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종 직전, 망겜의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

2화: 남아 있는 자들
“제1군단장 제르엘.”
성문 앞에 선 은발의 군단장이 검을 세웠다. 검날에는 아직 임프 병사의 피가 묻어 있었다.
“멸망의 마왕 아스타로트 폐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남은 제1군단의 검과 목숨은 모두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검은 불꽃이 휘어진 성문 틈을 메우고 있었다. 불꽃 바깥에서는 밤바람조차 소리를 내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화살이 날아들던 숲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현우는 제르엘을 내려다봤다.
게임 속에서라면 이 장면은 스킵 버튼을 눌렀을 연출이었다. 충성을 맹세한 호위 보스가 전투에 합류하고 다음 페이즈가 열리는 식이다.
그런데 제르엘의 무릎은 돌바닥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숨을 고를 때마다 찢어진 어깨 갑옷 아래로 핏물이 번졌다.
현우는 낮게 말했다.
“목숨까지 걸지 마.”
제르엘이 고개를 들었다.
“폐하?”
“죽으라고 시키는 충성은 필요 없어. 살아남아서 지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제르엘의 붉은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대답하지 못한 채 입술을 다물었다.
현우는 시선을 돌렸다.
“부상자부터 옮겨. 성문 위에는 두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안으로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제르엘은 망설임 없이 일어섰다. 이번에는 명령을 되묻지 않았다.
구조된 임프 병사가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지나갔다. 꺾였던 다리는 붙었지만 걸을 때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현우가 그쪽을 보자 병사가 황급히 손을 가슴에 댔다.
“바크라고 합니다. 폐하.”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걸을 수 있나?”
“예. 칼도 잡을 수 있습니다.”
“그건 묻지 않았어.”
바크가 움찔했다. 현우는 무너진 성문을 가리켰다.
“치료받고 쉬어. 다음에 싸울 수 있으면 그때 잡아.”
바크의 입술이 달싹였다. 고작 몇 마디였지만 병사는 대답 대신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름이 있었다.
임프 전령. 레이드 길목에 몇 마리씩 나오는 잡몹. 현우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분류가 바크라는 이름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성문 위에서 고블린 경계병이 비명을 질렀다.
“서쪽 정찰탑의 등불이 꺼졌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숲 쪽으로 향했다.
성벽 너머로는 정찰탑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나무들 사이에 떠 있어야 할 푸른 불빛 하나도 없었다. 그 자리는 흰 안개가 조금씩 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제르엘이 곧장 손을 들었다.
“궁수들은 사격 준비. 성문 앞 방패조는 교대한다. 신호가 오기 전까지 화살을 낭비하지 마라.”
병사들이 흩어졌다. 현우는 제르엘 곁으로 다가갔다.
“정찰탑과 연락은?”
“마도 통신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제르엘의 대답은 단호했지만 손등에는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도 답을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현우는 불길한 감각을 삼켰다.
“지휘실로 가자.”
복도를 지나는 동안 성 안은 낯선 소음으로 가득했다. 하인들은 양동이에 물을 퍼 나르고 고블린 병사들은 부서진 창을 갈아 끼웠다. 누군가는 울음을 참는 아이를 업고 내성 쪽으로 뛰었다.
누군가 현우의 망토가 스치는 소리만 듣고 벽으로 붙었다. 그 눈에는 믿음보다 먼저 두려움이 있었다.
현우도 이해했다. 자신은 그들에게 하루아침에 다가온 괴물일 것이다. 마왕이란 이름이 친절한 군주를 뜻할 리 없었다.
지휘실 중앙에는 사람 키만 한 검은 거울이 서 있었다. 테두리를 감싼 은빛 룬은 대부분 꺼져 있었다. 현우는 이 물건을 기억했다. 레이드에서 미니맵을 열면 배경 장식으로 지나가던 전장의 감시 거울이었다.
제르엘이 테두리에 손을 얹었다.
“동문 감시 거울을 열어라.”
룬 하나가 희미하게 빛났다. 그러나 거울 표면은 검은 물처럼 흔들리기만 했다.
“서쪽 정찰탑을 연결해라.”
이번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
제르엘은 명령을 세 번 더 반복했다. 마지막에는 목소리가 낮아졌다. 거울 속에는 제르엘의 창백한 얼굴만 비쳤다.
현우는 무심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로그아웃.”
입 밖으로 나온 말이 지휘실에 떨어졌다.
제르엘이 고개를 돌렸다.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현우의 손가락이 굳었다. 당연히 아무 창도 뜨지 않았다. 종료 안내도 없었다. 눈앞의 거울과 이 차가운 돌바닥은 꺼진 화면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거울에 가까이 갔다.
“이걸 다시 움직일 수는 없나?”
“마력석을 교체하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장고 열쇠는 제2군단장이 관리합니다. 지금은 그분과도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현우는 거울 테두리에 손을 올렸다. 몸 안에서 꿈틀대는 마력을 느끼자 관자놀이가 먼저 욱신거렸다. 성문을 막고 병사의 상처를 붙인 뒤부터 그 감각은 얕아져 있었다.
그래도 바깥을 보지 못하면 다음 판단도 할 수 없었다.
“비켜 있어.”
검은 불꽃이 손끝에서 피어났다. 현우는 광염을 폭발시키지 않고 실처럼 가늘게 눌렀다. 불꽃이 룬 사이를 훑자 꺼져 있던 문양들이 하나씩 붉게 살아났다.
거울이 열렸다.
동문 밖의 숲이 나타났다.
검은 나무들은 반쯤 잘린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흰 공백이 숲 가장자리에서 밀려와 뿌리를 삼키고 있었다. 닿은 나무는 쓰러지지도 않았다. 껍질과 잎과 그림자까지 한순간에 지워졌다.
현우는 숨을 멈췄다.
공백은 성문을 향하지 않았다. 숲의 낮은 지대를 따라 옆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왕성 지하 수로가 이어지는 방향이었다.
“저 길은 어디로 이어지지?”
“보급 수로와 이어집니다.”
제르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동문이 막혀도 수로까지 잃으면 성 안의 물길이 끊깁니다.”
현우가 거울을 더 자세히 보려는 순간 검은 화면에 흰 선이 그어졌다.
쩍.
거울 전체에 금이 갔다. 불꽃은 꺼졌고 현우의 무릎이 휘청였다. 제르엘이 팔을 붙잡아 겨우 중심을 세웠다.
“폐하. 무리하셨습니다.”
현우는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거울 표면의 금은 조금 전까지 비추던 숲과 함께 굳어 있었다.
“기록도 남지 않는다는 거군.”
제르엘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것은 길도 사람도 마도구도 구별하지 않는 듯합니다.”
현우는 깨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뿔과 검은 눈동자. 세상에서 가장 낯선 얼굴이었다.
예전이라면 재접속하면 됐을 것이다. 오류가 나면 공지 게시판을 확인하고 서버가 열릴 때까지 기다리면 됐다.
하지만 여기에는 재접속도 게시판도 없었다. 바크는 피를 흘렸고 제르엘은 두려움을 숨겼다. 누군가가 지워지면 되돌아올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창고로 간다.”
현우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창고는 내성 가장 안쪽의 낮은 석실에 있었다. 문을 열자 습기와 약초 냄새가 섞여 밀려왔다. 선반에는 말린 고기와 곡물 자루가 층층이 쌓여 있었지만 빈자리가 더 눈에 띄었다.
늙은 오크 관리인이 장부를 끌어안고 엎드렸다.
“창고지기 모르칸. 폐하를 뵙습니다.”
“보고해.”
모르칸은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펼쳤다.
“성에 남은 자는 백스물셋입니다. 병사 마흔둘. 하인과 기술자 오십여 명. 부상자 열일곱. 식수는 배급하면 열흘치입니다.”
“약은?”
“붕대와 해열초는 사흘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지하 수로에서 물을 끌어오지 못하면 식수도 그보다 먼저 모자랄 수 있습니다.”
숫자가 하나씩 현우의 머릿속에 박혔다. 게임 속 마왕성에는 수천 명의 몬스터가 자동으로 생성됐다. 보급품은 정해진 시간마다 다시 채워졌다.
여기서 백스물셋은 다시 생기지 않을 숫자였다.
제르엘이 창고 입구를 돌아봤다.
“정찰은 보류해야 합니다. 동문이 다시 공격받으면 지금 병력으로는 방어가 어렵습니다. 수로에 적이 매복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말은 옳았다. 현우도 바깥으로 나가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성 안에 틀어박혀 기다리면 물부터 끊긴다. 흰 공백이 수로까지 삼킨 뒤에는 성문을 지켜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전투 가능한 놈은 안 보낸다.”
제르엘이 현우를 봤다.
“폐하.”
“길만 확인할 사람 둘. 방패 하나와 등불 하나. 적과 마주치면 싸우지 말고 돌아와.”
“길을 아는 자가 필요합니다.”
창고 뒤편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압니다.”
바크였다. 임프 병사는 하인의 어깨를 짚은 채 서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눈동자는 성문 앞보다 또렷했다.
제르엘이 즉시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왜 여기 있지? 치료실에 있어야 한다.”
“동문 보급을 맡았을 때 수로를 여러 번 다녔습니다. 막힌 곳과 갈림길을 압니다.”
“다리가 그 모양인데.”
바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현우는 임프의 발끝을 봤다. 회복된 다리는 분명 떨리고 있었다.
“오늘은 안 간다.”
바크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대신 길을 그려. 갈림길마다 뭐가 있는지도 적고.”
현우는 모르칸에게 장부를 가리켰다.
“그리고 지금부터 창고 장부 말고 사람 장부를 만든다.”
모르칸이 눈을 크게 떴다.
“사람 장부를 말씀입니까?”
“이름. 다친 곳. 할 수 있는 일. 가족이 어디 있는지까지.”
제르엘이 조용히 물었다.
“전투 인원을 추리기 위해서입니까?”
현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성문 앞에서 바크를 보지 못했다면 그럴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쓸 수 있는 전력과 쓸모없는 전력을 나누고 가장 효율적인 길을 골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름도 없이 숫자만 남기면 먼저 사라지는 쪽은 늘 약한 사람들이었다.
“누가 남았는지 알아야 구할 수 있으니까.”
제르엘의 눈빛이 가만히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그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때 창고 끝의 마력등 하나가 번쩍였다.
푸른 불빛이 하얗게 뒤집혔다.
선반에 기대 있던 하인이 비명을 삼키며 물러났다. 마력등 아래의 벽돌 한 장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자리에는 벽이 무너진 흔적도 없었다. 칠흑보다 더 짙은 빈틈만 뚫려 있었다.
모르칸이 장부를 떨어뜨렸다.
“내성 안입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현우는 손을 들어 병사들을 멈췄다. 검을 뽑는 소리가 창고 안에 겹쳤다.
흰 테두리가 벽돌 한 장 더를 핥았다.
쿵.
빈틈 너머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쿵. 쿵.
마지막 세 번째 두드림 뒤에 쉰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누가 있습니까?”
성 밖에서 날아든 화살보다 그 목소리가 더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