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하고 온실 카페나 차리렵니다

1화: 유리 아래 남은 잎
아델리아는 황실 식물 연구소의 정문 앞에서 열쇠를 세 번이나 쥐었다 폈다.
손안의 금속은 차가웠다. 아침에 이혼 서류에 이름을 적을 때에도 펜촉은 이보다 차갑지 않았다.
삼 년 동안 그녀의 이름 뒤에는 늘 공작부인이라는 호칭이 따라붙었다. 오늘부터 그 호칭은 육십 일짜리 공고문 속에만 남을 것이다. 재산 정산이 끝나면 완전히 사라진다.
아델리아는 숨을 들이마시고 열쇠를 돌렸다.
철문이 긴 신음과 함께 열렸다.
온실 지구의 끝에 자리한 연구소는 멀리서 보면 아직도 그럴듯했다. 흰 석조 벽과 둥근 유리 지붕은 봄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문턱을 넘은 뒤에야 그 빛이 먼지 위에 내려앉은 것뿐임을 알 수 있었다.
유리창 여러 장이 금 가거나 깨져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덩굴은 바싹 말라 검은 실처럼 늘어져 있었다. 길 양옆의 재배상자는 흙을 쏟아 낸 채 기울어 있었다.
아델리아 뒤를 따라 들어온 관리인 오르만이 조심스레 목을 가다듬었다.
“보일러는 지난겨울에 멈췄습니다. 황실 쪽에서 예산을 끊었으니까요. 수리공을 부르려면 먼저 지붕부터 손봐야 하고요.”
그는 아델리아가 든 서류 봉투를 흘끗 보았다.
“임차권을 받으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정말 여기서 시작하실 생각이십니까? 바깥 유리온실에도 빈자리는 있습니다.”
아델리아는 봉투를 열어 계약서 첫 장을 확인했다. 연구소 본관과 남쪽 온실, 부속 창고를 삼 년 동안 쓸 수 있다는 조항이었다.
위자료는 넉넉하지 않았다. 카시안이 약속한 금액은 정확했고 법무관도 흠잡을 데 없다고 했다. 다만 낯선 도시에서 새 삶을 시작하기에는 수리비와 종잣돈을 함께 감당해야 하는 액수였다.
그래도 계약서 마지막 줄에 적힌 임차권이 있었다.
누군가의 성에 붙어 사는 방이 아니라 자기 열쇠로 여는 공간.
“그래서 여기여야 해요.”
아델리아는 오르만에게 미소를 보였다.
“깨진 곳은 고치면 됩니다. 죽은 식물도 흙부터 살피면 되고요.”
“죽은 식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럼 살아 있는 것부터 찾죠.”
오르만은 더 말하지 못했다. 아델리아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온실 안쪽으로 걸었다.
발밑에서 마른 흙이 사각거렸다. 물이 끊긴 화분에는 이름표조차 남지 않았다. 잎을 잃은 나무의 가지는 손만 대도 부러질 듯했다.
그런데 세 번째 재배상자 앞에서 아델리아는 걸음을 멈췄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미세한 청록빛이 손목을 스쳤다.
보통 사람에게는 빛도 소리도 아니었을 감각이었다. 아델리아에게만 그것은 향과 온도와 작은 떨림으로 다가왔다. 눅눅한 이끼 냄새, 젖은 유리의 차가움 그리고 오래 참아 갈라진 목소리.
너무 어두워.
너무 차가워.
아델리아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쓰러진 화분 하나가 재배상자 아래에 반쯤 묻혀 있었다. 흙은 굳어 있었고 잎은 거의 누렇게 말랐다. 그 가운데서 손톱만 한 청록색 잎 하나가 떨고 있었다.
“마음잎이네.”
그녀는 손을 뻗다가 멈췄다. 마음잎은 사람의 불안을 조금 가라앉히는 식물이었다. 차로 우려 마시면 숨이 고르게 돌아올 수는 있어도 마음속 문제까지 없애 주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한 번 잎을 따면 다음 잎이 자랄 때까지 오래 쉬어야 했다.
지금 이 작은 식물에게 필요한 것은 손님도 메뉴도 아니었다.
빛과 물 그리고 누군가 곁을 지켜 준다는 확신이었다.
“기다려. 오늘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게.”
아델리아는 오르만을 돌아보았다.
“빗물통은 어디 있죠?”
“뒤쪽 창고에 하나 있습니다만 물이 깨끗할지 모르겠습니다.”
“거름망도요. 마른 천이 있으면 같이 가져와 주세요.”
오르만이 허둥지둥 달려가자 아델리아는 부러진 덩굴과 유리 조각부터 골라 냈다. 손끝이 흙을 건드릴 때마다 마음잎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상하게도 그 작은 반응이 가슴 한가운데를 건드렸다.
삼 년 동안 그녀는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다. 카시안의 식사 시간에 맞춰 약차를 준비했다. 북부에서 온 편지의 답장을 정리했고 손님이 몰린 날에는 밤이 깊도록 응접실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아델리아는 마음잎의 옆에 놓인 깨진 화분 조각을 집어 들었다. 조각의 날이 손가락을 스쳤다.
따끔한 통증이 선명했다.
그녀는 피가 맺힌 손끝을 천으로 감쌌다.
이제부터는 묻기로 했다. 식물에게도 자신에게도. 무엇이 필요한지.
오르만이 가져온 물은 다행히 맑았다. 아델리아는 작은 체로 낙엽을 걸러 냈다. 햇볕이 가장 오래 머무는 유리벽 곁의 낮은 선반을 골랐다.
깨진 창틈은 임시로 천을 덧대 막았다. 화분을 들어 옮기는 동안 말라 있던 잎 하나가 툭 떨어졌다.
아델리아는 그 잎을 치우지 못하고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미안해.”
마음잎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남은 잎 끝에 아주 옅은 물기가 맺혔다.
아델리아는 물을 한 숟갈씩만 흙 가장자리에 흘려보냈다. 굳은 뿌리에 물을 한꺼번에 부으면 오히려 상할 수 있었다. 그릇 바닥의 배수구도 확인한 뒤에야 손을 뗐다.
“사람도 식물도 급하다고 한 번에 채우면 탈이 나죠.”
오르만이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식물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아델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뿌리개를 내려놓았다.
“오래 키우다 보면 알게 돼요.”
그 말은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전부도 아니었다.
그녀가 화분 주변의 흙을 고르다가 손끝에 낯선 감촉이 걸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가루였다.
아델리아는 손가락을 들어 빛에 비추었다.
검은 서리처럼 보였다. 봄볕이 유리 지붕을 통과해 내리는데도 가루는 녹지 않았다. 오히려 피부의 온기를 아주 얇게 빼앗아 갔다.
“오르만 씨, 이런 흙을 본 적 있나요?”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곰팡이는 아닙니다. 지난달에도 몇 화분에서 나왔어요. 관리국에 보고했더니 얼어 죽은 뿌리의 찌꺼기라고만 했습니다.”
“어느 구역에서요?”
“주로 안쪽입니다. 이 온실 바닥이 가장 심했고요.”
아델리아는 검은 가루를 종이 봉투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마음잎의 뿌리에 닿은 부분은 손톱 끝으로 아주 조금 덜어 냈다.
당장 원인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흙은 아니었다. 청록의 청음이 그 가루 가까이에서만 둔하게 막혔다.
식물이 겁을 먹은 것처럼.
그때 온실 바깥의 자갈길에서 말발굽 소리가 멎었다.
아델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열린 문으로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카시안 헤르츠는 언제나처럼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검은 머리에는 습기가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은회색 눈은 온실 전체를 빠르게 훑었다.
아델리아는 화분 앞에서 일어났다. 반가움보다 먼저 피로가 올라왔다.
그는 서류에 서명한 뒤에도 그녀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을 겨우 문밖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시안은 그 침묵을 입은 채 다시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여기가 어떤 상태인지 몰랐던 건가?”
낮고 절제된 목소리였다.
“알았다면 오지 말았어야 했나요?”
카시안의 시선이 깨진 천장으로 향했다. “보수 전까지는 머물지 않는 편이 좋다. 사람을 보내겠다.”
아델리아는 손에 든 종이 봉투를 접었다.
예전이었다면 고맙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의 지시가 곧 안전이라고 믿고 따랐을 것이다. 그 뒤에 남는 서운함은 혼자 화분에 물을 주며 삼켰을 테고.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의 남편이 아니었다.
“사람이 필요하면 제가 고용할게요.”
카시안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비용은 내가 내겠다.”
“그건 제 결정이 아니에요.”
온실 안이 조용해졌다. 오르만은 멀찍이 물러섰다.
아델리아는 말끝을 낮췄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언제, 누구의 도움을 받을지는 제가 정하고 싶어요.”
카시안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왼손이 장갑 위에서 천천히 쥐어졌다가 풀렸다.
“알겠다.”
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말 뒤에 무엇을 덧붙일지 기다리는 사람처럼 들렸다.
아델리아는 마음잎을 보았다. 잎은 여전히 작고 위태로웠지만 햇빛 쪽으로 아주 조금 기울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위험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해요.”
카시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왔다.
“무엇이 위험한지 알게 되면 알려 주세요. 제가 판단할 수 있게요.”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말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듯했다.
아델리아는 더 캐묻지 않았다. 아직 자신에게 설명할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답을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선을 분명히 그었다.
“그 전까지는 제가 이곳을 살피겠습니다.”
카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수 인부의 명단이 필요하면 보내겠다. 선택은 네가 해.”
그 말이 조금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델리아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명단만 받겠습니다.”
카시안은 더 머물지 않았다. 문턱에서 한 번 돌아본 그의 눈길이 마음잎 화분에 잠시 닿았다.
“무리하지 마.”
“식물도 저도 천천히 할 거예요.”
그가 나간 뒤 문이 조용히 닫혔다.
아델리아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서운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서운함이 그녀를 다시 그의 곁으로 끌고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 남게 했다.
해가 낮아지자 온실 유리벽은 꿀빛으로 물들었다.
아델리아는 남은 화분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살릴 수 있는 것과 이미 떠난 것을 나눴다. 살릴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붙잡지는 않았다. 빈 재배상자에는 새로운 흙을 채울 계획을 적었다.
창가에는 작은 탁자를 둘 수 있었다. 가운데에는 둥근 테이블 세 개가 들어갈 만큼 자리가 났다. 낡은 부속 창고는 주방으로 고치면 됐다.
차를 마시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자리.
울고 싶은 사람에게는 창가를 내어 주는 자리. 말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따뜻한 잔을 내어 주는 자리.
아델리아는 오래 비어 있던 장부를 펼쳤다. 첫 페이지의 먼지를 털어 내고 펜을 들었다.
치료가 아닌 휴식.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식물의 회복을 앞당기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썼다.
베르데 글라스.
푸른 유리라는 뜻의 이름이 종이 위에 자리 잡자, 텅 빈 온실이 아주 조금 다른 공간처럼 보였다.
마음잎은 아직 잎 한 장뿐이었다. 첫 메뉴를 만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수리비와 의자 값, 식기 값도 계산해야 했다.
그래도 아델리아는 처음으로 이곳의 내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화분을 창가에 조금 더 가까이 밀어 놓는 순간, 검은 서리가 묻은 흙 아래에서 낮은 진동이 전해졌다.
쿵.
아주 멀고 깊은 곳에서 누군가 잠든 채 숨을 고르는 듯한 울림이었다.
마음잎이 그 소리에 맞춰 가늘게 흔들렸다.
아델리아는 손바닥을 온실 바닥에 댔다.
차갑게 굳은 흙 아래에서 청록빛이 한 번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