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없이 세계 최강 네크로맨서

9화: 첫 번째 외주
카엘은 은판 위에 마지막 선을 그었다.
푸른 선은 원을 만들지 않았다. 영혼을 가두는 대신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을 남겼다. 그는 길의 폭을 세 번 확인한 뒤 은판 가장자리에 숫자를 새겼다.
"퇴로 룬의 반응 시간과 선택 여부를 함께 기록할 수 있겠네요."
엘레나는 최상급 청휘석 가루가 담긴 작은 병을 흔들었다. 병 바닥에는 손톱만 한 가루만 남아 있었다.
"계약 증명에 쓰기에는 부족해요. 공개 검증을 한 번만 해도 채널이 과열될 겁니다."
"그럼 검증을 한 번에 끝내면 됩니다."
"그런 말은 보통 위험하다는 뜻인데요."
"재료가 부족한 채 무리하는 쪽이 더 위험합니다."
그때 공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청동 방어 인형 하나가 문 앞으로 걸어갔고 카엘이 손가락을 들자 멈췄다.
문밖에는 젖은 외투를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장화에는 밤길의 진흙이 묻어 있었다.
"카엘 로엔 씨를 찾습니다. 청휘석 상단의 마리안 케르입니다."
카엘은 문을 반쯤 열었다.
"상단주께서 사환술사의 공방을 직접 찾아오는 일은 흔하지 않군요."
"오늘 밤 북문 교역로를 지나야 합니다. 호위병 둘이 다쳤고 길목의 마수들이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어요. 아카데미에서 당신이 사람을 살리는 인형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엘레나가 안경을 고쳐 썼다.
"누가 말했죠?"
"평가장에 있던 학생들입니다. 은빛 기사와 함께 죽은 기사를 쓰러뜨렸다고요."
레오노르가 작업대 옆에서 돌아섰다.
"나는 죽은 기사가 아니다."
마리안의 시선이 여성형 기사 프레임에 멈췄다. 놀란 기색은 있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좋습니다. 상단은 시체를 끌고 다니는 호위는 원하지 않아요."
그녀가 내민 장부에는 청휘석 운송량과 북문 통행 허가가 적혀 있었다.
"대가는요."
"최상급 청휘석 두 병입니다. 무사히 도착하면 운송 대금의 절반도 드리죠."
카엘은 은판과 청동 방어 인형 세 기를 차례로 보았다.
"조건을 먼저 정하겠습니다."
"돈보다 조건입니까."
"조건이 맞지 않으면 돈을 받아도 손해니까요."
카엘은 인형 세 기의 태엽을 감았다. 내부의 작은 톱니가 차례로 맞물렸다.
"기본 경계와 보호 루틴을 가진 인형들입니다. 제가 모든 움직임을 직접 명령하지 않아도 범위 안에서 판단합니다. 다만 사람을 쫓거나 경계 밖으로 나가지는 않습니다."
마리안이 미간을 좁혔다.
"마수가 도망쳐도요?"
레오노르가 검집을 들어 올렸다.
"항복한 자는 베지 않는다. 도망치는 마수도 쫓지 않는다."
"당신이 의뢰한 것은 추격이 아니라 통행입니다."
카엘이 덧붙였다.
"부상자와 화물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마리안은 장부 뒷장에 조건을 적었다.
"좋습니다. 제가 본 대로 증언하겠습니다. 인형이 스스로 움직였다는 사실까지요."
카엘은 공방 문 앞의 종지기를 돌아봤다.
"종지기께서는 공방을 지켜 주십시오."
가고일이 날개를 반쯤 폈다.
"사람이 오면 종을 울린다. 검은 실이 오면 막는다."
"범위를 넘지 마십시오."
"알고 있다."
카엘은 레오노르와 엘레나를 데리고 공방을 나섰다. 태엽 인형 세 기는 마차 뒤쪽에 매달렸다.
북문 교역로는 비가 그친 뒤라 진흙투성이였다. 마차가 깊게 팬 바퀴 자국을 지날 때마다 청휘석 상자가 안에서 부딪혔다.
임시 야영지의 호위병들은 작은 청동 인형을 보고 웃었다.
"이게 호위라고? 태엽을 감으면 세 걸음은 걷겠군."
카엘은 바퀴 자국 사이에 얇은 분필선을 그었다. 첫 번째 인형은 마차 앞에 섰고 두 번째 인형은 뒤쪽 바퀴에 몸을 붙였다. 세 번째 인형은 부상자들이 누운 천막 옆에 멈췄다.
"누구도 인형을 옮기지 마십시오."
호위병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마수가 오면 저 조그만 게 뭘 할 수 있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보다 많을 수도 있다."
레오노르의 대답에 호위병은 입을 다물었다.
카엘은 진흙을 살폈다. 마수 발자국은 모두 야영지를 향했지만 깊이가 일정하지 않았다.
엘레나가 청휘석 렌즈를 댔다.
발자국 아래에서 검은 빛이 번졌다. 카엘은 조각칼 끝으로 진흙을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은빛 조각이 흙 속에서 끌려 나왔다.
"검은 은실입니다."
카엘은 조각을 유리병에 넣었다. 병 안의 은실은 바깥을 향해 꿈틀거렸다.
"평가장과 가문 서신에서 나온 파형과 같습니다."
마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마수들이 이 길로 몰린 게 누군가의 짓이라는 말입니까?"
"은실이 움직임을 이쪽으로 유도한 것 같습니다. 누가 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카엘은 현장의 발자국과 파형만 기록했다. 본가 소명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엘레나가 입 밖에 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추측은 적지 마십시오. 증거가 말하게 해야 합니다."
그는 인형 세 기의 경계 조건을 조정했다.
"사람이 쓰러지면 보호한다. 불붙은 물건은 화물에서 떼어 낸다. 경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인형들의 가슴 안쪽에서 작은 청동판이 차례로 울렸다.
레오노르가 장검을 뽑았다.
"온다."
어둠 저편에서 낮은 울음이 겹쳐졌다. 나뭇가지가 꺾이고 진흙이 튀었다.
마리안이 소리쳤다.
"모두 마차 쪽으로!"
첫 번째 마수가 불붙은 화살을 물고 달려왔다. 화살은 마차 위 청휘석 상자를 향했다.
청동 인형 하나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작은 방패가 펼쳐지며 화살을 받아 냈다. 불꽃이 방패를 핥았지만 인형은 밀리지 않았다.
양옆의 어둠에서 마수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두 번째 인형은 바퀴 아래로 몸을 밀어 넣었다. 톱니가 거칠게 돌아가며 바퀴를 붙들었다. 기울던 마차가 멈췄다.
세 번째 인형은 천막 옆으로 달려갔다. 쓰러진 호위병의 팔을 갈고리로 걸어 방패 뒤로 끌어냈다.
호위병 하나가 인형을 옮기려 했다.
카엘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사람이 죽게 생겼다!"
"그래서 더 움직이면 안 됩니다."
마수가 첫 번째 인형의 방패를 물어뜯었다. 청동 이가 긁히며 불꽃이 튀었다. 인형은 방패를 비틀어 놈을 진흙 위에 내동댕이쳤다.
레오노르의 검이 번쩍였다. 그녀는 쓰러진 마수의 앞발만 베어 움직임을 끊었다. 목은 노리지 않았다.
"도망치게 두어라."
"죽이지 않으면 다시 옵니다!"
"계약 범위 밖으로 나가면 당신의 의뢰가 바뀐다."
레오노르는 검끝으로 마수의 방향을 숲 쪽으로 돌렸다. 마수는 상처 입은 다리를 끌며 달아났다.
그때 커다란 마수가 마차와 인형 사이를 뛰어넘었다. 목 안쪽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카엘의 압력계 바늘이 검은 파형을 가리켰다.
"목을 보십시오."
레오노르는 마수의 턱을 검등으로 밀어 올렸다. 카엘은 조각칼로 목 안쪽의 검은 은실을 끊었다.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마수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주변의 무리도 방향을 잃고 서로 부딪혔다.
청동 인형 세 기는 마차와 사람 사이에 선 채 더 움직이지 않았다.
마리안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인형들은 당신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조건을 받았을 뿐입니다."
카엘은 유리병 속 은실을 확인했다.
"저 마수는 누군가에게 움직임을 빌려준 겁니다."
레오노르는 피가 묻지 않은 검을 거두었다.
"이것도 검은 사슬이다."
"이번에는 끊었습니다."
"누가 묶었는지는 모른다."
"확인하겠습니다."
발자국은 숲 안쪽의 좁은 길에서 끊겼다. 바위 옆으로 검은 가루가 이어져 있었다.
마리안이 카엘의 앞을 막았다.
"의뢰 범위는 상단을 교역로까지 데려가는 것입니다. 더 들어가면 계약 밖입니다."
카엘은 걸음을 멈췄다. 증거를 더 찾고 싶었지만 의뢰인의 안전을 먼저 지켜야 했다.
"상단은 여기서 밤을 넘길 수 있습니까."
"인형들이 있는 동안은 가능합니다."
"그럼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카엘은 세 번째 인형의 태엽을 확인했다. 톱니 하나가 휘었지만 아직 움직일 수 있었다.
레오노르가 숲을 바라봤다.
"나는 표식만 확인하겠다. 사람을 두고 가지 않는다."
"열 걸음 안쪽까지만 갑니다."
두 사람과 엘레나는 마차에서 멀어지지 않는 선까지 다가갔다. 바위 밑에는 검은 선이 원을 이루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봉인 파형이 눌러 찍혀 있었다.
엘레나가 렌즈를 비췄다.
"가문 서신의 긁힌 자국과 같은 계열이에요. 수습관이 쓰는 표식과 닮았습니다."
카엘은 표식에 손대지 않았다. 청동 인형의 집게로 주변 흙만 걷어 내자 작은 황동 조각이 드러났다.
"해체하지 않으세요?"
"현장을 바꾸면 증거가 아니라 제 물건이 됩니다."
그는 조각을 밀폐 상자에 넣었다.
새벽빛이 산등성이를 물들일 무렵 마리안은 장부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제가 본 것을 적었습니다. 태엽 인형 세 기가 각자 움직였고 카엘 로엔 씨는 직접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레오노르 경은 도망치는 마수를 베지 않았고 화물은 무사했습니다."
마리안은 자신의 이름을 적고 손바닥으로 잉크를 눌렀다.
"약속한 청휘석입니다."
최상급 청휘석 두 병이 카엘의 손에 놓였다. 그는 병을 엘레나에게 건넸다.
"계약 증명에 사용하겠습니다."
"이제 재료가 생겼네요."
"재료만 생긴 건 아닙니다."
카엘은 증언서와 검은 은실이 든 유리병을 보았다.
"본가 소명에서 보여 줄 사람이 생겼습니다."
공방으로 돌아왔을 때 종지기가 문 앞에서 종을 한 번 울렸다. 문틈에는 새 봉투가 놓여 있었다.
이번 봉투의 밀랍은 붉은색이었다. 봉인 위에는 로엔 가문의 사슴 문장이 눌려 있었다.
엘레나가 얼굴을 굳혔다.
"붉은 밀랍은 가문 소명 일정 변경 통지에 쓰는 색입니다."
카엘은 봉투에 손대지 않고 정화 룬을 그렸다. 푸른 불꽃이 밀랍을 훑자 날카로운 진동이 튀어 올랐다.
레오노르가 검자루를 잡았다.
카엘은 증언서와 청휘석을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사흘이 아니군요."
그는 붉은 봉인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저들이 기다려 주지 않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