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로 돌아왔더니 아기 헌터? ― 성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중입니다

5화: 월세 걱정은 끝이다
창살 틈새로 부서지는 아침 햇살이 방 안을 비췄다.
무진은 느리게 눈을 떴다. 밤새 뒤집기를 성공시킨 여파로 온몸의 작은 관절들이 뻐근했다. 그래도 가슴 한가운데에 맺힌 미약한 마력 핵이 조용히 순환하며 근육의 피로를 풀어 주고 있었다.
‘아침인가.’
무진은 고개를 슬그머니 옆으로 돌렸다.
침대 곁 바닥에 놓인 낡은 원목 책상 앞에 연희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밤을 거의 꼬박 새운 모양인지 눈 밑에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플라스틱 계산기와 손때 묻은 공책 그리고 몇 장의 고지서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탁. 탁. 탁.
조용한 방 안에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연희는 볼펜 끝을 입술에 댄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달 숙소 월세가 백이십만 원…… 길드 등록 유지비가 삼십만 원…….”
그녀의 시선이 옆에 놓인 노란색 고지서로 향했다.
[한국헌터협회 서울지부: E급 게이트 외곽 통제선 파손에 따른 긴급 보수 변상금 청구서]
청구된 금액은 삼백오십만 원이었다.
“게이트 수리비까지 합치면 당장 이번 주에 나가야 할 돈만 오백만 원이 넘네…….”
연희는 마른 세수를 했다. 붕대를 감은 그녀의 손등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담 길드는 이름만 길드일 뿐 연희를 포함해 세 명의 저등급 헌터가 간신히 버티는 소형 모임이었다. 태성 길드 같은 거대 길드들이 수익성 좋은 던전을 싹쓸이하는 탓에 하급 게이트의 잔챙이 마수나 잡으며 연명해 왔다.
통장 잔고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이번 주 안에 월세를 내지 못하면 길드 사무실 겸 숙소로 쓰는 이 낡은 연립주택에서 당장 쫓겨날 판이었다.
“무진이 새 침대도 사 줘야 하고…… 좋은 옷도 입혀야 하는데…….”
연희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녀는 공책 귀퉁이에 적힌 숫자를 지우개로 문지르다 종이가 찢어지자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무진은 침대 난간 너머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생의 무진은 수많은 왕국과 제국을 구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황금과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대륙의 지배자들도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거두어 준 유일한 양어머니는 고작 몇백만 원이라는 푼돈 때문에 밤새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
무진의 눈빛이 엄숙하게 가라앉았다.
그때 연희가 인기척을 느끼고 급히 눈가를 훔치며 돌아보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무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언제 울었냐는 듯 화사하게 웃었다.
“우리 무진이 일어났어? 배고프지? 엄마가 얼른 따뜻한 물 끓여 올게!”
연희는 가계부를 황급히 덮어 서랍에 넣은 뒤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무진은 망설임 없이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시스템 창 개방.’
파아앗!
눈앞에 영롱한 푸른빛과 함께 익숙한 개인 채널 창이 떠올랐다.
[채널: 아기 헌터의 일기]
[현재 누적 후원금: 104,500,000 맘마 코인]
[채널 접속자 수: 42,000,000명]
아침이 되었음에도 채널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오히려 밤새 무진의 뒤집기 명장면을 돌려본 성좌들이 아침 출석 도장을 찍으며 채팅을 쏟아내고 있었다.
[성좌 ‘장미의 여왕’이 샛노란 햇살을 받으며 일어난 아기에게 감탄합니다!]
[성좌 ‘장미의 여왕’: 세상에! 자고 일어난 머리칼 뻗친 것 좀 봐! 우주가 뒤집힐 귀여움이야!]
[성좌 ‘은하의 제왕’: 흠흠! 위대한 존재의 기상은 아침 햇살보다 눈부신 법이지!]
[성좌 ‘밤하늘의 수호자’가 아침 기상 축하금 500,000 코인을 후원합니다!]
무진은 성좌들의 호들갑을 담담하게 넘기며 채널 하단의 메뉴를 훑었다.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정산 기능.’
화면 구석에 위치한 [후원금 정산 및 환전] 탭을 응시하자 새로운 안내창이 팝업되었다.
[안내: 맘마 코인은 채널 소유자의 거주 행성 공용 화폐로 1:1,000 비율 환전이 가능합니다.]
[보유 맘마 코인: 105,000,000 코인]
[환전 가능 금액: 105,000,000,000원 (일천오십억 원)]
일천오십억 원.
지구의 화폐 단위로 환산된 숫자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무진은 턱을 괴듯 앙증맞은 손으로 볼살을 받쳤다.
‘당장 천억을 전부 도담 길드 계좌로 꽂아 넣으면 어떻게 되겠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소형 길드의 통장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천억 원이 입금되는 순간 국세청과 헌터 협회는 물론이고 탐욕스러운 거대 길드들의 표적이 될 것이다. 게다가 갓난아기의 신분으로는 그 막대한 자금의 출처를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합법적이고 안전한 경로가 필요하다.’
무진이 고심하던 찰나 채팅창에 성좌들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좌 ‘은하의 제왕’: 무얼 고민하는가! 당장 지구라는 행성의 중앙은행을 통째로 사들이면 될 일 아닌가!]
[성좌 ‘장미의 여왕’: 맞아! 우리 아가한테 빚 독촉 고지서를 보낸 놈들의 목을 치고 황금 궁전을 지어 주자!]
[성좌 ‘침묵의 학자’: 진정하라. 현지 문명의 규율과 행정 시스템을 무시한 자금 유입은 아이의 보호자에게 세무 조사와 금융 동결이라는 재앙을 부를 뿐이다.]
‘역시 침묵의 학자가 가장 이성적이군.’
무진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 ‘침묵의 학자’가 정산 시스템의 세부 프로토콜을 제시합니다.]
[성좌 ‘침묵의 학자’: 시스템 내부의 [지구 헌터 복지 재단 연동 기부] 기능을 이용하라. 성좌 시스템이 공인한 합법적 익명 후원 경로다. 증여세와 소득세가 전액 사전 감면 처리되어 지급된다.]
무진의 눈이 반짝였다.
안내창을 넘기자 실제로 해당 항목이 존재했다.
[정산 방식: 한국헌터복지재단 공인 익명 특별 후원]
- 분류: 신생 유망 길드 긴급 육성 지원금
- 특징: 완벽한 신원 보호 증명서 발급, 세무 조사 면제, 합법적 즉시 입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경로였다.
이제 남은 것은 금액 설정이었다.
‘처음부터 수십억을 보내면 연희가 기절할지도 모른다. 우선 당장 필요한 빚을 갚고 길드를 안정시킬 만큼만 보낸다.’
무진은 송금액을 50,000 맘마 코인으로 설정했다.
[환전 금액: 50,000 맘마 코인 → 50,000,000원 (오천만 원)]
[수취 대상: 도담 길드 공용 계좌 (대표: 연희)]
[최종 승인을 진행하시겠습니까?]
화면 중앙에 커다란 붉은색 [승인] 버튼이 나타났다.
문제는 신체였다.
무진은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짧고 통통한 오른팔을 힘겹게 뻗었다. 손가락 끝이 허공에 뜬 반투명 버튼에 닿을 듯 말 듯 흔들렸다.
‘끄응…….’
아기 몸의 짧은 팔길이는 마법보다 다루기 어려웠다.
채팅창이 다시 요동쳤다.
[성좌 ‘장미의 여왕’이 주먹을 꽉 쥡니다!]
[성좌 ‘장미의 여왕’: 닿아라! 우리 아가의 솜방망이 손가락아!]
[성좌 ‘은하의 제왕’: 전 우주의 중력을 동원해서라도 버튼을 당겨 오고 싶구나!]
[성좌 ‘밤하늘의 수호자’가 숨을 멈추고 화면을 응시합니다!]
무진은 가슴속 마력 핵을 미세하게 진동시켰다.
손끝에 작은 힘이 실렸다. 무진은 호흡을 가다듬고 단호하게 손을 내질렀다.
“뺙!”
삑-!
앙증맞은 손가락 끝이 허공의 [승인] 버튼을 정확하게 내리눌렀다.
[정산이 정상적으로 승인되었습니다.]
[50,000 맘마 코인이 차감되었습니다.]
[도담 길드 공식 계좌로 50,000,000원이 성공적으로 송금되었습니다.]
[잔여 맘마 코인: 104,950,000 코인]
[성좌 ‘은하의 제왕’이 호탕하게 웃으며 축포를 쏩니다!]
[성좌 ‘장미의 여왕’이 첫 송금 기념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성좌 ‘침묵의 학자’가 만족스러운 듯 안경을 고쳐 씁니다.]
무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털썩 엎드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했을 뿐인데 등줄기에 땀이 맺혔다. 그래도 가슴 한구석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연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젖병을 들고 들어왔다.
“무진아 기다렸지? 엄마가 분유 타 왔…….”
띠링-! 띠링-! 띠링-!
갑자기 연희의 주머니 속에 있던 낡은 스마트폰에서 요란한 알림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연희는 깜짝 놀라 젖병을 책상에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어머 뭐지? 협회에서 벌써 독촉 전화가 온 건가……?”
그녀가 화면을 켠 순간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KB국민은행 입금 알림]
- 도담길드(연희) 계좌
- 입금액: 50,000,000원
- 입금자: 한국헌터복지재단(익명지정후원)
- 잔액: 50,012,400원
연희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오…… 오천만 원……?”
연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화면을 몇 번이고 문질렀다.
영이 하나 더 붙은 건지 보이스피싱 사기 문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헌터 협회 공인 인증 앱을 열어 세부 내역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명확한 공문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헌터 복지 재단 공인 확인서]
- 본 지원금은 익명의 독지가가 도담 길드의 헌신적 활동과 유망성을 높이 평가하여 지정 기부한 합법적 육성 기금입니다.
- 증여세 및 제세공과금 처리가 완료되었으므로 길드 운영 및 구성원 복지에 자유롭게 사용 가능합니다.
“진짜야…….”
연희의 다리가 풀렸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월세 백이십만 원. 게이트 파손 변상금 삼백오십만 원. 길드 유지비 삼십만 원.
길드원들의 목을 죄어 오던 모든 빚을 갚고도 사천만 원이 넘는 거금이 남았다. 이제 길드 사무실에서 쫓겨날 걱정도 당장 내일 먹을 쌀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흐윽…… 흑…….”
연희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밤새 혼자 짊어져야 했던 무게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눈물이었다.
연희는 기어가듯 침대 곁으로 다가가 무진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무진아…… 우리 안 쫓겨나도 돼…….”
연희는 떨리는 입술로 무진의 볼에 얼굴을 묻었다.
“엄마가 우리 무진이……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분유 먹이면서 키울 수 있게 됐어…… 정말 다행이야…….”
따뜻한 눈물이 무진의 볼을 적셨다.
무진은 작고 통통한 손을 들어 올려 연희의 등을 토닥였다. 비록 힘없는 아기의 손짓이었지만 연희를 위로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래. 이제 월세 걱정은 끝이다.’
전생에 마왕을 베었을 때도 이토록 가슴이 벅차오른 적은 없었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고 안도하는 미소를 지켜보는 일. 그것이 자신이 이 세계에 돌아와 얻은 가장 위대한 승리처럼 느껴졌다.
[성좌 ‘장미의 여왕’이 눈물바다가 된 방을 보며 코를 훌쩍입니다.]
[성좌 ‘은하의 제왕’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옷깃을 여밉니다.]
[성좌 ‘밤하늘의 수호자’가 따뜻한 가정의 평화를 축복합니다.]
연희는 눈물을 닦고 무진의 볼에 연신 뽀뽀를 퍼부었다.
“우리 무진이가 복덩이야. 네가 우리 집에 오고 나서 모든 게 다 잘 풀리는 것 같아.”
무진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부릉-!
연립주택 아래 골목길에서 묵직한 외제차의 엔진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이어 낡은 계단을 쿵쾅거리며 올라오는 불길한 구두 굽 소리가 도담 길드의 현관문 앞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쿵! 쿵! 쿵!
거친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오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담 길드 연희 길드장 안에 있나? 태성 길드에서 협의 차 나왔는데 문 좀 열어 보시지.”
무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불청객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