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던전 마수 요리 백과

1화: 이끼 숲의 냄새
스테인리스 조리대의 은빛 반사와 가스 화구의 푸른 불꽃이 시야에서 증발했다.
귀를 찌르던 배기 후드의 소음 대신 차갑고 눅눅한 침묵이 귓전을 눌렀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의 질감부터가 달랐다. 버터와 로즈메리가 타들어 가던 고소한 훈향 대신 축축한 흙과 비릿한 석회질 냄새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서도윤은 바닥을 짚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돌바닥 위로 형광을 띤 푸른 이끼가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손등에는 여전히 뜨거운 팬에 데어 생긴 오래된 화상 흉터가 남아 있었고 몸에는 하얀 조리복과 긴 앞치마가 둘러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도윤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주머니를 더듬었다.
스마트폰도 지갑도 없었다. 남은 것은 가슴 포켓에 꽂힌 금속제 조리용 핀셋 하나와 작은 백지 수첩 그리고 오른손에 쥐인 240밀리미터짜리 셰프 나이프뿐이었다. 칼집도 없이 손에 쥐인 날선 탄소강 칼날이 푸르스름한 이끼 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다.
미슐랭 쓰리스타 심사관이 레스토랑의 마지막 메인 디시를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주방 벽 한구석의 찬장 틈새에서 균열 같은 빛이 터져 나왔고 눈을 깜빡인 순간 발밑이 꺼져 내렸다.
그것이 도윤이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꿈이라기에는 피부에 닿는 지하의 냉기가 지나치게 생생했다. 천장은 까마득히 높았고 거대한 돌기둥들이 무너진 채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인공적인 고대 건축물의 흔적 위에 낯선 식생이 엉겨 붙은 기괴한 공간이었다.
스륵.
돌기둥 너머에서 희미한 마찰음이 들렸다.
도윤은 숨을 멈추고 몸을 낮췄다. 조리복 밑단을 접어 올리고 소리를 죽여 무너진 아치형 통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피 냄새였다.
도축 직후의 신선한 육향이 아니라 산화되어 굳어 가는 끈적한 쇠 냄새가 축축한 공기 사이로 번지고 있었다.
"큭…… 으……."
거친 신음과 함께 작은 그림자가 돌기둥 그늘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짧은 밤색 머리에 낡은 가죽 갑옷을 걸친 소녀였다. 체구는 작았지만 손에 작은 목제 활을 쥐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쪽 종아리는 검푸르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찢긴 바지 틈으로 흑자색 진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 중심에는 가시처럼 돋아난 검은 바늘 하나가 박혀 있었다.
"저기, 괜찮습니까?"
도윤이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다가섰다.
소녀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핏기 없는 얼굴 위로 짙은 녹색 눈동자가 공포와 경계로 흔들렸다.
"누, 누구야! 오지 마!"
소녀는 떨리는 손으로 화살을 메기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화살촉이 바닥을 긁으며 덜덜 떨렸다.
"진정해요. 해칠 생각 없습니다."
도윤은 칼끝을 바닥으로 내린 채 왼손을 들어 보였다. 흥분한 주방 보조를 달랠 때 쓰던 낮고 단단한 어조였다.
"칼을 들고 있으니까 위협적으로 보이겠지만 나도 방금 떨어진 사람입니다. 다리에 박힌 독침부터 뽑아야 해요. 붓기가 무릎 위까지 올라가고 있습니다."
소녀는 도윤의 하얀 조리복과 무기를 번갈아 보더니 긴장이 풀린 듯 활을 떨어뜨렸다.
"당신…… 탐사자 복장이 아니잖아. 대체 어디서…… 큭!"
소녀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도윤은 지체 없이 다가가 소녀의 다리를 살폈다.
상처 부위에서 피어오르는 냄새를 맡자 묘한 위화감이 도윤의 콧등을 스쳤다. 썩은 황과 알칼리성의 쓴내가 뒤섞인 악취였다.
도윤은 앞치마 끈을 풀었다. 깨끗한 천 부분을 칼로 잘라내 소녀의 허벅지 위쪽을 강하게 묶었다.
"혈액이 심장으로 올라가는 속도를 늦춰야 합니다. 물 있어요?"
"허리…… 가죽 물통…… 하지만 거의 비었어……."
소녀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웅얼거렸다.
"여긴 아르카디아 심연 1권역이야…… 이끼 숲이라고. 이런 데서 얼쩡거리면 안 돼. 독침토끼 녀석들이 피 냄새를 맡고……."
"독침토끼?"
도윤이 되물었다.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르카디아 심연이라는 명칭 역시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의문을 길게 품을 틈은 없었다.
바스락.
바람 한 점 없는 지하 숲의 양치식물 덤불이 일제히 흔들렸다.
축축한 흙을 박차는 날카로운 발톱 소리가 사방의 석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도윤은 본능적으로 셰프 나이프를 고쳐 쥐었다. 무너진 돌기둥 위로 붉은 안광 두 개가 번뜩였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반적인 토끼보다 세 배는 거대한 마수였다.
온몸은 뻣뻣한 회색 털로 덮여 있었고 등줄기를 따라 흑요석 같은 가시침 수십 개가 부채꼴로 곤두서 있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온 두 개의 거대한 앞니는 뼈라도 씹어 으깰 듯이 단단해 보였다.
"도망…… 쳐……."
바닥에 쓰러진 소녀가 신음했다.
"저 녀석은 무리 지어 다녀. 침 한 방만 스쳐도 몸이 마비된다고……!"
독침토끼가 뒷다리를 구르며 거친 콧김을 뿜었다.
그 순간이었다.
화악.
도윤의 코와 혀끝에 알 수 없는 감각이 전류처럼 내리꽂혔다.
단순한 냄새가 아니었다.
허공에 흩어지는 마수의 체취와 침샘에서 흐르는 타액의 냄새를 맡는 순간 도윤의 뇌리에 정체불명의 정보가 선명한 미각적 형태로 펼쳐졌다.
『미각 감정』
그것은 머릿속에 울리는 시스템의 목소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평생 수만 가지 식재료의 냄새와 맛을 분해해 온 요리사의 감각이 기이하게 확장되어 재료의 성질을 직관적으로 꿰뚫는 감각이었다.
―등줄기 침샘: 신경계 마비독. 열에 쉽게 분해되지 않는 알칼리성 독소. 접촉 즉시 세포 파괴.
―내장(간 및 독낭): 맹독 축적 부위. 부패취와 쓴맛이 강해 섭취 불가. 파열 시 고기 전체 오염 위험.
―뒷다리살 및 안심: 치밀한 근육 섬유. 지방 함량이 적고 철분과 단백질이 풍부함. 독낭을 건드리지 않고 분리 시 식용 가능. 잔여 잡내는 약한 산성과 열기로 제거 가능.
도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지, 이 감각은?'
환각이라 치부하기에는 머릿속에 맺히는 맛과 독성의 지도가 너무도 정밀했다.
토끼의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릿한 마비독의 냄새와 그 밑에 숨겨진 붉은 다리살의 담백한 육향이 마치 투시도를 보듯 뚜렷하게 나뉘어 느껴졌다.
크르르!
독침토끼가 몸을 웅크리더니 등뒤의 가시침 세 개를 허공으로 튕겨냈다.
쉭! 쉭!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날아든 검은 침이 도윤의 뺨 옆을 스쳤다. 뒤편의 석조 기둥에 박힌 돌가루가 튀며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검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도윤은 반사적으로 몸을 굴려 소녀를 등 뒤로 감쌌다.
"저 녀석의 침은 직선으로만 날아와요. 각도를 틀면 피할 수 있습니다."
"뭐……?"
소녀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도윤을 올려다보았다.
독침토끼는 침이 빗나가자 사납게 울부짖으며 앞니를 드러내고 돌진했다. 무거운 체중이 실린 돌진이었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뼈가 바스러질 충격이었다.
하지만 도윤의 시야에는 마수의 돌진 경로와 근육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읽히고 있었다.
주방에서 수백 킬로그램의 통고기를 다루며 뼈와 관절의 결을 분리하던 감각이 온몸에 되살아났다.
마수가 공중으로 도약한 순간 도윤은 물러서지 않고 반 발자국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키에엑!"
토끼의 앞발톱이 도윤의 어깨를 스치며 조리복을 찢었다.
하지만 도윤의 오른손에 쥐인 셰프 나이프는 이미 정확한 궤적을 그리며 뻗어 나가고 있었다.
서걱!
도윤은 마수의 등이나 몸통을 노리지 않았다. 두꺼운 가죽과 독침이 빽빽한 부위를 피해 뒷다리 관절 사이의 인대를 정확하게 베어 넘겼다.
균형을 잃은 독침토끼가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마수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 발버둥 쳤지만 뒷다리가 힘을 쓰지 못하고 꺾였다. 토끼가 발악하며 남은 독침을 사방으로 흩뿌리려 등을 부풀렸다.
"화살을 던져요! 시선을 끌어야 합니다!"
도윤이 소리쳤다. 소녀는 바닥에 떨어진 화살 하나를 온 힘을 다해 마수의 눈을 향해 집어던졌다.
화살촉이 토끼의 콧등을 때리며 주의를 끌었다.
그 찰나의 틈을 도윤은 놓치지 않았다.
도윤은 체중을 실어 토끼의 목덜미를 짓누르며 셰프 나이프의 날을 목 아래 급소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푸욱.
경동맥을 정확히 끊어내는 깔끔한 자상이었다.
마수의 거친 저항이 점차 잦아들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붉은 피가 형광 이끼 위로 쏟아져 내렸다.
"하아…… 하아……."
도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칼을 뽑았다.
칼날에는 푸른 이끼의 빛과 붉은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토끼의 뒷다리를 잡아 거꾸로 들어 올렸다. 피가 근육 속으로 스며들어 육질을 망치기 전에 방혈을 끝내야 한다는 요리사의 습관이었다.
"말도 안 돼……."
바닥에 쓰러진 소녀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
"칼 한 자루로 독침토끼를…… 그것도 가죽이나 침을 하나도 안 상하고 관절만 끊어서 잡았다고?"
도윤은 대답 대신 토끼의 배를 가볍게 눌렀다.
손끝으로 내장의 위치와 팽창된 독낭의 윤곽이 고스란히 만져졌다. 코를 찌르는 악취의 중심에 독낭이 있었다. 그것만 터뜨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분리해 낸다면 이 고기는 완벽한 식량이 될 수 있었다.
도윤은 주머니에서 작은 백지 수첩과 펜을 꺼냈다.
그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수첩의 첫 장에 단단한 필체로 적어 내려갔다.
[1. 독침토끼]
- 1권역 이끼 숲 서식.
- 등 침과 간 독낭에 치명적인 신경 마비독 보유.
- 뒷다리살과 안심: 독성 없음. 방혈 후 약한 가열 조리 시 단백질 공급 가능.
수첩을 덮은 도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소녀의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고 중독과 탈진으로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독이 퍼져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이름이 뭡니까?"
도윤이 다가가 물었다. 소녀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리아. 리아 벨…… 견습 탐사자야……."
"리아 씨, 조금만 버텨요."
도윤이 손에 쥔 나이프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전이의 혼란이나 두려움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녀석의 다리살은 먹을 수 있습니다. 독을 깨끗하게 걷어내고 구워낼 테니까 먹고 기운 차려요. 살아서 돌아가야 할 것 아닙니까."
어둠이 짙게 깔린 이끼 숲 한가운데서 주방을 잃어버린 셰프의 첫 번째 해체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