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마왕입니다만?! : 현대 힐링 라이프를 방해하지 마라

4화: 마왕교의 첫 번째 방해
정전은 게임의 저장 아이콘이 사라지는 순간 시작됐다.
루시펠은 화면 한가운데 멈춘 캐릭터를 바라봤다. 적의 공격이 들어오기 직전이었다. 보스의 체력은 한 칸 남았고 그의 손가락은 가장 중요한 버튼 위에 올라가 있었다.
화면이 꺼졌다.
"……"
방 안의 소리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냉장고의 낮은 진동도 멈췄고 공유기의 불빛도 꺼졌다. 창밖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번졌다.
루시펠은 검은 화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반응은 없었다. 휴대전화의 배터리는 열한 퍼센트였다.
그는 배달 앱을 열었다.
[네트워크 연결을 확인해 주세요.]
루시펠은 휴대전화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게임이 멈췄다. 와이파이가 끊겼다. 배달 앱도 열리지 않았다.
마계의 성벽이 무너졌을 때도 이만큼 불쾌하지는 않았다. 성벽은 다시 세우면 됐다. 하지만 지금 그의 방에는 세울 수 있는 전선이 없었다.
루시펠은 차단기를 올렸다.
딸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차단기 덮개를 열고 손끝으로 내부의 흐름을 더듬었다. 전기가 끊긴 방향은 원룸 건물이 아니었다. 골목 끝의 변전함과 전신주에 무언가가 달라붙어 있었다.
전력이 빨려 나가고 있었다.
마력으로 바뀐 전력은 지하와 골목 아래로 흘렀다. 그 끝에는 익숙한 냄새가 있었다. 마왕교의 검은 돌에서 느꼈던 탁한 명령의 냄새였다.
루시펠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종이봉투 안의 돌 조각이 붉게 뛰고 있었다. 봉투 표면에 원 안의 세 뿔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전기를 먹고 있군."
그는 윤서연에게 받은 명함을 집어 들었다. 명함 아래의 번호를 누르면 상황을 알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통화 연결음이 길어지는 동안에도 골목의 마력은 계속 커졌다.
루시펠은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이미 현장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방금 전 통화에서 들었던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윤서연은 위험한 곳에 사람이 있으면 먼저 뛰어드는 종류였다.
그는 외투를 걸쳤다. 현관 옆에 놓인 운동화를 신으며 휴대전화와 검은 돌 조각을 함께 주머니에 넣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복도 전등이 한 번 깜빡였다.
"내 전기를 끊은 놈부터 찾는다."
그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다.
한강북로 골목에는 이미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전신주 꼭대기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녹아내린 전선이 빗물받이 위로 축 늘어져 있었고 변전함 주변의 아스팔트는 검게 부풀어 올랐다.
"뒤로 물러나세요! 전선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윤서연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에서 피어난 주황색 불꽃이 골목 입구에 얇은 선을 그었다. 사람들은 불꽃을 보고서야 위험 구역에서 조금씩 물러났다.
라온 길드의 남자 둘이 주민들을 건물 안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한도윤은 울먹이는 아이의 손을 잡았고 배지훈은 전신주 아래에 임시 차단봉을 세웠다.
윤서연은 휴대전화로 협회에 소리치고 있었다.
"한강북로 삼 번 골목입니다. 변전함이 과열됐고 마력 반응이 계속 올라가요. 민간인 대피는 진행 중이에요. 네? 통제 인력은 얼마나 걸린다고요?"
그녀의 눈이 골목 안쪽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 계단을 내려온 루시펠과 시선이 마주쳤다.
"도현 씨?"
윤서연은 통화를 끊고 그에게 다가왔다.
"왜 여기 나왔어요? 이쪽은 위험해요."
"내 집의 전기가 끊겼다."
"그래도 혼자 오면 안 되죠. 안에 대기조가 있고 협회가 올 때까지 접근 금지예요."
"금지하면 전기가 돌아오나?"
윤서연의 입이 잠깐 다물렸다.
"그건 아니지만……"
"그럼 확인한다."
루시펠은 그녀를 지나 변전함 쪽으로 걸었다.
윤서연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손목의 보호 밴드가 작은 불빛을 냈다.
"도현 씨. 진짜로 위험하다니까요."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왜 가요?"
루시펠은 그녀의 손을 내려다봤다. 힘을 주면 쉽게 떼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인간은 방금까지 주민을 대피시키느라 손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그 손이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내 방에 다시 불을 켜야 한다."
"그게 이유예요?"
"중요한 이유다."
윤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적어도 제 뒤에서 움직여요."
루시펠은 대답하지 않고 변전함 앞에 섰다.
금속 문은 안쪽에서 부풀어 있었다. 전기가 아니라 마력이 문을 밀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표면을 건드렸다.
문 너머에서 세 개의 맥박이 느껴졌다.
왼쪽 아래. 오른쪽 위. 그리고 중심 깊숙한 곳.
세 개의 검은 돌이 전류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마계의 문양을 흉내 낸 얇은 회로가 이어져 있었다.
"누가 이런 걸 달았지?"
윤서연이 물었다.
"전선을 고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루시펠은 철문에 손바닥을 댔다. 살짝만 힘을 주자 문 안쪽의 나사가 모두 비명을 질렀다. 그는 힘을 거둔 뒤 잠금장치를 뜯어냈다.
쿵.
변전함 문이 열렸다.
안쪽에는 검게 탄 부품 사이로 돌 세 개가 박혀 있었다. 돌 위에는 원 안의 세 뿔이 새겨져 있었고 중심에는 붉은 실 같은 마력이 모여 있었다.
윤서연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게이트 장치와 비슷해요."
"비슷한 게 아니라 같은 계통이다."
"도현 씨가 어떻게 알아요?"
루시펠은 대답하지 않았다.
중심 핵에서 흘러나온 명령이 전력망을 타고 골목 아래로 번지고 있었다. 명령은 단순히 문을 여는 데 그치지 않았다.
찢어라.
나와라.
눈앞의 인간을 공격하라.
마왕교는 자신의 문양을 훔쳐 마수에게 달아 놓았다. 이번에는 그 문양을 전선에 심어 지구의 전력을 마력으로 바꾸고 있었다.
루시펠의 손가락이 굳었다.
"도현 씨?"
윤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변전함 안쪽의 돌을 향해 마력을 흘렸다. 붉은 맥박이 잠깐 멎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지하에서 더 큰 파동이 솟구쳤다.
아스팔트가 갈라졌다.
골목 가장자리의 맨홀 뚜껑이 튀어 올랐다. 검은 연기가 땅속에서 솟아나며 원 안의 세 뿔을 그렸다.
"전부 뒤로!"
윤서연이 외쳤다.
그녀의 화염이 골목을 가로질렀다. 주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건물 안으로 뛰어갔다. 한도윤이 아이를 안고 계단으로 물러났고 배지훈이 문을 닫았다.
골목 바닥의 균열은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만큼 벌어졌다.
그 안쪽에서 붉은 빛이 올라왔다.
검은 틈은 곧 문이 됐다.
게이트의 표면은 유리처럼 흔들렸지만 그 너머에 보이는 것은 어두운 동굴이었다. 바닥에는 검은 돌이 박힌 제단이 있었고 제단 앞에는 로브를 걸친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변전함에 박힌 세 돌이 문을 여는 열쇠라면 제단 주변의 돌들은 문을 붙들어 두는 못처럼 보였다. 게이트가 커질수록 제단의 돌에서도 붉은 빛이 번졌다.
"마왕님의 길이 열립니다."
한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
"전력의 흐름을 바쳐라. 이 땅의 불빛을 모두 꺼라."
루시펠은 게이트 밖에 서서 그 말을 들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마왕교의 명령은 선명했다. 인간들의 불빛을 끄고 마계의 문을 연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마수를 보내 이 세계를 바꾼다.
루시펠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도현 씨!"
윤서연의 화염이 옆에서 폭발했다.
게이트 표면에서 작은 마수가 튀어나왔다. 네 발로 기어 나온 검은 짐승은 이빨을 드러내며 주민들이 숨은 건물 쪽으로 몸을 틀었다.
윤서연이 불꽃 창을 던졌다. 하지만 마수의 몸을 감싼 막이 불꽃을 비틀어 튕겨 냈다. 창은 벽을 스치고 깨졌다.
"마력이 너무 진해요!"
윤서연은 주민들을 등진 채 양손을 펼쳤다. 그녀의 발밑에 불꽃 고리가 생겼다. 불길은 충분히 컸지만 마수를 태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마수는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다.
루시펠의 주머니 속 검은 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숨을 짧게 내쉬었다. 권능을 크게 쓰면 이곳의 마력 측정 장비에 흔적이 남는다. 아직 장비가 보이지 않아도 협회가 곧 올 터였다. 정체를 감추려면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했다.
하지만 마수가 건물 쪽으로 달려가면 윤서연의 불꽃은 주민들까지 휘말릴 수 있었다.
루시펠은 시선을 마수에게 고정했다.
멈춰라.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명령은 눈빛보다 가느다란 마력으로 바닥에 스며들었다.
마수의 앞발이 허공에서 굳었다.
녀석은 몸을 앞으로 던진 자세 그대로 떨었다. 윤서연의 불꽃 고리가 바닥을 타고 번져 마수의 다리를 휘감았다.
"지금이에요!"
윤서연이 손을 움켜쥐었다.
화염이 터졌다.
마수는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녀석의 몸 안쪽에 새겨진 세 뿔 문양이 붉게 빛나며 불꽃을 밀어냈다.
루시펠은 문양을 보자 눈을 가늘게 떴다.
마수에게 들어간 명령은 변전함 안의 중심 핵과 이어져 있었다. 핵을 부수지 않으면 게이트가 계속 커진다. 반대로 지금 여기서 핵을 꺾으면 마력의 역류가 전신주와 원룸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었다.
그는 게이트 안쪽을 바라봤다.
제단 주변에는 검은 돌이 열두 개나 박혀 있었다. 로브를 입은 신도 둘은 아직 그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게이트 밖의 마수 하나가 인간의 불꽃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도현 씨. 뒤로 가요!"
윤서연이 외쳤다.
루시펠은 그녀를 돌아봤다.
"밖을 맡아라."
"뭐라고요?"
"안에 있는 장치를 끊으면 된다."
"혼자 들어가겠다는 말이에요? 말도 안 돼요. 저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잖아요."
"나는 안다."
그는 말을 멈췄다.
윤서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손에 불꽃을 두른 채 게이트와 루시펠을 번갈아 봤다.
"도현 씨는 대체 뭐예요?"
루시펠은 잠시 생각했다.
헌터라고 하기에는 마왕에 가까웠고 마왕이라고 말하기에는 이곳의 인간들이 너무 시끄러웠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 자신의 정체보다 전기를 먼저 되찾고 싶었다.
"전기가 필요한 사람이다."
윤서연의 얼굴이 굳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골목 뒤에서 또 다른 울음소리가 들렸다. 게이트 안쪽의 어둠이 넓어지고 있었다.
루시펠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불꽃이 닿지 않는 게이트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표면이 그의 앞에서 물처럼 갈라졌다.
윤서연이 손을 뻗었다.
"도현 씨! 혼자 들어가면 안 돼요!"
루시펠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 방의 불을 켜고 돌아온다."
그가 게이트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바깥의 소리가 끊겼다.
어둠 너머에서 수십 개의 붉은 눈이 동시에 떠졌다.
제단 앞의 신도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냐?"
루시펠은 검은 동굴 바닥에 발을 내려놓았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마지막으로 한 번 지직거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한 뒤 차갑게 중얼거렸다.
"게임을 다시 켜야 한다."
붉은 눈들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