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에서 안 나갑니다만?

6화: 나만의 마력 온천 개장
아침 샤워는 상쾌했지만 욕실은 여전히 좁았다.
강현우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85인치 화면에서는 게임 대기 화면의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화염 슬라임 보일러 1호기는 성공적이었다. 배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47도의 온수는 완벽했다.
하지만 집돌이의 로망은 고작 서서 하는 10분짜리 샤워 따위로 채워지지 않았다.
"욕조가 없잖아."
현우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청소 골렘이 걸레질을 멈추고 현우를 올려다봤다.
"현재 욕실 규격은 가로 2미터 세로 2.5미터입니다. 일반 성인 1인용 이동식 아크릴 욕조를 배치할 경우 내부 여유 공간이 40퍼센트 감소합니다."
"아크릴 욕조 따위를 넣으려고 이 고생을 한 게 아니지."
현우는 후드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 푹 담그고 시원한 음료 마시면서 넷플릭스 볼 수 있는 커다란 탕이 필요해. 바위 깎아서 만드는 그런 거."
"천연 석재 온천탕을 의미합니까?"
"그래. 이왕 던전 살이 하는 김에 럭셔리하게 가야지."
현우는 욕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타일 벽면을 손바닥으로 짚자 은은한 청백색 마력이 피어올랐다.
[스킬: 무한 공간 재편]
스르릉.
욕실의 가장 안쪽 벽면이 종이처럼 접히며 뒤로 물러났다. 원래는 던전 15층의 단단한 기반 암반이어야 할 자리에 거대한 사각형의 빈 공간이 생겨났다.
폭 6미터에 길이 8미터. 천장 높이만 3미터에 달하는 널찍한 별실이었다.
바닥을 이루는 짙은 회색 암반은 던전 특유의 마력을 듬뿍 머금은 마력 화강암이었다. 열을 오래 보존하고 마력의 누수를 차단하는 최고급 단열재나 다름없었다.
"습기 관리가 핵심이야."
현우는 [마력 건축구조학]을 발동해 천장과 벽면에 보이지 않는 미세 기류 통로를 새겨 넣었다.
온천에서 피어오를 수증기가 주택 본채로 새어나가 가전제품이나 벽지를 상하게 하면 안 되었다. 천장 모서리를 따라 집진 마력진을 설치하고 발생한 증기는 던전 상부의 자연 환기 통로로 바로 빠져나가도록 배기 덕트를 설계했다.
"골렘. 가운데를 둥글게 파내자. 깊이는 1.2미터. 가장자리는 계단식으로 깎아서 걸터앉을 수 있게 해."
"설계 도면을 수신했습니다. 암반 절삭을 시작합니다."
청소 골렘의 팔 끝이 고속 진동 마력 칼날로 변형되었다.
지지직!
정밀한 절삭음과 함께 단단한 마력 화강암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깎여 나갔다. 깎여 나온 돌가루는 현우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공간 틈새로 빨아들여 치웠다.
순식간에 성인 너덧 명이 다리를 뻗고 누워도 남을 만큼 웅장하고 매끄러운 천연 암반탕의 윤곽이 드러났다.
"이제 물을 끌어와야지."
현우는 발전실 옆 열원실로 향했다.
열원실 안에서는 열두 개의 수정 격실 속 화염 슬라임들이 얌전히 불꽃을 깜빡이고 있었다. 현우가 다가오자 첫 번째 격실의 슬라임이 반갑다는 듯 몸을 붉게 부풀렸다.
"너희 오늘 특근이다. 밥 넉넉하게 줄게."
현우는 중급 화염 마석 세 개를 꺼내 격실 앞 투입구에 넣었다.
마석을 꿀꺽 삼킨 슬라임들이 기분 좋게 붉은 열기를 뿜어냈다. 보일러 1호기의 열교환관 표면이 주황색으로 달아올랐다.
"온수 배관 확장."
현우가 손을 뻗어 두꺼운 은빛 마력 도관을 온천탕 쪽으로 연결했다.
16층 수맥에서 끌어올린 차가운 암반수가 보일러 외벽을 휘감으며 순식간에 뜨거운 온수로 변환되었다. 콸콸콸 쏟아지는 물소리가 배관을 타고 울려 퍼졌다.
치이익!
온천탕 바닥의 토출구에서 첫 온수가 뿜어져 나온 순간이었다.
수정 패널에 붉은 경고등이 번쩍였다.
[경고: 온수 유입량 급증으로 인한 열교환 압력 과부하]
[수맥 냉수와 슬라임 열원의 급격한 충돌 발생]
[증기 폭압 상승 중]
"어라."
수맥의 유량이 너무 강했던 탓에 열교환관 내부에서 비등 현상이 일어났다. 은빛 배관이 덜컹거리며 금방이라도 터질 듯 진동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6층 심층부에서 올라오는 특유의 진동이 다시금 바닥을 울렸다.
쿵. 쿵. 쿵.
화염 슬라임들이 그 진동에 공명해 열기를 한꺼번에 분출하기 시작했다. 온수 온도가 60도를 넘어 70도까지 치솟았다.
"이러면 온천이 아니라 백숙 솥이 되잖아."
현우는 침착하게 공간을 비틀었다.
[공간 굴절: 3단 나선형 감압 수로]
배관 내부의 공간이 나선형으로 세 바퀴 늘어났다. 급격하게 팽창하던 수증기는 늘어난 공간 속에서 압력을 잃고 완만하게 감속했다.
동시에 차가운 16층 수맥수를 얇은 막 형태로 쪼개어 온수와 층층이 교차하도록 마력망을 짰다.
슬라임의 순수한 화염 열기와 깊은 지하 수맥의 풍부한 미네랄이 부드럽게 융합되었다. 끓어오르던 배관이 마침내 조용해졌다.
토출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빛으로 바뀌었다.
[온수 순환계 안정화 완료]
[수온: 41.5도 유지]
[특수 효과: 피로 회복 가속, 마력 순환 정화]
"41.5도. 딱 좋네."
현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에메랄드빛 온천수가 부드러운 김을 피워 올리며 매끄러운 바위탕을 채워 나갔다. 물이 가득 차오르는 데는 채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탕 가장자리에는 은은한 푸른빛을 내는 무해한 발광 이끼를 띠처럼 둘러 아늑한 조명을 연출했다. 천장의 배기구는 피어오르는 수증기만 쏙쏙 빨아들여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탕 내부는 적당히 훈훈하고 공기는 쾌적했다.
"골렘. 냉장고에서 얼음 채운 텀블러랑 콜라 좀 가져와."
"방수 태블릿 거치대도 준비할까요?"
"센스 있네. 그것도 가져와."
현우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에메랄드빛 온천수 속으로 발을 담갔다.
"으아……."
발끝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따뜻함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적당히 뜨거운 물이 근육의 긴장을 사르르 녹여 주었다. 탕 바닥의 부드러운 계단에 등을 기대고 앉자 던전 특유의 풍부한 마력이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온천수 안에 농축된 미네랄과 정제된 화염 마력이 지친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는 기분이었다. 과거 레이드를 뛰며 쌓였던 오래된 근육통과 마력 혈관의 찌뿌둥함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게 인생이지. 밖에서 왜 개고생을 해?"
청소 골렘이 탕 위로 띄울 수 있는 작은 나무 트레이를 가져왔다.
트레이 위에는 시원한 얼음 콜라와 방수 팩에 넣은 스마트 패드가 올려져 있었다.
현우는 얼음이 짤랑거리는 콜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짜릿한 탄산의 차가움과 몸을 감싼 온천수의 뜨거움이 완벽한 대비를 이루었다.
스마트 패드를 켜서 밀렸던 애니메이션을 재생했다. 은은한 이끼 조명 아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차가운 음료를 마시며 영상을 보는 집돌이 라이프.
지상 그 어떤 재벌의 펜트하우스도 부럽지 않은 극상의 행복이었다.
[알림: 마력 회복 속도가 일시적으로 200% 증가합니다.]
[알림: 신체 피로도가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현우는 흐뭇하게 눈을 감았다.
한 시간가량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긴 현우는 개운해진 몸으로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온몸에서 뽀송뽀송한 열기가 돌았다.
거실 통신 수정구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서연희 매니저의 메시지였다.
[강현우 헌터님. 지난번 TV 배송 건과 가죽 거래 정산 내역서 보내드립니다. 혹시 추가로 필요한 물품이 있으신가요?]
현우는 통신 패널을 터치했다.
[물품 주문 좀 할게요.]
[네 말씀하세요. 최신 음향 기기나 추가 게임 타이틀인가요?]
[아뇨. 고급 편백나무 목욕 의자랑 바가지 세트요. 그리고 라벤더 입욕제 5박스랑 뚱뚱한 바나나우유 세 박스 부탁합니다.]
한동안 답장이 없었다.
몇 분 뒤 당혹감이 묻어나는 서연희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네? 편백나무 바가지요? 입욕제는 또 왜요? 던전에서 목욕탕이라도 차리셨습니까?]
[네. 방금 온천 만들어서 들어갔다 왔는데 바가지가 없어서 좀 아쉽더라고요.]
[……던전 안에 온천을 만드셨다고요? S급 던전 15층에요?]
[물이 아주 좋아요. 대가는 보일러 돌리면서 나온 고순도 열성 마력 결정 2개 개찰구에 둘게요.]
[……알겠습니다. 최고급 편백나무로 바로 구해다 개찰구 택배함에 넣어두겠습니다. 마력 결정은 협회에서도 귀하게 쓸 수 있겠네요.]
서연희는 이제 현우의 기행에 면역이 된 듯 빠르게 거래를 수락했다.
현우는 통신을 종료하고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생수를 꺼내 마셨다.
"역시 던전이 최고야."
현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침실로 향했다.
같은 시각 서울 도심 한복판.
미궁의 정원 던전 입구 외곽 차단벽 너머에 검은색 고급 세단 여러 대가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거구의 사내가 내렸다. 대한민국 3대 길드 중 하나인 '명성 길드'의 길드장 황대호였다.
그의 뒤로 무장한 명성 길드 소속 정예 헌터들이 도열했다.
"길드장님. 탐지기 수치가 확실합니다."
부길드장이 태블릿을 내밀며 속삭였다.
"던전 상부 배기 환기구 쪽에서 비정상적인 초고순도 마력 증기가 지속적으로 유출되고 있습니다. 기존 S급 마수의 독기나 살기가 아닙니다. 극도로 정제된 최고급 마력 반응입니다."
황대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3년 동안 버려진 던전인 줄 알았더니 안에서 엄청난 천연 마력 자원이 솟구치고 있었군."
"헌터 관리국에서는 강현우 헌터가 안에 머물고 있다고 주장합니다만."
"강현우? 그 폐인은 진작에 던전 미궁 속에서 몬스터 밥이 됐거나 미쳐버렸겠지. S급이라도 3년을 홀로 버틸 수는 없어."
황대호가 차가운 눈빛으로 미궁의 정원 입구를 올려다보았다.
"이 던전은 서울 한복판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관리국 놈들이 독점하게 둘 순 없지. 내일 아침 사설 병력을 동원해 던전 진입로를 장악한다. 미궁의 정원 소유권은 우리 명성 길드가 가져간다."
던전 15층의 안락한 온천 위로 외부의 탐욕스러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