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학교의 사기꾼 교수

1화: 마법은 믿음이 아닙니다
망막을 찌르는 백색 섬광이 걷히자마자 폐부로 밀려든 것은 묵직한 백합 향과 차가운 석조 건물의 공기였다.
윤도현은 눈을 깜빡였다.
불과 3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서울 대치동의 불 꺼진 입시 상담실에 앉아 있었다. 황학동 골동품 거리에서 주워 온 정체불명의 낡은 가죽 노트를 펼쳐 들고 기괴한 수식을 들여다보던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익숙한 학원 복도가 아니었다.
수천 개의 은촛대가 공중에 둥둥 뜬 채 타오르는 거대한 돔형 대강당.
단차를 이루며 층층이 솟은 수백 석의 관람석.
그리고 그 자리를 가득 채운 화려한 실크 로브와 금빛 견장을 두른 수많은 사람이었다.
"……?"
도현은 숨을 멈췄다.
십 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제일 까다로운 수험생과 극성 학부모들을 상대해 온 입시 컨설턴트의 뇌세포가 일제히 경보를 울렸다.
꿈인가? 몰래카메라? 아니면 신종 가상현실 체험관인가?
하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감청색 벨벳 예복의 무게감과 귓가를 때리는 웅장한 오르간 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생생했다.
그때 단상 중앙에 선 백발의 노인이 지팡이를 가볍게 바닥에 쿵 찍었다.
노인의 새하얀 수염 아래로 인자하면서도 먹이를 노리는 맹수 같은 눈빛이 번뜩였다.
"이로써 새 학기를 이끌어 갈 교수진의 임명을 마쳤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학기부터 본교의 심장 대마법 이론학부를 새롭게 맡아 주실 분을 소개하지요."
노인의 목소리는 마이크도 없이 거대한 강당 구석구석까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대륙에 전례 없는 혁신적 이론을 제시한 천재 석학. 루카스 베른 교수입니다!"
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노인의 시선이 정확히 도현을 향했다. 좌우에 늘어선 화려한 차림의 남녀들도 일제히 도현을 돌아보며 박수를 보냈다.
도현은 반사적으로 표정 근육을 굳혔다.
'루카스 베른?'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무대 위에서 저 노인의 시선을 받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도현은 10년간 입시판에서 다진 프로 강사의 직업적 본능을 발휘했다. 당황한 기색을 1밀리미터도 내비치지 않고 턱을 15도 치켜들었다.
어떤 난감한 학부모 상담에서도 먼저 동요하는 쪽이 패배한다.
정보가 부족할 때는 완벽한 포커페이스가 최선의 방패였다.
도현은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시선이 학생석을 훑었다.
앞줄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금발의 귀족 소년 엘리안 아스트.
맨 뒷줄 구석에서 잉크 번진 소맷자락을 쥔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갈색 머리의 장학생 미라 로엔.
강당 안에는 기이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모두가 이 괴짜라 불리는 신임 교수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때 도현의 옆자리에 서 있던 붉은 로브의 여인이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전통 마법학파의 대표이자 학내 보수파의 거두인 베르나 크라우 교수였다.
"루카스 교수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학회에서는 여전히 교수님의 이론이 허황된 망상에 불과하다고 수군대는 자들이 많지요."
베르나 교수의 입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새 학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 아르케니움의 후원자들과 학생들에게 교수님의 위대한 이론이 실체가 있음을 가볍게 증명해 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가령 그 유명한 고위 압축 영창의 한 구절이라도 시연해 주신다면 모두가 납득할 텐데요."
강당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명백한 공개 도발이었다.
도현의 등줄기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시연?'
'내가?'
도현은 자신의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주변 마법사들에게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미세한 빛과 열기. 그것이 이 세계에서 말하는 마력인 듯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냉정하게 계산해 봐도 자신의 마력은 0이었다.
주문은커녕 라이터 불꽃 하나도 피워낼 수 없는 완벽한 현대인이었다.
여기서 손가락을 튕기며 주문을 외우는 척하다가는 0.1초 만에 밑천이 드러나 사기꾼으로 체포될 판이었다.
'어설픈 마법 흉내는 자살행위다.'
상대가 자신의 패를 보여 달라고 요구할 때 패가 없는 자가 취해야 할 전략은 단 하나뿐이다.
판 자체를 뒤집는 것.
도현은 당황하지 않고 흑요석으로 깎아 만든 강연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검지 끝으로 단상을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단단한 돌이 울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도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베르나 교수를 응시했다.
"시연이라."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강당에 낮게 깔렸다.
도현은 대치동 1타 강사 특유의 단호하고 권위 있는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지금 저잣거리의 광대입니까?"
베르나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마법을 그저 불꽃놀이처럼 눈앞에서 펑 터뜨려 보여주면 증명되는 재주로 여기는 그 얄팍한 인식. 그것이야말로 이 학교가 수백 년 동안 정체되어 온 가장 큰 이유입니다."
도현은 강당 전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그에게 빨려 들어왔다.
"당신들은 늘 마법을 신비라 부르고 영감이라 포장하지요. 기도하고 타고난 혈통을 믿으며 주문이 실패하면 그저 시전자의 신념이나 재능이 부족하다고 치부합니다."
도현은 연단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한 걸음 더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저열한 미신일 뿐이지."
청중석에서 헉하는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수적인 마법사들에게는 거의 신성모독에 가까운 독설이었다.
하지만 도현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과학 강사 시절 수없이 강조했던 절대적인 명제를 마법의 언어로 포장해 내던졌다.
"마법은 믿음이 아닙니다."
강당 안의 모든 숨소리가 멎었다.
"마법은 재현성(再現性)입니다."
재현성.
마법의 세계에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단어였다.
도현은 쐐기를 박듯 또박또박 덧붙였다.
"조건이 동일하다면 누구에게나 동일한 결과가 도출되어야 비로소 법칙이라 부를 수 있는 법. 내가 보여줄 것은 값싼 마술 시연 따위가 아니라 당신들의 실패를 오차로 쪼개어 분석하는 엄밀한 공식입니다."
말을 마친 도현은 더 이상 베르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1초.
2초.
정적이 흐른 뒤 중앙의 오르만 학장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하하하! 재현성이라! 과연 루카스 교수다운 파격적인 선언이군요!"
학장의 박수를 신호탄으로 강당 전체가 들끓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눈에는 경외와 충격이 서렸고 귀족 후원자들은 수군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안은 흥미진진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고 미라 로엔은 마치 구원의 빛을 본 사람처럼 넋을 잃고 도현을 바라보았다.
베르나 교수만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살았다…….'
도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도현은 잔뜩 긴장한 조교의 안내를 받아 본관 4층에 위치한 대마법 이론학부 교수 연구실로 향했다.
"교, 교수님, 필요하신 연구 자료는 모두 정리해 두었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조교가 도망치듯 허리를 숙이고 사라지자 도현은 묵직한 오크 문을 닫고 은색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철컥.
문이 잠기는 순간 도현은 다리에 힘이 풀려 문에 등을 기댄 채 스르륵 주저앉았다.
등 뒤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 제기랄. 죽는 줄 알았네."
도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구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벽면을 가득 채운 고서들과 정체불명의 마법 시약병들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마탑과 낯선 별자리의 밤하늘.
현실이었다. 완벽한 다른 세계.
도현은 벽면에 걸린 전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속에는 낯익은 32세 한국인 청년 윤도현의 얼굴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피곤이 깃든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
그렇다면 전임자라는 루카스 베른은 자신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라는 뜻이었다.
"왜 내가 여기로 불려 온 거지?"
도현은 서둘러 마호가니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든 이 미친 상황을 타개할 단서든 뭐라도 찾아야 했다.
책상 깊숙한 비밀 서랍을 열자 익숙한 가죽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황학동에서 도현이 손에 쥐었던 바로 그 낡은 노트였다.
그 노트 사이에 뜯겨 나간 양피지 조각들이 어지러운 수식과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현대 양자물리학 공식과 기괴한 마법진이 융합된 도면이었다.
'루카스 베른…… 이 인간이 차원 전이 실험을 하다가 사고를 친 건가?'
그때 노트 옆에 놓인 붉은 밀랍 봉인의 공문서 하나가 도현의 눈에 밟혔다.
문서 상단에는 왕실 감찰단의 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소환 및 정기 측정 통지서]
[수신: 대마법 이론학부 루카스 베른 교수]
[사유: 연구실 장기 무단이탈 및 금지 마법 연구 의혹에 따른 전교 교수진 정례 마력감응검(魔力感應檢) 실시]
[일시: 3일 후 오전 10시 본관 대강당]
[발신: 왕실 수석 감찰관 세리아 발렌]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력감응검?'
도현은 책상 한쪽에 놓인 두꺼운 학교 법전과 규정집을 미친 듯이 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붉은 줄이 그어진 한 페이지를 찾아냈다.
[아르케니움 학칙 및 왕국 형법 제42조: 무마력자 금령(無魔力者 禁令)]
[마력이 전무한 자가 기만과 사술로 마법 연구 기관에 잠입하거나 고위 직책을 사칭할 경우 왕실과 마법 질서에 대한 대역죄로 간주하여 즉각 공개 처형에 처한다.]
공개 처형.
글자가 도현의 망막에 비수처럼 꽂혔다.
도현은 멍하니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력이라고는 먼지 한 톨만큼도 없는 텅 빈 손바닥.
3일 뒤 마력 측정 장치에 손을 올리는 순간 그에게 내려질 것은 종신 교수의 영예가 아니라 단두대의 칼날이었다.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
아르케니움 전체는 강력한 마법 결계로 둘러싸여 있었고 왕실 감찰관의 눈이 이미 루카스 베른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도현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력 0짜리 강사한테 마법학교 교수 노릇을 하라고? 그것도 들키면 사형인 판에?"
하지만 절망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어차피 수능 한 달 전 8등급짜리 노베이스 수험생을 인서울 명문대에 찔러 넣는 기적을 수없이 만들어 낸 인생이었다.
도현은 이를 악물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흩어진 마법학 개론서와 루카스의 노트를 끌어당겼다.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고."
사기극의 막이 올랐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완벽한 가짜 교수가 되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