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이 되었는데 용사가 내 제자

1화: 던전 청소부는 마왕이 되기 싫다
"기둥에 낀 이끼랑 마력 찌꺼기만 박박 긁어내면 딱 30실버 준다고 했지."
강도윤은 거친 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축축하고 음산한 냄새가 진동하는 카라민 협곡의 고대 던전 지하 3층.
사방이 붕괴 직전의 석조 잔해로 가득한 이곳에서 도윤은 낡은 양동이 하나를 옆에 둔 채 제단 중앙의 거대한 흑요석 기둥을 닦고 있었다.
도윤의 본업은 잡역부였다.
마법 아카데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삼류 마나 보유자이자 모험가들이 휩쓸고 지나간 던전의 부산물을 치우거나 유적지의 마력 찌꺼기를 정미하는 일용직 노동자.
"이번 달 방세가 25실버, 밀린 식비가 4실버. 남는 1실버로는 빵 두 덩이를 살 수 있어."
치밀하고도 처절한 가계부를 머릿속으로 굴리며 도윤은 특제 세정 용액을 흑요석 표면에 듬뿍 뿌렸다.
솔을 문지를 때마다 찌든 마력 때가 거품과 함께 씻겨 내려갔다.
의뢰를 맡긴 상단 브로커 한스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그냥 옛날 유적 장식품이야. 마력이 굳어서 흉물스러우니까 겉면만 깨끗하게 닦아두면 돼. 위험할 건 전혀 없어.'
하지만 도윤은 뭔가 쎄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단순한 유적 장식이라기엔 기둥에 새겨진 붉은 고대 룬 문자가 지나치게 불길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어디 보자. 여기 홈에 낀 붉은 돌멩이만 파내면 끝인데."
도윤이 솔 끝으로 기둥 정중앙의 균열 틈새를 찔러 넣었을 때였다.
콰아아아앙!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흑요석 기둥 전체가 칠흑 같은 암흑의 마력으로 물들었다.
"어, 어라?"
도윤이 손을 떼려 했지만 손바닥이 기둥 표면에 자석처럼 쩍 달라붙었다.
기둥 내부에서 잠들어 있던 거대한 마력의 격류가 도윤의 팔을 타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밀려들었다.
【적합한 그릇을 발견했습니다.】
【제8대 마왕의 계승 의식이 시작됩니다.】
머릿속에서 웅장하고도 무거운 고대어의 음성이 벼락처럼 울려 퍼졌다.
"잠깐, 마왕? 계승? 저 그냥 청소부인데요!"
도윤이 비명을 질렀지만 흑요석 기둥은 그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기둥 표면에 새겨져 있던 룬 문자 수천 개가 붉은 빛을 뿜으며 도윤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혈관 속으로 펄펄 끓는 암흑 마력이 휘몰아쳤다.
머리 양쪽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더니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매끄러운 흑색 뿔이 돋아났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온몸에서 짙은 보랏빛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것은 그의 주변 공간 자체에서 자동으로 웅장하고 불길한 저음의 현악기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마치 거대한 마왕의 강림을 알리는 전용 배경음악처럼 둥둥거리는 북소리와 음산한 첼로 선율이 던전 전체를 뒤흔들었다.
"아니, 이 소리는 또 뭐야? 배경음악이 왜 자동으로 깔려?"
【계승 완료: 강도윤.】
【칭호: 멸망을 부르는 밤의 군주.】
【보유 권능: 진조의 위압(상시 발동), 지배 계약(미사용), 심연의 장막.】
흑요석 기둥은 마력을 완전히 잃고 하얀 재가 되어 바스러져 내렸다.
던전 안에는 빗자루와 솔을 쥔 채 멍하니 서 있는 도윤만 남았다.
도윤은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더듬었다.
진짜로 뿔이 있었다. 딱딱하고 매끄러운 악마의 뿔.
"망했다."
도윤의 입에서 진심 어린 탄식이 흘러나왔다.
세계 정복? 대륙의 멸망? 그런 건 도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당장 내일 방세를 내지 못하면 여관 주인아주머니에게 멱살을 잡혀 쫓겨날 판이었다.
"일단… 뿔부터 숨겨야 해. 그리고 정산받아야지. 내 피 같은 30실버."
도윤은 낡은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써 뿔을 가렸다.
하지만 주위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음산한 배경음악과 눈동자의 붉은 빛은 완벽히 감춰지지 않았다.
도윤은 서둘러 던전 입구로 향했다.
던전 입구 야영지.
상단 브로커 한스는 고용된 경비 용병 세 명과 함께 화롯가에서 카드를 치고 있었다.
"그 청소부 녀석, 아직도 안 나오나? 설마 지하에서 쥐새끼한테 물려 죽은 건 아니겠지?"
"죽었으면 일당 굳고 좋죠, 뭐. 크하하!"
용병들이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쿵……
던전 통로 안쪽에서부터 지면이 울리는 묵직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동시에 기온이 급격하게 영하로 곤두박질치며 화롯불의 붉은 불꽃이 파랗게 얼어붙었다.
"뭐, 뭐야? 지진인가?"
"공기가 왜 이렇게 무거워?"
한스와 용병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굴 입구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그림자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귓가를 찢을 듯한 지옥의 불길한 현악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르릉……
후드를 푹 눌러쓴 사내.
그 후드 틈새로 엿보이는 눈동자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순식간에 불태울 듯한 핏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주변 공기가 찌그러지고 공간 전체가 압도적인 마력에 짓눌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도윤은 그저 억울한 마음으로 조용히 다가가 정산을 요구하려 했을 뿐이었다.
'아, 목소리가 왜 이렇게 잠기지? 감기 들었나.'
도윤은 헛기침을 삼키며 낮게 속삭였다.
"저기요… 일 끝났는데요. 제 30실버 주시죠."
하지만 도윤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 것은 평범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왕의 패시브 권능인 '진조의 위압'과 과장된 음성 변조가 섞여들며 천지를 뒤흔드는 파멸의 저주로 울려 퍼졌다.
"……피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나의 몫을 내놓아라."
동굴 벽이 쩌적 갈라지며 바위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히, 히이익!"
브로커 한스는 바지에 오줌을 지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베테랑이라 자부하던 경비 용병들은 도윤의 눈빛을 마주치자마자 허파가 찢어지는 듯한 공포를 느끼며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마, 마왕……! 마왕 아르그렌의 부활이다아악!"
한스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품속에 있던 가죽 주머니를 냅다 집어 던졌다.
그 주머니 안에는 이번 원정의 전 재산인 금화 수십 개가 들어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다 가져가세요! 제발 영혼만은 거두지 말아주십시오오오!"
한스는 비명을 지르며 숲 쪽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다 이내 기절해 버렸다.
순식간에 던전 입구는 기절한 세 명의 용병과 거품을 문 브로커, 그리고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묵직한 금화 주머니만 덩그러니 남았다.
"……."
도윤은 허탈한 눈으로 땅에 떨어진 금화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난 그냥 30실버만 달라고 했는데."
도윤이 한숨을 쉬며 금화 주머니를 주워 들었다.
묵직한 가죽 주머니 안에는 번쩍이는 금화가 최소 50닢은 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평생 먹고살 돈이었지만 도윤의 가슴속에는 기쁨 대신 거대한 파멸의 예감이 엄습했다.
'이거 완전 강도 누명 쓰게 생겼잖아.'
도윤은 서둘러 후드를 고쳐 매고 도망치듯 던전 야영지를 벗어났다.
변방 숲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도윤의 낡은 나무 오두막.
도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빗장을 질렀다.
탁자 위에는 낡은 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도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깊은 마른세수를 했다.
거울 속 청년은 분명 며칠 전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살던 평범한 도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새까맣고 윤기 나는 짧은 흑색 뿔 두 개가 이마 양쪽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눈동자는 은은한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주변에서 스산한 마력 진동이 웅웅거렸다.
"내가 진짜 마왕이 된 거냐고."
도윤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묘한 정보들을 하나씩 점검했다.
【지배 계약: 대상에게 절대적인 복종의 인을 새긴다. 거부 시 영혼이 파괴된다.】
【마물 통솔: 하위 마물들을 정신적으로 굴복시키고 명령을 하달한다.】
【균열 감지: 대륙 전역의 시공간 균열과 증오의 흐름을 읽는다.】
하나같이 흉흉하고 무시무시한 능력들뿐이었다.
하지만 도윤에게 가장 절실한 권능은 '외모 원래대로 되돌리기'나 '배경음악 끄기' 같은 생활 밀착형 마법이었다.
"마왕이고 나발이고 이 꼴로 마을에 나갔다가는 신전 성기사단한테 목이 잘릴 게 뻔하잖아."
도윤은 붕대를 꺼내 이마의 뿔을 칭칭 감았다.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위장하니 그나마 조금 덜 흉측해 보였다.
그때였다.
창문 밖 하늘 저편, 왕국 수도 방향의 높은 하늘에서 눈이 멀 것 같은 거대한 황금빛 빛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쿠구구구구-!
대륙 전체를 진동시키는 신성한 파동.
도윤의 몸속에 깃든 마왕의 마력이 그 황금빛을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거칠게 요동쳤다.
"저건 또 뭐야? 무슨 축제라도 하나?"
도윤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지만 본능적으로 불길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 빛은 바로 대신전에서 울려 퍼진 '성검의 계시'였다.
300년의 주기 끝에 새로운 마왕이 깨어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그 마왕을 처단하기 위해 선택받은 새로운 용사가 성검을 쥐었다는 징표였다.
물론 도윤은 그런 거창한 대륙의 역사 따위는 알지 못했다.
"불길하니까 일단 밥이나 먹자."
도윤은 한숨을 쉬며 낡은 냄비에 물을 붓고 감자와 말린 버섯을 썰어 넣었다.
배가 고프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법이었다.
장작불 위에서 보글보글 찌개가 끓어오르며 구수한 냄새가 좁은 오두막 안을 가득 채웠다.
도윤이 나무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한 모금 떠먹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오두막의 낡은 나무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걷어차이며 열렸다.
"마왕! 각오해라!"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는 위압적인 기사의 호통이라기엔 너무나 앳되고 맑았다.
도윤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굳어버린 눈으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문간에 서 있는 것은 몸에 맞지도 않는 헐렁하고 거대한 흰색 망토를 두른 어린 소년이었다.
햇살 같은 금발 머리에 투명한 벽안을 지닌 아이.
소년의 손에는 번쩍이는 성검 대신 모서리가 닳고 흠집투성이인 낡은 목검 한 자루가 쥐여 있었다.
나이는 기껏해야 열두세 살 남짓.
소년은 결연한 표정으로 목검의 칼끝을 도윤의 코앞으로 겨누었다.
"신전의 계시를 받았다! 세계를 멸망시킬 사악한 마왕 아르그렌…… 내가 널 베러 왔다!"
소년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세상을 구할 영웅처럼 비장했다.
그러나 도윤의 시선은 소년의 비장한 얼굴이 아니라 소년의 앙상하게 마른 팔과 흙투성이가 된 낡은 가죽 부츠에 머물렀다.
그리고 바로 그 정적 속에서.
꼬르르르르륵-
오두막 안을 뒤흔들 정도로 거대하고 처절한 배꼽시계 소리가 소년의 배에서 울려 퍼졌다.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목검을 쥔 소년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
"……."
숟가락을 든 신임 마왕과 목검을 든 굶주린 어린 용사.
두 사람의 기묘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첫 만남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