 적막에 휩싸였다.

감사단 일행은 일찍 방으로 올라갔고 식당의 불도 모두 꺼졌다.

3층 12호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덧문 틈새로 서늘한 밤바다 바람이 밀려들었다. 침구에서는 말린 박하와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번져 공기를 가볍게 감싸고 있었다.

레이먼드는 침대에 눕지 못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촛불 하나만을 켜 둔 채 서류철을 노려보았다. 북부에서 가져온 공작저의 내부 감사 장부와 18개월 전 엘리나의 사망 진단서 사본이었다.

진단서에는 지병 악화로 인한 심정지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장례 직후 발견했던 익명의 편지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공작부인의 병은 가문 내부의 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정적들의 이간질이라 치부했다. 그러나 그녀가 흙 속에 묻힌 뒤 로젤라 베르딘이 살림 장부를 조작해 막대한 자금을 빼돌린 정황이 드러났다.

엘리나는 정말 병으로 죽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내몰린 것인가.

레이먼드는 핏발 선 눈을 감았다.

관자놀이를 쪼개던 통증은 신기하게도 사라져 있었다. 이 방에 들어선 뒤 머리를 짓누르던 열감이 식고 숨쉬기가 편안해졌다.

하지만 통증이 가라앉자 뇌리가 비정상적으로 맑아졌다. 그리고 그 맑아진 정신 속으로 저녁 식사 때 보았던 여관 주인의 손끝이 파고들었다.

검지로 손잡이를 쥐고 약지로 받침을 받치던 손. 소매를 조심스럽게 누르던 단정한 침묵.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레이먼드는 스스로를 짓씹듯 중얼거렸다.

엘리나는 죽었다. 자신이 직접 그 관 위에 흙을 덮었다. 그런데 왜 남부 끝자락의 낯선 여관 주인에게서 죽은 아내의 그림자를 찾는단 말인가.

‘내가 미쳐 가는 건가.’

죄책감이 만든 환영이었다.

아내가 메마른 숨을 헐떡일 때 단 한 번도 방을 찾아가지 않았던 남편. 이제 와서 남의 여인을 보며 아내를 떠올리는 자신의 꼴이 한없이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창가로 다가가 검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가라앉지 않는 혼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1층 주방 안쪽의 작은 약초실.

벨라는 찻잔을 씻고 있는 리나의 곁으로 다가와 문을 닫았다.

“그 남자가 너를 쳐다보는 눈빛 봤어. 차를 내릴 때 네가 무의식중에 북부식으로 잔을 받쳤잖아.”

벨라는 단안경을 벗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레이먼드 카시안은 북부 전선을 지휘하는 군인이야. 사소한 불일치 하나로 매복을 간파하는 인간이라고. 손버릇 하나로도 머릿속엔 의심의 싹이 텄을 거야.”

리나는 깨끗하게 닦인 유리잔을 선반에 얹었다.

“의심이 아니라 착각이라고 여길 거예요.”

리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회녹색 눈동자는 차분하고 단단했다.

“카시안 공작이 기억하는 엘리나는 늘 침대에 누워 기침을 하던 여자였어요. 남편이 들어오면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에 떨구던 허수아비였죠.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제 진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리나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가 아는 엘리나는 스스로 방을 꾸미지도 못하고 낯선 손님에게 규칙을 지키라고 요구하지도 못해요. 음식을 나르고 장부를 계산하며 사람들의 피로를 살피는 리나 벨은 그 사람이 아는 세계에 없어요.”

“하지만 만약 그자가 작정하고 캐묻기 시작하면—”

“그럼 파도의 집의 규칙대로 내보낼 겁니다.”

리나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곳은 북부의 공작령이 아니에요. 남부 연합의 상법과 왕실 규약에 따라 운영되는 제 여관이에요. 아무리 카시안 공작이라도 정당한 사유 없이 평민의 집을 뒤지거나 주인을 겁박할 수는 없어요.”

리나는 약초 상자를 닫으며 벨라의 손을 감싸 쥐었다.

“벨라, 저를 도망치게 해 줬던 날 약속했잖아요. 다시는 남의 처분만 기다리지 않겠다고요. 저는 도망치지 않아요. 제 이름과 이 집을 지킬 거예요.”

벨라는 리나의 단호한 손을 내려다보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단단하게 버티고 서 있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벨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약초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리나는 램프의 불을 낮추고 긴 숨을 골랐다. 벨라 앞에서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가슴속 불안까지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찻잔을 놓던 순간 마주쳤던 레이먼드의 그 메마르고 집요한 눈빛. 그것은 단순히 의심하는 자의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끝없이 헤매는 자의 처절한 눈빛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리나는 램프를 들고 여관 복도를 순찰하기 시작했다.

1층 로비의 빗장을 확인하고 2층의 객실 복도를 지났다. 손님들이 묵고 있는 방 너머에서는 고르고 평온한 숨소리의 잔향이 흘러나왔다.

리나는 나무 계단을 밟고 3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끝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12호실. 그 방 앞에 다가섰을 때 리나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손끝에 와닿는 공기가 달랐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마력 잔향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다른 방의 손님들이 부드러운 수면 속에 빠져 있는 것과 달리 12호실 안에서는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상념과 짓눌린 고통의 파동이 쉴 새 없이 요동쳤다.

스걱, 스걱.

방 안쪽에서 묵직한 가죽 장화가 바닥을 딛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먼드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 어두운 방 안에서 스스로를 옥죄며 서성이고 있었다.

두통이 사라졌음에도 그는 잠들지 못했다. 자신이 무심코 던진 손끝의 잔상이 그를 끝없는 불면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었다.

리나는 문고리를 바라보았다. 차디찬 황동 문고리에 손을 얹으면 그가 남긴 고통의 결이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어올 것만 같았다.

문을 두드려 줄 이유는 없었다. 그는 자신을 방치했던 남자였고 영혼을 갉아먹히던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던 남편이었다. 그가 겪는 고통은 그가 짊어져야 할 몫이었다.

하지만.

‘파도의 집은 쉬러 온 손님을 방치하지 않는다.’

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공작을 용서해서가 아니었다.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이곳은 그녀의 여관이었고 12호실의 손님은 지금 심각한 불면으로 망가져 가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 다시 한번 무거운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리나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조용히 뒤돌아섰다. 그리고 아래층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님의 엉킨 잔향을 풀어 주는 것. 그것이 여관 주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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