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로 돌아왔더니 아기 헌터? ― 성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중입니다

3화: 분유에 섞인 신성력
핑크빛 문양은 젖병의 둥근 몸을 타고 천천히 번졌다.
연희는 무진을 안은 팔을 조금 굳힌 채 젖병을 눈앞에 들어 올렸다. 평범한 분유였던 액체 안에서 별가루 같은 빛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이거… 상한 건 아니겠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젖병을 흔들었다. 빛은 흔들리는 대신 작은 장미 꽃잎처럼 둥글게 퍼졌다.
무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분유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이세계의 신전 깊은 곳에서나 맡을 법한 것이었다. 맑고 온순한데도 그 아래에는 산 하나를 깎아 낼 만큼 농축된 힘이 잠들어 있었다.
[성좌 ‘장미의 여왕’이 최상급 영약 분유를 후원했습니다!]
[성좌 ‘은하의 제왕’이 신화급 마력 정화수를 후원했습니다!]
[성좌 ‘침묵의 학자’: 유아 신체에 맞춰 농도를 낮췄다. 한 모금마다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농도를 낮췄다고 해도 저것은 영약이다.’
무진은 전생에 숱한 성좌의 선물을 보았다. 보기 좋은 상자 안에 독을 넣는 자도 있었고 은혜라는 이름으로 계약서를 들이미는 자도 있었다.
특히 지금의 몸은 갓난아기였다. 마력 회로는 얇은 실보다 약했고 고작 몸을 뒤척이는 일에도 숨이 찼다. 잘못된 힘이 밀려들면 회복은커녕 이 작은 몸이 먼저 망가질 수 있었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성좌의 채팅창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성좌 ‘장미의 여왕’: 우리 아가가 낯선 맛이라 경계하는구나! 너무 현명해!]
[성좌 ‘은하의 제왕’: 내가 성운 우유를 조금 더 보탤까?]
[성좌 ‘침묵의 학자’: 보태지 마라.]
[성좌 ‘장미의 여왕’: 은하의 제왕은 젖병에서 손 떼!]
‘네놈들이 젖병에 손을 댈 수 있는 것부터 문제다.’
무진은 허공을 노려보았다. 성좌들이 시스템 창 너머에서 우르르 물러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꼬르륵.
아주 거대한 울림이 그의 작은 배에서 터졌다.
무진의 표정이 굳었다. 전생의 마왕성에서 사흘을 굶었을 때도 이토록 비참한 소리는 내지 않았던 것 같다.
연희가 젖병과 무진을 번갈아 보더니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배고프지? 그런데 이상한 건 먹이면 안 되는데."
그녀는 젖병을 침대 곁 작은 탁자에 내려놓았다. 눈앞의 빛나는 분유를 아쉬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괜찮아. 엄마가 편의점까지 다녀와서 새로 타 올게. 무진이는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지?"
연희는 무진의 배 위에 손바닥을 살며시 올렸다. 게이트에서 마수를 막느라 쓸렸을 손등에는 붉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런 손이 무진의 속싸개를 다시 단정히 여며 주었다.
무진의 시선이 상처에 머물렀다.
고작 E급 게이트를 마치고도 그녀는 지쳐 있었다. 길드 가계부에는 밀린 월세와 수리비가 쌓여 있었다. 그런데도 낯선 아기를 위해 심야의 골목으로 나갈 생각부터 했다.
‘정말로 내게 뭘 바라지 않는 건가.’
전생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무진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많았지만 강무진 자신이 배고픈지 추운지 묻는 자는 없었다.
연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무진의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셔츠 자락을 붙잡았다.
힘이 없어 천 조각 하나도 제대로 쥐지 못했지만 연희는 움직임을 멈췄다.
"안 갈까?"
그녀가 작게 물었다.
무진은 젖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약의 결을 다시 살폈다. 탐욕이나 계약의 흔적은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많은 애정과 과보호의 기운만이 덕지덕지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속으로 짧게 결론 내렸다.
‘한 모금만 확인한다. 이상이 있으면 즉시 끊는다.’
무진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연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먹을래? 우리 무진이 착하다. 천천히 먹자."
그녀는 다시 침대 곁에 앉아 무진의 목을 정성스럽게 받쳤다. 젖병 꼭지가 입술에 닿기 전에도 온도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따뜻한 꼭지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무진은 숨을 고르고 첫 모금을 삼켰다.
달았다.
단순히 혀를 즐겁게 하는 맛이 아니었다. 차갑게 굳어 있던 뱃속으로 봄볕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분유가 목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작은 몸 곳곳에 잠들어 있던 감각이 하나씩 눈을 떴다.
[신성 영약 분유가 체내 잔류 마력을 정화합니다.]
[고갈된 마력 회로가 미세하게 복구됩니다.]
무진의 작은 손가락이 움찔했다.
두 번째 모금이 넘어가자 따뜻한 빛이 심장 부근에 닿았다. 전생에 그의 몸을 헤집었던 수많은 상처를 더듬듯 지나가던 빛이 검은 찌꺼기 하나를 찾아냈다.
아르카디아의 마지막 밤.
무너지는 마왕성의 천장과 귀환진을 집어삼키던 균열. 모든 마력을 짜내며 동료들을 탈출시킨 뒤 홀로 남았을 때의 통증이 번개처럼 되살아났다.
"으… 앵."
무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괜찮아? 너무 뜨거워?"
연희는 즉시 젖병을 뺐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무진을 가슴에 바짝 안아 올렸다. 등을 느리게 쓸어 내리는 손길이 급한 숨을 다독였다.
"괜찮아. 안 먹어도 돼. 배고픈 건 엄마가 다른 걸 찾아볼게."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렸지만 무진을 재촉하지 않았다.
무진은 그녀의 셔츠를 움켜쥔 채 숨을 골랐다. 통증은 분명했으나 파괴의 고통은 아니었다. 몸 안에 남아 있던 죽음의 잔재가 빠져나가며 난 상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주 작은 불씨가 남았다.
전생의 힘과 견주면 촛불보다도 못한 양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외부에서 빌린 힘이 아니라 분명 무진의 몸 안에 뿌리를 내리는 힘이었다.
그는 젖병을 향해 다시 시선을 들었다.
연희가 눈치채고 고개를 저었다.
"아파 보이는데 더 먹으면 안 돼."
무진은 고집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뺙."
성좌들의 채팅창이 폭발했다.
[성좌 ‘장미의 여왕’: 다시 먹겠다는 뜻이야? 세상에 우리 아가 용감해!]
[성좌 ‘은하의 제왕’: 그럼 내가 정화수를 열 병 더—]
무진은 필사적으로 손을 들어 허공을 휘저었다.
"뺙!"
[채널 소유자의 의사가 감지됩니다.]
[추가 영약 후원이 보류됩니다.]
[성좌 ‘은하의 제왕’: …그 손짓은 하지 말라는 뜻인가?]
[성좌 ‘침묵의 학자’: 그렇다.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라.]
[성좌 ‘장미의 여왕’: 그래. 우리 아가가 고른 것만 주자.]
무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앞으로 선물에는 기준을 둔다. 내 몸에도 연희에게도 위험한 짓은 허락하지 않는다.’
아직 말조차 못 하는 처지라 시스템이 알아듣는 손짓 하나에 기대야 했다. 그래도 첫 기준은 세워졌다.
연희는 무진이 다시 꼭지를 찾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젖병을 기울였다. 이번에는 아주 조금씩이었다. 무진도 급히 삼키지 않고 한 모금마다 몸속의 흐름을 살폈다.
마지막 한 방울이 넘어가자 핑크빛 문양이 젖병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정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미약한 마력 핵이 형성됩니다.]
[현재 상태: 갓난아기. 신체 성장 전까지 고위 마법의 사용은 불가능합니다.]
‘당연한 말이다.’
무진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가슴 한편이 묘하게 가벼웠다. 어제까지는 허기를 견디는 일조차 전생의 의지로 버텨야 했다. 이제는 손끝 하나에 아주 조금 힘을 모을 수 있었다.
연희는 텅 빈 젖병을 내려놓고 무진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댔다.
"열은 없네. 다행이다. 우리 무진이 배가 많이 고팠구나."
그녀는 빛났던 젖병을 몇 번이나 살피다가도 의아함을 입 밖으로 길게 꺼내지 않았다. 지금은 아이의 뺨에 조금 돌아온 혈색이 더 중요하다는 듯 무진의 볼을 쓰다듬었다.
무진은 그 손가락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우연한 경련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힘을 모으자 연희의 손가락이 분명하게 잡혔다. 작은 손이었지만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어머. 힘도 세네?"
연희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무진은 시선을 피했다. 고작 손가락을 쥔 일이 칭찬받을 만한 위업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상하게 뜨거운 것이 일었다.
‘지켜 주겠다고 했지.’
그 약속을 지키려면 우선 이 몸부터 움직여야 한다. 지구의 돈을 손에 넣고 길드를 지키는 일도 그다음이다.
연희는 무진을 침대에 눕힌 뒤 속싸개가 조이지 않도록 느슨하게 풀어 주었다. 그녀는 바로 옆 바닥에 이불을 깔고 앉아 빈 젖병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내일 아침에 새 젖병도 사자. 오늘은 엄마가 옆에 있을게."
무진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정화가 끝났다고 해도 작은 몸은 한꺼번에 밀려든 피로를 견디지 못했다.
연희는 잠든 줄 알았는지 이불 끝을 조용히 끌어올렸다. 그러면서도 손등의 상처가 닿지 않게 손바닥으로만 무진의 머리칼을 쓸었다.
"잘 자. 무서운 꿈 꾸면 엄마 불러."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귓가에 남았다.
무진은 눈을 감은 채 작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혼자라면 통증을 참고 회복할 방법부터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곁을 지켜 주겠다는 사람이 있다.
그 사실이 약해지는 이유가 아니라 더 빨리 강해져야 할 이유가 되었다.
무진은 대답 대신 팔을 침대 매트리스에 밀었다.
팔꿈치는 제멋대로 꺾이고 머리는 무거웠다. 그래도 몸통이 아주 조금 옆으로 기울었다. 전에는 시도조차 할 수 없던 움직임이었다.
[성좌들이 아기의 작은 움직임을 감지했습니다.]
[성좌 ‘장미의 여왕’: 방금 봤어? 우리 아가가 몸을 돌리려고 했어!]
[성좌 ‘은하의 제왕’: 전 우주에 축하 포고를—]
무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포고는 하지 마라.’
그러나 침대 위에서 다시 몸을 밀어 보려는 작은 발끝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에는 반드시 뒤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