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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1화

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

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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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죽은 이름으로 고른 밭

닭이 울기 전 진도겸은 눈을 떴다.

잠에서 깬 이유는 바깥의 소리가 아니었다. 낡은 초가의 서까래가 바람을 받아 세 번 떨리는 동안 그는 이미 문 쪽을 보고 있었다.

손은 이불 아래에서 멈췄다. 칼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오늘은 비어 있었다.

도겸은 손을 거두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새벽빛이 볏짚 사이로 가늘게 스며들고 있었다.

‘진도겸.’

며칠 전부터 쓰기 시작한 이름이었다. 장터의 서류에도 밭문서에도 그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죽은 살수 무영이 아니라 떠돌다 산골에 눌러앉은 농부 진도겸.

그는 이름을 되뇌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가 밖에는 계단밭이 펼쳐져 있었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밭은 세 단으로 나뉘었지만 밭고랑이라고 부를 만한 흔적은 두 곳뿐이었다. 나머지는 돌과 마른 억새와 검게 썩은 뿌리가 뒤엉켜 있었다.

도겸은 밭 아래에서부터 걸었다. 발뒤꿈치를 먼저 땅에 대고 발가락으로 흙의 밀도를 읽었다.

첫 단은 바싹 말라 있었다. 두 번째 단은 겉만 마르고 안쪽에 축축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가장 높은 세 번째 단은 돌이 많았지만 바람이 덜 들었다.

그는 각 단의 길이를 눈으로 재지 않았다. 열두 걸음, 열다섯 걸음, 열 걸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끝이 경사를 확인했다.

오래된 밭은 사람의 손길보다 먼저 물길을 기억한다. 물이 어디서 내려왔고 어디서 고였는지 알아야 고랑을 다시 낼 수 있다.

도겸은 세 번째 단의 북쪽 끝에 쪼그려 앉았다. 손가락으로 흙을 한 줌 집어 비볐다. 흙알 사이에 모래가 많았다. 물을 오래 붙잡지 못하는 땅이었다.

그런데 손바닥에 남은 냄새가 이상했다. 마른 흙에서는 나기 힘든 옅은 단내가 있었다.

도겸은 밭 가장자리의 바위 밑으로 몸을 낮췄다. 검게 굳은 물자국이 바위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손톱으로 긁어 보니 물자국은 폐광이 있는 서쪽 비탈을 향했다.

그는 혀끝에 흙가루를 대려다 멈췄다. 맛을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단맛이 난다고 지맥수라 부를 수도 없었다. 산속 광물이 녹은 물일 수도 있고 오래된 약초 뿌리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직은 모르겠군.”

혼잣말이 초가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도겸은 밭 위쪽에 박힌 말뚝을 뽑았다. 반쯤 썩은 말뚝은 힘을 주자 그대로 부러졌다.

그는 한동안 부러진 단면을 바라봤다. 힘을 많이 쓴 것도 아니었다. 나무가 먼저 죽어 있었다.

새 말뚝을 만들려면 마른 가지를 골라야 했다. 도겸은 초가 뒤에 쌓인 나뭇가지를 살폈다. 길이가 긴 가지 셋을 골라 칼 대신 작은 손도끼로 끝을 다듬었다. 손도끼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얇은 나무껍질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졌다.

과거의 손은 사람의 목을 찾는 데 익숙했다. 이제는 물이 새지 않을 경계를 찾아야 했다.

그는 세 번째 단의 북쪽과 동쪽에 말뚝을 박았다. 경계를 정한 뒤에야 괭이를 들었다.

첫 작업은 돌을 빼는 일이었다.


돌밭을 일구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도겸은 가장 큰 돌부터 치우지 않았다. 큰 돌 아래에 물이 머무는지 먼저 확인했다. 괭이 끝을 돌 옆 흙에 박고 손잡이를 아주 조금 비틀었다.

흙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 틈에 손가락을 넣어 돌의 깊이를 짚었다. 얕은 돌은 괭이로 들어 올리고 깊은 돌은 그대로 두었다. 깊은 돌을 무리해 뽑으면 밭의 경사가 흐트러진다. 작은 밭에서 한 번 무너진 경사는 비가 한 번만 와도 흙을 산 아래로 쓸어 보낸다.

도겸은 몸 안쪽의 기운을 손목으로 흘렸다. 아주 가느다란 힘이었다. 흙을 부수는 대신 돌 둘레의 굳은 틈만 느슨하게 만들었다.

무흔수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움직이는 손이었다. 칼날을 위한 기술이었지만 흙을 다룰 때도 쓸모가 있었다.

돌이 흔들렸다.

도겸은 괭이를 내리쳐 돌을 뽑아냈다. 손목 안쪽이 묵직하게 저렸다. 오래된 상처가 있는 팔꿈치까지 당겼다. 그는 기운을 더 밀어 넣지 않고 괭이를 땅에 세웠다.

돌 아래에는 말라붙은 뿌리가 엉켜 있었다. 그는 뿌리를 한꺼번에 끊지 않고 손으로 풀었다. 흙에 붙은 잔뿌리는 한쪽에 모았다. 언젠가 썩으면 밭으로 돌아갈 것들이었다.

해가 산등성이 위로 올라올 때까지 그가 옮긴 돌은 열세 개였다. 양손으로 들 수 있는 것만 골랐는데도 어깨가 뻐근했다.

도겸은 돌을 밭 밖으로 버리지 않았다. 낮은 곳에 반달 모양으로 쌓아 작은 둑을 만들었다. 둑이 생기면 물이 흘러내리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정오가 가까워졌을 때 도겸은 초가로 돌아가 조와 말린 무를 끓였다. 소금은 한 꼬집뿐이었다. 밥을 먹으며 그는 문서 꾸러미를 꺼냈다.

밭문서의 가장자리에는 이전 주인이 남긴 짧은 글이 있었다.

‘서쪽 물길은 막을 것.’

글씨는 번져 있었고 이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 도겸은 문서를 접어 품에 넣었다. 이 땅을 싼값에 넘긴 사람은 물길의 문제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낡은 경고 하나만으로 서쪽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초가 뒤로 갔다.

약초 찌꺼기와 낙엽이 쌓인 자리가 있었다. 지난주에 말라 죽은 풀을 베어 둔 곳이었다. 도겸은 그것들을 한곳에 모으고 부서진 볏짚을 위에 얹었다. 바닥에는 작은 돌을 깔아 물이 고이지 않게 했다.

회토를 만들 때는 많이 넣는 것보다 순서를 지키는 일이 중요했다. 마른 것과 젖은 것을 번갈아 쌓아야 안쪽이 썩는다. 지나치게 젖으면 썩는 대신 시큼한 냄새가 난다.

도겸은 손바닥으로 낙엽을 눌렀다. 수분이 부족했다. 그는 서쪽 물길의 검은 물자국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밭이 어떤 물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회토에 섞을 수는 없었다.

대신 초가 처마에 맺힌 물을 받았다. 양이 적어도 안전한 물이었다. 그는 물을 한 바가지씩 뿌리며 낙엽 더미를 뒤집었다.

손끝이 흙과 풀에 젖었다. 옷소매에도 검은 얼룩이 묻었다.

도겸은 그 얼룩을 한참 내려다봤다. 피가 아닌 흙이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해가 산 뒤로 기울 무렵 도겸은 울타리를 돌았다.

나무 울타리는 사람을 막기에는 허술했다. 멧돼지 한 마리만 몸을 비벼도 넘어질 부분이 세 군데나 있었다. 그는 당장 고치지 않고 먼저 주변 땅을 살폈다.

울타리 바깥 서쪽에서 바퀴 자국이 보였다.

마른 흙에 눌린 두 줄이었다. 자국은 폐광 쪽 비탈에서 내려와 밭의 북쪽 모서리 앞에서 끊겼다. 수레가 밭 안으로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도겸은 무릎을 굽혀 바퀴 자국을 만졌다.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았다. 오늘 새벽이나 어젯밤에 생긴 흔적이었다.

수레는 크지 않았다. 바퀴 간격이 좁고 눌린 깊이도 얕았다. 곡식이나 광석처럼 무거운 짐은 아니었다.

그는 자국을 따라 두 걸음 내려갔다. 폐광 입구가 있는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쇠를 씻은 듯한 냄새가 바람에 섞여 있었다.

도겸의 손이 허리로 갔다가 멈췄다. 칼은 없었다. 칼집이 없어도 손가락 두 개면 사람의 목을 꺾을 수 있지만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는 돌아서서 울타리 안쪽을 다시 살폈다.

회토 더미 근처의 흙이 이상하게 눌려 있었다. 자신이 걸어 다닌 자국과 달리 발끝이 바깥을 향해 있었다. 누군가 울타리 쪽에서 안으로 한 발 들어왔다가 곧바로 물러난 모양이었다.

도겸은 무릎을 꿇고 발자국 깊이를 확인했다. 발뒤꿈치보다 앞꿈치가 깊었다. 몸을 낮춰 움직이는 걸음이었다.

산짐승의 발자국은 아니었다.

그는 입구 쪽의 마른 억새를 한 움큼 꺾어 울타리 사이에 걸었다. 억새가 떨어지면 바람 탓인지 누군가 건드린 탓인지 구분할 수 있도록 매듭을 만들었다. 아래에는 작은 조약돌 세 개를 세워 두었다.

소박한 장치였다. 그러나 밤에 조약돌 하나만 굴러도 그는 깰 수 있었다.

도겸은 초가로 돌아가 불을 피웠다. 저녁을 먹고도 곧장 눕지 않았다. 낮에 만든 회토 더미 옆에 앉아 손바닥을 펼쳤다.

손금 사이에 흙이 남아 있었다.

무영의 손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손이었다. 표적이 잠든 방에도 피가 식은 돌계단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이제는 반대로 흔적이 남아야 했다. 자신이 이곳에 살고 있다는 흔적. 고랑 하나, 돌둑 하나, 아직 썩지 않은 회토 더미 하나.

그 생각이 낯설었다.

밤이 깊어지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도겸은 불씨를 재로 덮고 초가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기도 전에 억새 매듭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주 작았다.

하지만 사람이 일부러 숨을 죽일 때 나는 소리였다.

도겸은 문을 열지 않았다. 창문 틈으로 밭을 내다보니 달빛 아래 울타리의 그림자가 한 칸 길어져 있었다.

그는 초가 뒤로 돌아 밭 아래로 내려갔다. 정면으로 가면 달빛에 자신이 드러난다. 낮에 확인해 둔 낮은 돌둑을 밟고 옆으로 돌아가자 발소리가 흙에 묻혔다.

울타리 안쪽에 검은 형체가 있었다.

형체는 회토 더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손이 더미 속을 헤집고 있었다. 낙엽이 바스락거릴 때마다 움직임이 멈췄다.

도겸은 세 걸음 뒤에서 멈췄다.

상대의 오른쪽 발이 뒤로 빠져 있었다. 달아날 준비를 한 자세였다. 허리에는 짧은 칼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칼집 끝이 밭돌에 닿지 않도록 천으로 감싸져 있었다.

제법 익숙한 솜씨였다.

도겸은 낮에 세운 조약돌 하나를 발끝으로 굴렸다. 돌이 울타리 아래를 타고 굴러갔다.

검은 형체가 번개처럼 몸을 틀었다.

도겸은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옆의 나무 말뚝을 발로 밀었다. 말뚝이 넘어지며 울타리 한 칸을 막았다.

상대는 막힌 길을 보고 곧장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달빛이 소매를 스쳤다. 검은 천 끝에 붉은 실 한 가닥이 달려 있었다.

도겸은 따라잡을 수 있었다. 두 걸음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발을 내딛는 대신 회토 더미를 돌아보았다. 상대를 쫓아가면 밭에 남은 흔적을 놓치고 자신의 위치도 드러난다.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확인하는 편이 먼저였다.

검은 형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울타리 밖으로 빠져나갔다. 억새가 흔들리고 폐광 쪽 비탈에서 마른 돌이 두 번 굴렀다.

도겸은 끝내 쫓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면 칼을 뽑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죽일 수 있는 순간에도 무엇을 지킬지 먼저 정해야 했다.

그는 회토 더미 앞으로 걸어가 흩어진 낙엽을 살폈다. 자신이 쌓은 층 사이에 젖은 흙이 들어와 있었다. 손으로 넣은 것이 분명했다. 젖은 흙 밑에서 가느다란 검은 금속 조각의 끝이 드러났다.

도겸이 손가락으로 조각을 건드리자 쇠 냄새가 짙어졌다.

그는 금속을 바로 꺼내지 않았다. 바깥의 발자국과 회토의 흐트러진 방향을 먼저 눈에 담았다.

죽은 이름으로 산 밭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밭에 이미 자기 흔적을 심어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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