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마왕입니다만?! : 현대 힐링 라이프를 방해하지 마라

6화: 협회의 착각
골목 어귀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번져 왔다.
붉고 푸른 경광등 불빛이 건물 외벽을 어지럽게 훑었다. 멀리서 협회 차량 여러 대가 급정거하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강도현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었다.
"시끄러운 자들이 오는군."
윤서연이 황급히 다가오며 도현의 앞을 막아섰다.
"도현 씨! 협회 기동조사팀이에요. 안에 들어가서 게이트를 부순 사람이 도현 씨라는 걸 알면 최소 사흘은 불려 다니면서 진술서를 써야 할 텐데요?"
"진술서?"
도현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왜 남의 질문에 일일이 답을 적어야 하지?"
"원래 규정이 그래요. 미등록 각성자가 게이트를 단독 격파하면 신원 조회부터 마력 정밀 측정까지 전부 거쳐야 하거든요."
도현에게는 그 어떤 마수와의 사투보다도 피곤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서류 뭉치에 시달리며 마왕의 마력을 측정기 따위에 들이밀 이유는 추호도 없었다. 방금 전 켜둔 게임기 화면과 충전기 코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밥값을 다 했다. 나머지는 길드장인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네? 아니, 잠깐만요! 이렇게 그냥 가시면 협회에 뭐라고 설명해요?"
"골목에 불량배가 나와서 손을 봐줬다고 해라."
"마왕교 테러범이랑 변이 마수가 불량배예요?!"
윤서연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외쳤지만 도현은 이미 뒤를 돌아 원룸 건물 계단으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낡은 철제 계단을 밟는 발걸음에는 귀찮은 일에서 도망치는 자 특유의 경쾌함마저 묻어났다.
"도현 씨! 진짜 그냥 가요? 나중에 협회에서 꼬치꼬치 캐물으면 나 감당 못 해요!"
"알아서 잘 둘러대라. 네가 이 구역 대기조 길드장이라며."
원룸 건물 2층 복도로 들어간 도현이 손을 대충 흔들며 문을 닫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윤서연은 닫힌 현관문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별난 사람이야. 저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태평하지?"
하지만 곧이어 골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무거운 발소리들에 윤서연은 재빨리 표정을 굳혔다. 지금 이 자리를 수습할 수 있는 공인 헌터는 자신과 라온 길드원들뿐이었다.
"전원 산개! 잔류 마나 측정기 가동하고 차원 왜곡 파동부터 차단해!"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검은 방탄 코트를 입은 협회 기동조사팀 요원들이 골목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선두에는 단추를 두 개쯤 풀어헤친 셔츠에 구겨진 넥타이를 맨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대한헌터협회 관리팀장 박진철이었다.
박진철은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야근 도중 한강북로 변전소 부근에서 C급 규모의 이상 게이트가 감지되었다는 긴급 호출을 받고 달려온 참이었다.
"팀장님! 현장 상황이 이상합니다!"
조사관 하나가 손에 든 계측기를 흔들며 다급하게 외쳤다.
"뭐가 이상해? 마수들이 아직 골목에 남아 있나?"
"아닙니다! 게이트가…… 이미 닫혔습니다!"
"뭐?"
박진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출동 신고가 들어온 지 10분도 안 됐어. C급 게이트 강제 개방 징후였는데 벌써 닫혔다고? 라온 길드가 정리를 끝낸 건가?"
박진철의 시선이 골목 한가운데 서 있던 윤서연에게 닿았다. 윤서연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라온 길드장 윤서연입니다. 박진철 팀장님 맞으시죠?"
"윤 길드장.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라온 길드가 단독으로 C급 변종 게이트를 10분 만에 클리어했다고요? 길드 전력이 그 정도였습니까?"
"아, 그게…… 저희가 전부 한 건 아니고요……"
윤서연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 순간 현장 감식을 진행하던 분석관들의 비명이 골목을 갈랐다.
"팀장님! 이쪽으로 와보십시오! 계측기가…… 계측기가 이상합니다!"
박진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변전함 앞 잔해로 다가갔다. 분석관이 들고 있는 최신형 마나 스캐너의 화면이 붉은색 경고창을 띄우며 미친 듯이 점멸하고 있었다.
삐이이익―!
날카로운 비프음과 함께 스캐너의 액정 화면에 균열이 생기더니 곧이어 퍽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뭐야? 계측기가 왜 터져?"
"마력 밀도가 통상적인 한계 수치를 완전히 초과했습니다! 기존 S급 계측 허용치마저 아득히 넘어선 압축 파동이 현장에 남아 있습니다!"
"뭐라고?"
박진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바닥의 잔해를 직접 살폈다.
그곳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잘게 부서진 검은 돌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왕교가 사용하는 마력 증폭 장치였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다. 마왕교의 장치는 폭주하면 주변 마력을 빨아들여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법이었다. 그런데 바닥에 흩어진 열두 개의 증폭석은 폭발 흔적이 전혀 없었다.
오직 중심 마력선만 정밀하게 절단된 채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증폭석 열두 개의 마력 회로를 동시에 끊어버렸다고? 역류 폭발도 없이?"
박진철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장 안쪽에 흩어진 칠흑빛 파편 덩어리. 차원의 틈을 지탱하던 차원 핵의 잔해였다.
마법이나 도검으로 쪼갠 자국이 아니었다. 거대한 힘으로 한 번에 쥐어짜 으스러뜨린 듯한 완벽한 압쇄 흔적이었다.
"차원 핵을 맨손으로 쥐어서 깼다고? 이 강도를?"
박진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박진철은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윤서연을 돌아봤다. 피로에 찌들어 있던 직장인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헌터 행정관 특유의 날카로운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윤 길드장.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 파괴 흔적은 A급 공략대 수준으로 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게……"
윤서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도현의 당부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협회 최고의 베테랑인 박진철의 눈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현장에 남은 파괴 흔적 자체가 이미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정말 우연히…… 근처에 계시던 은둔 헌터 한 분이 도와주셨습니다."
"은둔 헌터?"
박진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떤 분입니까? 협회 등록자입니까? 랭킹 몇 위권 헌터입니까?"
"등록 여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평소에는 아주 조용히 지내시는 분인데…… 골목에서 정전이 일어나고 마수가 튀어나오니까 조용히 다가오셔서……"
"다가와서 어떻게 했습니까?"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셨어요."
"……뭐라고요?"
박진철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손가락을 튕기니까 달려들던 변이 마수 수십 마리의 신경 회로가 그 자리에서 전부 끊어졌습니다.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가시더니 제단석을 하나씩 손끝으로 툭툭 쳐서 잠재우셨고요. 마지막에는 차원 핵을 손바닥으로 잡고 그냥 으스러뜨리셨어요."
골목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박진철 뒤에 서 있던 협회 조사관들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윤서연을 바라봤다.
손가락을 튕겨 마수를 제압하고 마왕교의 결계를 손끝으로 해제하며 차원 핵을 맨손으로 분쇄했다.
그것은 현대 헌터학의 이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신화적인 묘사였다.
"그 헌터 분의 연세나 인상착의는 어땠습니까? 백발의 노마법사였습니까? 아니면 고위 차원술사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습니까?"
박진철의 목소리가 숭고함마저 띤 채 낮게 가라앉았다.
"어…… 그냥 20대 후반 정도의 청년이셨고요. 검은색 츄리닝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계셨어요. 눈 밑에 다크서클이 좀 짙으셨고요."
"……검소하시군."
"네?"
윤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진철은 턱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착각의 톱니바퀴가 맹렬한 속도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속의 부귀영화를 모두 초월한 채 누추한 자취촌에 은거하며 세상을 관조하는 절대 고수! 겉모습은 젊은 청년으로 위장하고 있으나 실상은 마나의 극의에 도달하여 노화를 멈춘 반로환동의 대마법사임이 틀림없어!"
"아니, 저기 팀장님? 그분 그냥 백수 청년 같은 느낌인데요……"
"윤 길드장, 순진한 소리 마십시오!"
박진철이 윤서연의 어깨를 덥석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왕교가 최근 서울 전력망을 노리고 테러를 기획하고 있다는 첩보가 협회 상부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사악한 음모를 미리 간파하시고 마왕교의 간계를 현장에서 직접 처단하기 위해 일부러 이곳에 자리를 잡으신 겁니다!"
"마왕교를 처단하려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완벽한 타이밍에 나타나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차원 핵을 분쇄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분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세상을 지키는 고결한 수호자이십니다!"
박진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매일 정치질과 이권 다툼에 눈이 먼 대형 길드 S급 헌터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그에게, 이름도 명예도 바라지 않고 슬리퍼 차림으로 나타나 재앙을 막아낸 이 무명의 은둔자는 살아있는 성자처럼 느껴졌다.
"팀장님, 보고서는 어떻게 작성할까요?"
조사관이 묻자 박진철이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이분의 신원을 함부로 들추려 하지 마라. 고결한 은둔자의 심기를 건드려 속세를 완전히 떠나버리게 만들면 국가적인 대손실이다. 일단 '미확인 S급 은둔 대마법사의 비공식 개입'으로 1급 기밀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협회 차원에서 이 일대를 특별 보호 구역으로 지정하고 조용히 지원할 방안을 모색한다!"
박진철은 감격에 찬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윤서연은 그런 박진철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냥…… 게임 꺼졌다고 화나서 뛰쳐나오신 것 같았는데……'
윤서연은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조용히 입을 닫았다.
같은 시각, 2층 원룸 자취방.
도현은 바닥에 엎드려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았다. 삑 하는 맑은 기계음과 함께 전기장판의 빨간 불이 켜졌다.
"역시 온돌과 전기장판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차가웠던 방바닥이 서서히 따스해지기 시작했다.
도현은 충전 케이블을 휴대전화에 연결했다. 번개 모양 아이콘이 뜨며 배터리가 6퍼센트에서 7퍼센트로 차오르는 것을 확인하자 비로소 마음속 깊은 곳에서 평온이 차올랐다.
냉장고 윙윙 돌아가는 소리.
와이파이 공유기에서 깜빡이는 초록색 불빛.
마계의 척박한 화산재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 비하면 이 좁은 원룸이야말로 우주에서 가장 완벽한 낙원이었다.
도현은 냄비에 물을 올리고 서랍에서 컵라면 하나를 꺼냈다. 뜨거운 물을 붓고 3분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협탁 위에 놓인 작은 종이봉투를 바라봤다.
골목에서 주워 온 검은 돌 조각이었다.
마왕교 놈들이 마력 회로를 조잡하게 엮어 만든 싸구려 부산물.
"감히 내 휴식과 전기를 방해해?"
도현의 눈동자에 서늘한 붉은 안광이 스쳤다.
마왕의 이름을 팔아 세상을 어지럽히든 말든 그건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짓거리 때문에 배달 기사가 못 오고 와이파이가 끊기며 냉장고 음식이 상하는 것은 마왕 루시펠의 이름을 걸고 용납할 수 없는 중죄였다.
"한 번만 더 내 반경 1킬로미터 안에서 분탕질을 쳤다간 그 교주 놈 목을 직접 뽑으러 가겠다."
도현은 젓가락으로 컵라면 면발을 휘저으며 결심을 굳혔다.
후루룩.
매콤하고 짭조름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차가웠던 속이 확 풀렸다.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이런 걸 매일 먹을 수 있는데 왜 마계로 돌아가겠나. 용사 놈들도 멍청하기 짝이 없지. 나를 토벌할 시간에 이 컵라면이나 한 박스 보냈으면 내가 알아서 왕좌를 던지고 나왔을 텐데."
기분 좋게 라면을 비운 도현은 스마트폰의 은행 앱을 켰다.
[잔고 : 31,400원]
도현의 입꼬리가 씁쓸하게 내려앉았다.
월세와 관리비를 내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내일 당장 배달 치킨 한 마리를 시키고 나면 다음 날은 굶어야 할 판이었다.
그렇다고 또다시 헌터 협회에 가서 번거롭게 E급 게이트 등록을 하고 마수 시체를 나르는 노가다를 뛰고 싶지는 않았다.
도현의 시선이 방구석 구석에 굴러다니는 낡은 가방으로 향했다.
소환 마법진에 휘말릴 때 마계 궁정에서 얼떨결에 같이 딸려온 잡동사니들이었다. 헬하임에서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흔한 광석과 장식품들이었지만 지구의 헌터들이 본다면 눈이 뒤집힐 만한 고농도 마나스톤 덩어리들이었다.
"이걸 협회에 팔러 가면 또 귀찮은 서류를 쓰라고 하겠지."
도현은 턱을 괴고 화면을 넘기다가 스마트폰에 설치된 한 앱을 발견했다.
[오이마켓 - 우리 동네 중고 직거래]
도현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굳이 협회를 거칠 필요가 있나. 이웃 주민끼리 쿨하게 직거래하면 그만이지."
세상을 지키는 고결한 대마법사의 탄생에 전율하고 있는 협회의 착각 따위는 전혀 모른 채, 전직 마왕은 내일 시켜 먹을 바삭황금치킨 값을 마련하기 위해 마계의 국보급 광석을 사진 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