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막내아들은 펀드를 너무 잘함

1화: 눈을 뜬 곳은 1994년이었다
눈을 뜨자 흰 천장이 보였다.
한도윤은 숨을 들이켰다. 가슴 안쪽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목에는 마른 피가 붙어 있었고 오른팔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마지막 기억은 인수전 회의실이었다.
계약서 마지막 장에 서명하기 직전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그 뒤에 들린 굉음과 쏟아진 유리 파편까지는 기억났다. 그 다음은 없었다.
‘병원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어깨가 먼저 움직였다. 손바닥이 낯설었다. 펀드 운용 보고서를 수천 장 넘기며 굳은살이 박였던 손이 아니었다. 손가락은 지나치게 가늘었고 손목에는 어린아이처럼 옅은 흉터가 있었다.
침대 옆 탁자에는 물컵과 신문이 놓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병원 건물 대신 잘 다듬은 정원과 낮은 담장이 보였다. 서울 강남의 저택에 딸린 회복실처럼 보였다.
신문 가장자리에는 날짜가 인쇄되어 있었다.
1994년 6월 14일.
한도윤은 날짜를 세 번 읽었다. 숫자가 바뀌지 않았다.
“도련님?”
문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셨어요?”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문이 열렸다. 회색 앞치마를 두른 중년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한도윤을 보자마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서준 도련님. 회장님께 바로 말씀드릴게요.”
서준.
그 이름이 귀에 걸렸다. 여자는 그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복도로 나갔다. 잠시 뒤 멀리서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한도윤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바닥에 닿은 카펫이 낯설었다. 벽 한쪽에 세워진 전신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속에는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마른 체격에 창백한 얼굴. 눈매는 한도윤보다 둥글었고 머리카락은 목덜미에 닿을 만큼 길었다.
그는 거울 속 얼굴을 만졌다. 거울 속 남자도 똑같이 움직였다.
“누구야, 너는.”
입에서 나온 목소리마저 달랐다. 낮고 쉰 한도윤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직 변성기가 끝나지 않은 듯한 소리였다.
그때 탁자 위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첫 면에는 환율과 금리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대한그룹이 동남아 사업을 넓히며 외화 차입을 늘렸다는 기사가 작은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대한그룹.
한도윤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2026년의 시장에서도 대한그룹은 오래된 대기업으로 남아 있었다. 펀드매니저였던 그는 대한그룹 계열사의 인수 검토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의 회장은 사진 속 늙은 남자와 다른 이름이었다.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중년 여자가 들어왔다. 단정한 옷차림의 그녀는 한도윤을 보자 눈시울부터 붉혔다.
“서준아.”
그 한마디에 머리가 울렸다.
낯선 장면이 스쳤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 같은 현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울던 아이. 향수 냄새가 나는 옷자락. 그리고 같은 목소리.
엄마.
몸에 남은 기억은 거기까지만 이어졌다.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강서준이 어떤 생각으로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여자가 어머니라는 사실만 손끝의 떨림으로 전해졌다.
“많이 아프니?”
그녀가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한도윤은 물러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 손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 자신이 타인의 삶을 훔쳤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괜찮아요.”
대답이 먼저 나왔다.
어머니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
“다행이다. 의사 선생님이 며칠 쉬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 아버지도 네가 깨어났다는 말은 들으셨고.”
아버지.
한도윤은 침대 옆에 놓인 지갑을 집었다. 안에는 학생증이 있었다.
대한대학교 경제학과. 강서준. 스무 살.
학생증 뒷면에는 저택 주소가 찍혀 있었다. 그는 다시 가족사진을 보았다. 넓은 거실 중앙에 앉은 노년의 남자. 양옆에는 정장을 입은 두 아들과 딸이 서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대한그룹 회장 강문식이라고 적혀 있었다.
자신은 그 남자의 막내아들이었다.
“오늘 저녁에는 다 같이 먹자. 회장님이 직접 보자고 하셨어.”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서준이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 질문에 답하듯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어린 투로 말했다.
“저 오늘은 좀 쉬면 안 돼요?”
어머니가 작게 웃었다.
“또 아버지 피하려고 하지 말고.”
이 짧은 말에도 몸은 기억을 품고 있었다. 회장 앞에서는 입을 다물고 형들이 경영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리를 피하고 돈 이야기가 나오면 모르는 척하는 습관.
강서준은 이 집에서 철없는 막내였다.
한도윤은 그 역할이 처음으로 고마웠다. 모두가 그를 무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이상한 질문을 해도 실수로 넘길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간 뒤 그는 지갑을 다시 열었다. 현금은 많지 않았다. 재벌가 막내라 해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통장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학생증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몸과 이름 그리고 머릿속 기억뿐이었다.
저택 복도에는 사람이 많았다.
한도윤은 물을 마시러 나왔다고 둘러댔다. 관리인은 의심하지 않았다. 강서준이 원래도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사람이라는 듯했다.
서재로 향하는 길에 그는 벽에 걸린 가족사진들을 살폈다. 강문식 회장의 창업 시절 사진. 대한전자 공장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 해외 건설 현장의 준공식.
그룹은 거대했다. 그러나 거대한 회사일수록 돈이 움직이는 길도 길었다.
‘확인할 수 있는 공개 정보부터 찾자.’
서재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안쪽에 사람이 있다는 기척은 없었다. 한도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 펼쳐진 신문과 경제 잡지를 훑었다.
금리는 오르고 있었다. 기업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공장과 해외 사업에 쏟아붓고 있었다. 외화로 빌린 돈은 원화로 벌어 갚아야 했다. 평소에는 작은 차이처럼 보이는 환율이 움직이면 장부의 숫자가 달라진다.
그는 기사를 내려놓았다.
기억 속 1997년에는 달러를 구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줄을 이었다. 평소라면 연장될 차입금이 한꺼번에 돌아왔고 은행은 담보를 요구했다. 기업이 돈을 벌고 있는지는 두 번째 문제였다. 당장 갚을 현금이 없으면 멀쩡한 공장도 넘어갔다.
‘1997년.’
한도윤은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3년 남짓이었다.
2026년의 기억이 맞다면 대한그룹도 그 바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기억은 큰 흐름만 알려 줄 뿐이다. 어느 계열사가 먼저 흔들리는지 어떤 계약이 손실로 돌아오는지 지금의 대한그룹이 어디까지 달라졌는지는 모른다.
서재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도윤은 책장 옆으로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리고 세 남자가 들어왔다. 가장 앞에 선 남자는 가족사진에서 본 강문식 회장이었다. 굵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웠지만 불은 붙이지 않았다.
뒤에는 삼십 대 중반의 남자가 있었다. 반듯한 수트와 자신감 있는 표정. 학생증 속 가족사진에서 보았던 장남 강태준이었다.
마지막 남자는 낡은 만년필을 들고 있었다. 온화한 얼굴의 민기혁 전략실장이었다.
“홍콩 법인 만기가 석 달 남았습니다.”
민기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갱신하면 됩니다.”
강태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은행 쪽에서도 같은 조건을 줄 겁니다. 이번 분기 실적이 나오면 말이 달라집니다.”
강문식의 시선이 서류 위에 멈췄다.
“환율이 더 움직이면?”
“그 정도 변동은 감당할 수 있습니다.”
태준은 자신 있게 말했다. 민기혁은 서류 한 장을 넘기며 조용히 덧붙였다.
“해외 사업에서 들어올 대금도 예정대로라면 문제없습니다.”
예정대로라면.
한도윤은 그 말에 시선이 멈췄다. 금융에서 그 두 단어는 가장 비싼 단서였다. 대금이 늦어질 수 있고 환율이 변할 수 있으며 계약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서준이는요?”
태준이 물었다.
“대학이나 다니게 두시죠. 이런 이야기를 알아들을 애도 아니고요.”
한도윤은 책장 뒤에서 숨을 죽였다. 강서준에 대한 평가가 예상보다 편했다. 아무도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는 부르겠다.”
강문식이 말했다.
“왜 갑자기요?”
“깨어났다지 않느냐. 얼굴은 봐야지.”
그 말은 다정하지 않았다. 면접을 보겠다는 사람의 말투에 가까웠다.
세 사람은 서류를 챙겨 나갔다. 민기혁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기 전에 서재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한도윤은 고개를 숙인 채 책장 그림자 속에 머물렀다.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그는 책상으로 나왔다.
서류를 훔쳐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그런 행동은 정보가 아니라 흔적이었다.
대신 신문을 다시 집었다. 기사 속 숫자들은 작고 평범했다. 그러나 그는 숫자가 평온한 얼굴로 위험을 숨기는 순간을 너무 많이 보아 왔다.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도윤은 오랫동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 강서준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한도윤은 그 얼굴이 부러웠다. 세상에는 아직 외환위기가 오지 않았고 자신은 사고로 죽지 않았으며 내일의 주가도 결정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신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 차이가 중요했다.
미래를 안다고 떠들면 미친 사람이 된다. 정확한 가격을 말하면 조작꾼으로 의심받는다. 가족에게 1997년의 파국을 경고하면 출처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대학 강의 노트와 펜이 들어 있었다. 빈 종이를 한 장 꺼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미래의 사건을 줄줄이 적는 순간 자신이 기억에 끌려다니기 시작할 것 같았다.
지금 필요한 건 예언이 아니었다.
현재의 장부와 사람 그리고 계약이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도련님. 저녁 식사 준비됐습니다.”
“아버지가 부르셨어요?”
“네. 회장님께서 오늘은 꼭 참석하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뒤 관리인이 말을 덧붙였다.
“돈이 어디로 흐르는지 물어보시겠다고 하던데요.”
한도윤은 문고리를 잡았다.
방금 전 서재에서 들은 대화가 떠올랐다. 홍콩 법인의 만기. 예정대로 들어온다는 해외 대금. 환율이 더 움직이면 감당할 수 있다는 장남의 목소리.
그는 그 모든 단서를 머릿속에만 남겼다. 지금의 자신에게 종잣돈은 없고 정보망도 없었다. 그나마 가진 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막내라는 가면뿐이었다.
“갈게요.”
문을 열자 복도 끝에 저녁 불빛이 번지고 있었다.
강서준의 몸으로 살아남으려면 먼저 강서준처럼 보여야 한다. 한도윤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만들며 식당으로 걸었다.
다만 발걸음 안쪽에서는 다른 계산이 시작되고 있었다.
1997년까지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